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항 박형진 시인께
‘십 이월이 무어시다냐’ 했었는데
몇 가지 일을 약속, 계약하고 하다 보니
매조시를 해야 하는, 그래 산 넘어 산, 그 산을 또 넘듯이 살고 있습니다.
옹기가마 땔감으로 앞산에서 벌목된 원목을 받았습니다. 박 선생님 아버님의 나무 다룬 솜씨에 대한 이야기로 나무가구에 관한 책을 구했습니다. [한국의 목가구](박영규)입니다. 세 번째로 구한 책입니다. 선행 된 책이 [한국의 목칠가구](최순우, 박영규)인데 쌍으로 두 번 잃었더랬습니다. 서울살 때 이사하다가 잃었는데 1987년도였고, 두 번째는 1996년도였지 싶습니다. [한국의 목칠가구]는 구했는데 [한국의 목가구]까지는 또 다시 구할 엄두가 안났더랬습니다.
엿(고물)장사를 할 때 고물상에 장사를 오래 해오던 분이 계셨었는데 하루는 골동품을 보여주며 ‘이런 게 돈이 된다네’ 하시기에 골동이라고 처음으로 사본 것이 목물이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골동품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물건을 볼 줄 아는 눈이 없어 깝깝했기에 뒷날 [한국의 목칠가구]를 구해 최순우 선생의 해설을 필사했더랬습니다. 그러다 충남 부여에 갔다가 은산에서 나온 물건이라는 말에 반닫이를 들였는데 신혼살림살이가 되었고 찬탁과 문갑을 주문제작하면서 도면이 있는 [한국의 목가구]를 구했다가 두 번 잃었더랬습니다. 그래 다시 구할 일이 있을까 싶었었는데 박 선생님께 ‘언젠가 옹기불을 놓게 되면 나무를 이철수 선생의 아버님처럼 다뤄보고 싶다’고 하구서 다시 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편지를 식탁에서 쓰고 있는데 마루테이블입니다. 제가 나무백정(?)이긴 합니다만 차마 못 땐 나무들이 있었습니다. 왜정시대 때 지어진 농협을 뜯은 나무하고, 방화마을과 중백마을 큰집을 뜯은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화재 때 그야말로 다 태워먹고 판재는 따로 뒀기에 살아남은 게 마루장이었습니다. 이게 반으로 뽀개서 윗면만 판으로 다듬은 나무라 무겁기도 오지게 무겁답니다. 그래 이 마루장을 편집하듯 써야했기에 충북 옥천 이지당의 좌익랑 우물마루를 모티브로 하여 아예 십인용 테이블로 만들어 쓰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내에게 혼난 일이었는데 쓸수록 좋다고 칭찬을 받는 묘한 물건이 되었습니다.
나무를
다시 생각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들어왔던 엔진톱 돌아가는
소리를 왱왱거리는 모기처럼 성가셔했는데
벌목된 원목으로 맞이하고, 나무가구에 관한
책을 구하고, 마루테이블에서 편지를 쓰면서
나무를 다시 생각합니다.
사물화된 이 나무를 두고 죽었다고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살았다고 할 수도 없으면서 ‘사물화는 생사의 경지를 넘어서는 일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해를
그렇게 보내고,
또
새해를
그렇게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합니다.
2021. 12. 16
옹기장이 이현배 드림
손내 선생님!
12월도 벌써 종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세월 참 빠르지요? 나이 먹어 늙어가는 사람들의 공통된 느낌이라고는 하지만 저는 유달리 올해가 빨리 지나간 것 같습니다. 좋은 일 중에 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지만 괴롭고 힘든 일에 처했을 때도 시간은 왜 그리 빨리 가는지, 꼭 요술을 부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없지 않았어요. 농사꾼은 4계절의 변화에 조응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좀 더 나누면 한 달, 혹은 24절기의 반달 단위로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마무리 하는데 언제부턴지 저는 직장인도 아니면서 세월의 단위를 일주일로 끊어서 생활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닙니다만 그래서 더 그럴까요?
