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몽환적이고, 변화무쌍하게혹은 온 신경을 긁어내는 소리를들려주는 전자음악. 그 음악처럼거침없는 청년 문이랑. 그는 그의 본명보다 그레이Graye라는이름으로 활동하는 전자음악 작곡자이자, 프로듀서다. 외양으로따지자면, 목 언저리에 물음표와느낌표 문신을 하나씩 새긴 것을제외하면 순수한 동네 청년같은모습이지만, 서울과 군산을 오가며 자신의 음악적 기량을 마음껏뽐내며 인지도를 탄탄히 쌓아가고 있었다.
자신이 하는 음악을 알려달라는 말에 그는 자신없는 표정이다. 그의 음악이 자신없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음악을 설명할 특별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냥 전자음악이라고 알려주기는 하는데, 전자음악 쪽에서도 새로 파생된 음악이에요.상당히 한쪽으로 치우친 음악이죠. 전자음악이라도 클럽에서 나오는 음악이 아니라 우울하고 침울한 음악입니다. 전자음악, 비트뮤직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제가 하는음악을 특정하는 장르는 없어요.” 그래도 그의 음악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은 사뭇 진지하다.
“전자음이 낼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음악이에요. 정적인 연주음악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전자악기로 만들어 내는데 가능한 모든 음악을 새로운 방법, 제 식대로 빨아들입니다. 골방에 앉아 각기 다른 장르의 음악들을 전자음악에 섞어보고 찢어보고, 이상한 짓을 다 해보는 거죠. 불편할 수도 있지만 자기 전에 세 번만 들으면 중독될 걸요?”
이번에 그가 낸 27분가량의 미니앨범 ‘MON’도 그가 하는 작업의 연장선에서 태어났다. 2년 전 완성된 앨범이었지만 이제야 음반회사를 찾아 어렵사리 정식으로 발매한 음반이다. 앨범엔 D’MON E’MON C’MON A’MON GUMGANG RIVER 등 7곡이 힙합리듬과 조용한 멜로디로 어우러져 그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보여준다.
음악의 다양성을 넓히는 일
그가 음악과 인연을 맺은 것은 고등학교 무렵, 이제 5년이 돼간다. 그 때의 그는‘평범한 음악’을 했다. 동아방송예대 실용음악과에 입학하며 음악가에 대한 꿈을 키워갔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 군산으로 내려와야만 했다. 그렇다고 음악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음악을 계속했고 데모음반을 만들어 레코드사에 문을 두드렸다. 물론, 답은 없었다.
아르바이트로 삶을 사는 것이 싫어 자신의 음악도 알릴 겸 음반을 팔아볼 생각을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앨범이 ‘WAY TO LOVE’ 데모앨범이다. 단골 음악사에 가서무작정 판매를 시작했고 공연을 하며 400여장의 앨범을 팔았다. 깨알 같은 희망이 생겼다. ‘제대로 하면 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생각했다.
같이 음악을 하던 친구들을 독려하며 음악을 하기 시작했다. 2년여 전, 신시사이저 노브를 돌려가며 음반 ‘W’를 발표하고 그의 음악적 방향을 정했다. 군산, 서울, 전주에 사는 친구들이 모여 ‘에드벨류어’라는 크루도 만들었다. 래퍼,힙합, 어쿠스틱밴드, 프로듀서, 건반을 하는 10여명의 젊은 음악가들이 함께만든 에드벨류어는 그룹인 동시에 레이블회사로 발전했다.
“군산에서 혼자 하니까 심심하더라고요. 우연히 만난 션만 형을 비롯해 PNSB, 사일라밤, 김솔… 마음맞는 사람들을 한 둘씩 모아 에드벨류어를 결성했는데 연주만 하는 것보다는 앨범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일종의계모임이랄까. 소자본으로 시작해서 수익이 나면 다시 다른 사람의 앨범을 내주는 거죠. 아직 정식으로 회사를 등록한 건 아니지만, 후원자가 생겨 곧 ‘에드벨류어’라는 이름의 레이블회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가 이렇게 사람들을 모으고, 음악을 하는 것은 그의 음악을 넘어 지역의음악 환경을 바꿔보겠다는 생각도 있기 때문이다. 음반시장의 천편일률적인 음악이 주류가 된 상황에서 그가 하는 음악도 하나의 음악임을 알리고 싶다는 게그의 생각이다. “아직까지 이런 음악이 생소한 사람들이 많아요. 소위 비주류음악이라는 것을 이 지역에서 접해 볼 기회가 많지 않으니까요. 서울의 흐름이정답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음악이 답일 수 있다는 답지를 하나 더 만들고 싶어요. 다행히 저희가 활동을 하면서 이런 음악을 하는 것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기고 있어요. 음악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있다는 것, 참 재미있어지는것 같아요.”
