보는 영화 읽는 영화 | 서복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에 대한 질문
글 김경태 영화평론가
정부와 기업의 공동 프로젝트로 탄생한 복제인간 ‘서복(박보검)’은 인간의 영생을 돕기 위한 실험체로서 비범한 염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성장 억제제를 투여받는다면 영구적으로 살 수 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전직 요원 ‘기현(공유)’은 ‘안부장(조우진)’으로부터 서복을 이동시키는 임무를 전제로 자신의 뇌종양 치료를 위한 임상실험 참여를 약속받는다. 사실 정부는 영생이 가져올 인간의 탐욕에 대한 문제 제기로 실험체를 없애려는 계획인 반면에, 기업의 회장은 실험체를 도구로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신의 권력을 누리고자 한다. 기현과 서복은 자신들을 쫓는 정부 요원과 기업 용병을 피해 도주한다. 기현 입장에서는 자신의 목숨이 서복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그를 죽이라는 명령에 복종할 수 없다. 다행히도 서복의 염력은 강력한 무기가 되어 그들의 공격을 막아낸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몸은 점차 쇠약해진다.
서복은 우리가 익히 봐 왔던 여느 복제인간이나 로봇과 달리 인간으로서의 치열한 인정투쟁을 벌이지 않는다. 실제 인간과 똑같이 보고 말하고 느낄 수 있다며 동질성을 바탕으로 인정을 애걸하지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누군가에 필요한 무엇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영생을 위한 도구라는 주어진 운명을 거슬러서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운명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기현에게 점차 마음을 열면서 서복의 몸짓은 그 관계를 향한다. 서복은 동료를 죽음으로 내몬 과거를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기현을 위해 염력을 이용해 파도를 막고 돌멩이를 모아 돌무덤을 쌓는다. 그리고 무수한 새 떼들을 불러 모아 바다 위로 거대한 원을 그리도록 한다. 앞서 적을 제압하던 것과 비교하면 무의미하게 염력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이 장면을 길게 보여준다. 뚜렷한 목적이 부재한 그 유희적 행위들은 오롯이 그들의 관계를 매개하기 위한 수단이 될 뿐이다. 서복은 연구실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갈 곳이 거기밖에 없어서라기보다는 이제 (태생적 운명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대로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기현의 삶을 연장해주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즉, 마침내 누군가에게 필요한 무엇이 되는 순간이 온 것이다.
돌아온 연구소에서 서복이 평생 실험체로 갇혀 지낼 운명을 알게 된 기현은 죽음을 무릅쓰고 그를 구한다. 그러나 서복은 이 지난한 싸움을 끝내기 위해서는 자신이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복제인간은 실험체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으로서의 고결한 가치를 습득한다.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복제인간의 운명을 거스르며 죽는 순간, 비로소 인간이 된다.
단, 언제 죽여도 상관없는 예외상태의 실험체로 죽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이용하거나 죽이려는 모든 이들에게 맞서 싸운다. 대신, 가장 신뢰하는 사람에게, 즉 자신을 실험체가 아닌 인간으로 인정해준 기현에게 죽여 달라는 부탁을 한다. 기현에게 그것은 곧 자신을 죽이는 것과 같다. 결국 기현은 서복에게서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이제 서복은 죽었고 기현도 곧 죽을 것이다. 삶과 죽음에 연연하지 않는 복제인간의 허무주의적 욕망은 낯설다. 삶을 찬양하기보다는 죽음을 끌어안는 비극적인 SF영화는 그리 달갑지 않을지도 모른다. 복제인간 연구는 생명 윤리적 차원 이전에 죽음의 고유한 가치를 훼손하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죽음은 삶의 유한성에 대한 단순한 지표에 그치거나 인간의 탐욕에 제동을 거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은 인과관계도 종속관계도 아닌 대등한 관계이다. 그리하여 영화는 삶에 집착할 때가 아니라 죽음을 ‘삶처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말한다. 나아가 이해관계에 따라 사람을 쉽게 죽일 수 있는 사람과 인류를 위해 스스로 죽기로 결심한 복제인간 중 누가 더 인간다운지를 묻는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유한한 삶 속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관계적 욕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