제가 나가고 있는 공동체 학교의 수업들이나 집에서 일주일에 몇 번 씩하는 건강운동, 지역에 조직되어 있는 여러 가지 정기모임, 농사일과 날마다 수행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집안일들을 챙기다보면 대체 1주일이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모르겠더군요. 꽃피는 봄이 왔다 갔는지 뜨거운 여름이 있기나 했는지 가을은 느끼기나 해봤는지 도무지 눈앞에서 다 휙휙 사라져버린 통에 이 겨울만은 아주 단단히 곁에 붙들어 두고 찬찬히 지켜볼 작정입니다. 지나고 나면 그 다짐들이 늘 헛맹세가 되지만서도요. 학교는 방학이고 농사일도 이제는 한두 가지를 빼면 내년 3월까지는 긴 동면에 들었으니까요.
그제와 어제는 날이 몹시 춥고 눈이 왔는데 오늘은 참 맑고 햇살이 포근합니다. 감나무 가지에 부러 따지 않고 놔 둔 홍시에 아침 식사를 하느라 소란스럽던 뭇새들도 어디로 몰려가 쉬는지 조용하고 일요일인데도 저 멀리 도로를 내달리는 차 소리도 간간할 뿐입니다. 저는 이런 시간이 좋습니다. 겨울의 낮은 햇살이 문을 뚫고 방 안 깊숙이 들이비칠 때의 그 우련한 밝음과 눈부심과 마음속에 켜지는 또 하나의 햇볕들. 이 순간만큼은 제 마음속에 있던 어떠한 것들도 당겨졌던 현들이 풀리듯 풀려버립니다. 그러면 전파가 잘 잡히지 않아 화면 영상이 추상화처럼 깨지는 저희 집의 낡은 TV를 보다가 남의 집에 가서 터럭 한 올 모공 하나하나까지 알 수 있는 고화질 TV를 보는 것처럼 지금 이 시각의 삶의 순간이 명료해집니다. 가끔 이런 농담을 하지요, 제가 저한테. ‘이런 순간이 계속되면 죽기는 쉽지 않겠군!’
무엇이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미뤄뒀던 글을 쓰려고 마루 끝에 나앉아 연필을 깎을 때부터였는지 포근한 햇볕에 눈 녹은 처마가 물이 똑똑 떨어질 때부터였는지, 덩달아 오늘 하루는 내 원래대로 붙들어 두고 찬찬히 볼 수 있겠구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숨겨진 쪽을 들여다보면 겨울은 정중동하는, 결코 멈춰 있을 수 없는 시간들의 연속이죠. 적어도 제 머릿속에서만은 그렇답니다. 차라리 일 속에 묻혀 있을 때 생각의 겨를이 없던 것과는 비교되는 것입니다.
조화로운 삶이란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합니다.
집이 낡아 간다
지은지 이십여년만에
차양이 떨어지고
마루가 삐걱대고
흙담 한 켠이 헐어진다
나도 낡아간다
집보다 더 오래된 집은
지붕머리가 하얗게 세어지고
처마 눈앞이 흐려지고
꿈에서도 대문 이빨이 빠진다
오랜만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자꾸만 이곳 저곳을 살펴보지
불 때는 아궁이를 들여다보고
그 방문을 열어보고
안 보는 듯 옆 눈질로 나를 쳐다봐
나는 부끄러워서
이렇게 사는게 편하다고
바깥 세상은 내게 맞지 않는다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그러나 지금은 햇볕 따수운 토방에 앉아
이나 잡고 싶다는 말은 차마 못하지
-나는 낡은 것이 좋다
며칠 전에 쉽게 쓴 글 한 편입니다. 방금 전에 조화로운 삶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다가 이 시를 옮겼습니다. 우스운 삶이지요? 편지를 쓰는 사이 다시 아스라이 시간이 흘러간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요즈음 부쩍 더 시간이 흐르는 게 눈에 보입니다. 12월이어서만은 아닙니다. 남은 한 해 내내 건강하소서. 줄입니다.
2021. 12. 20
박형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