재미있는 것은 그가 관객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음악을 연주했지만, 이미 그의 관객은 곳곳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골방에서 비주류 음악을 만들 듯, 이런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주류에 밀려 구석에서 홀로 음악을 듣고 있더라는 것이다. 음악의 다양성을 위해, 낯선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을 위해 그는 더 많은 것을 보여줄 자리를만들려고 한다. “전주, 광주에 있는 친구들과함께 투어도 계획하고 있어요. 고정된 장르의 음악만 들여오는 상황을 깨려면 오랜 시간해야 할 것 같아서요. 이런 음악을 좋아하는것은 당신 혼자만이 아니다, 우리도 좋아 한다, 이런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 그리고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 되고 싶어요. 음악의 다양성을 만들어 가는데 우리가 일조하고싶어요.”
비딱하게 보는 아이들
음악에 대한 그의 지향점은 군산과 서울의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발전했다.서울의 아류가 아닌, 지역 음악이 서울의 음악을 뛰어 넘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신보의 쇼케이스를 군산에서 먼저 연 것도 자신이 생활하는 지역이 먼저라는 생각에서였다. “한 마디로 얘들 뭐야, 이런 것 같아요. ‘듣보잡’이었던 군산에 새로운 ‘신’이 생겼다는 게 신기한 거죠. 군산이 짱이다, 이런 건 아니에요. 제가 군산에 있으니 군산을 알리고 여기서 음악하는사람들을 다른 지역에 알리고 싶은 거죠.”
그의 활동에 호기심을 보이는 타 지역 음악가들이 군산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음악인들만 오더니, 발레리나 화가, 장르에 관계없이 예술가들이군산을 찾았다. 전주, 익산에서 군산으로 옮긴 사람들이 생겼고 서울에서 군산으로 내려와 녹음하는 친구도 생겼다. “다른 지역에서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뿌듯하죠. 그래서 더 열심히 하려고 해요. 같이 음악하는 친구들끼리 필요한 것, 부족한 것을 피드백을 하고 우리끼리 뭉쳐서 다니는 것보다 더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무대를 만들고 싶어요.”
그렇다고 군산 상황이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공연할 소극장 하나없는 것이 군산의 상황, 악조건은 여전하다. 서울에서 활동해야만 알아주는 편견도, 더군다나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도 없다. 이런 악조건에서부딪치는 그들의 열정에 서울의 음악가들의 관심은 더 높다고 했다.그들이 관심을 끄는 이유 중의 하나는, ‘삐딱하게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뭐든 비판을 시작으로 한다. 새로 생긴 것은 소중히다뤄줘야 한다고 하는데 그의 생각은 반대다. 당근만 주기보다 비판하고 채찍질하는 것을 통해 단련하고 발전할 수 있어야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욕 듣기싫다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SNS에서도 까칠하게 이야기하고 날카롭게 비평하는 것도 그런 이유죠. 서울의 음악을 따라하고 연예인척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안된다고 봐요. 예술의 상대성을 인정할 줄 아는 분위기 그리고 음악을 중심에두고 활동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동네에서 음악하며 먹고사는 길
그가 원하는 음악을 위해서는 가야 할 길도, 해야 할 일도 많다. 하고 싶은일은 더 많다. 레코드페어도 해보고 싶고, 전북 인디신이라고 불릴 수 있는 소식지도 생각하고 있고, 젊은이들이 모여 함께 할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기도하다.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음악할 수 있는 문화공간을 군산 곳곳에 만들려고도 한다. 군산 문화가 다양하게 살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기획자들과 예술가들이 지역을 떠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그는 가지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여전한 꿈인 ‘독립적으로 음악하며 먹고사는 것’을 실현해야 한다. 취미로 음악을 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다. 그러니 음악으로 먹고살 수 있어야 한다. 여전히, 최저생계비를 왔다 갔다 하는 생활이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며 음악하는 상황은 벗어났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