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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8 | 연재 [여행유감]
길을 잃었을때 온전히 갖게 되는것
김정경의 태국 여행
김정경(2018-08-30 11:14:04)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호기심과 모험심이 넘치는 성격도 아니거니와 엄청난 방향감각을 지닌 까닭이다. 그런데 지난겨울 여행을 결심했다. 12년 동안 해오던 일을 그만두고 나자 금방 겨울이 왔다. 출근하는 삶에 사표를 던졌지만, 홀가분함이 추위와 허전함을 달래주지는 않았다. 차가운 공기도, 바깥의 삭막한 풍경도 지긋지긋하게 여겨지던 어느 날이었다. 이전에 일한 원고료가 입금되자 나는 친구에게 연락했다. "여행 가자, 우리."라고 내가 말했고, 그녀는 "그래." 하고 답했다. 백수인 두 여인의 치앙마이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치앙마이 국제공항에 닿았을 때 우리를 마중 나온 것은 뜨거움이었다. 말 그대로 여름밤의 열기가 덥석 품에 안겨 들었다. 나와 친구는 당황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초록으로 뒤덮인 카페와 지붕을 뚫고 나와 자라는 커다란 나무들이 있는 건물들 사진을 보고 한눈에 반했지만, 기온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겨울에서 여름으로 건너왔다는 것을 후텁지근한 공기로 비로소 실감했다. 네모반듯한 모양의 구시가지 올드타운에 숙소를 잡았다. 700여 년 전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벽과 그 둘레에 물을 채워 넣은 해자가 오랜 유적지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만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행을 꿈꿨다. 카페에서 우아하게 브런치를 즐기고 근처 사원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무료해지면 숙소에서 책이나 읽으며 쉬려고 했다.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카페와 사원이 즐비한 올드타운은 그 계획에 더없이 어울리는 장소였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나는 아침잠이 없는 새벽형 인간이었다. 평소 5시 반이었던 기상 시간이 낯선 곳에서 1시간 더 앞당겨졌다. 일찍 날이 밝는 치앙마이의 하루는 내게 너무 길었다. 그래서 무계획이었던 계획이 마구 엉켜서 없던 일정이 생겨났고, 어김없이 그곳에서 유감스러운 일들이 벌어졌다. 여행 둘째 날, 태국 여행자의 상징(?) '코끼리 바지'를 조금 더 싸게 사려고 현지인이 이용하는 시장인 와로롯 마켓을 2시간 넘게 헤맨 뒤 샀으나, 그 바지는 차마 말하지 못할 이유로 한 번밖에 입지 못했다. 셋째 날 간 창푸악 야시장에서는 인파에 반쯤 넋이 나가서는 주문한 과일 주스를 받다가 카메라를 떨어뜨려 렌즈를 망가뜨렸다. 또 이른 아침 숲속에서 열리는 유기농 시장, 나나정글에서 욕심껏 빵을 샀다가 가방 안에서 눌리고 치여 떡 같아진 빵을 다음 날까지 꾸역꾸역 먹어야 했다. 호기롭게 혼자 나선 두 번의 산책에서 두 번 모두 길을 잃었다. 허나 사소한 불운으로 깊이 낙담하지는 않았다. 길을 잃었다고 느낀 그 막막한 순간, 길은 낯선 풍경 속으로 나를 데려갔다. 두 사건은 예술인 공동체마을이라는 반캉왓 근처에 얻은 세 번째 숙소에 머물 때 일어났다. 처음엔 변덕 때문에 낭패를 보았다. 가벼운 몸살을 앓는 친구가 하루 정도 쉬기를 원했고, 나는 숙소에서 가까운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카페에서 빈둥거리다가 문득 그녀와 다음 날 가기로 약속한 왓우몽을 미리 가 보자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녀와 함께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비범한(?) 방향감각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는 했다. 그래서 여행 내내 길잡이가 돼 준 그녀를 위해 미리 답사를 마쳐 놓으려고 했는데, 지도상에는 분명 15분 거리에 있다고 한 동굴사원이 아무리 해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입구를 찾지 못해 주변을 빙빙 돌면서 한숨 쉬고 있을 때였다. 불쑥 길가 숲에서 커다란 동물이 나타나 내 쪽으로 걸어왔다. 생김은 사슴과 비슷하고, 몸집은 사슴보다 훨씬 크고 털은 짙은 갈색이었다. 녀석과 나 사이에는 철책이 놓여 있었으므로 아마도 돌보는 사람이 있는 듯했다. 고향의 아버지가 키우시는 소처럼 순하고 맑은 눈망울로 나를 한참 쳐다보았다. 낯선 곳에서 처음 보는 동물과 눈을 맞추고 서 있었던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위로받았다. 그런데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개들이 내 앞에 나타났다. 태국에는 개를 풀어 키우는 집도 있고, 주인 없는 개와 고양이도 많아서 거리에서 자주 마주친다고 들었다. 하지만 고양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개들이 떼 지어 내 쪽으로 달려오면 몸이 얼어붙었다. 양치기 개처럼 그 동네 개들이 나를 몰았고, 나는 뒤돌아 허둥지둥 걸어야 했다. 그리고 그 길에 거짓말처럼 왓우몽의 입구를 발견했다.

두 번째 길을 잃었던 일도 개 때문이었다.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깬 새벽, 조금 익숙해진 동네를 어슬렁거려 볼 심산으로 산책에 나섰다. 원래 가려던 길머리에 검은 개, 흰 개, 누런 개, 참으로 다양한 크기와 색을 가진 개들이 있었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개 짖는 소리가 안 나는 곳으로 걷는 것에만 신경 쓰다 보니 또다시 길을 잃고 말았다. 온 길을 되짚어 돌아가려고 몸을 틀었을 때 스님 두 분이 내 뒤에서 걸어오고 계셨다. 그들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가자 사원이 있었다. 숙소를 드나들 때마다 지나치던 왓람퐁이었다. 알고 보니 사원의 다른 쪽 문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잠시 앉을 곳을 찾고 있을 때 우리나라로 치면 대웅전쯤 돼 보이는 중심 건물을 에워싸고 사람들이 자리를 깔고 앉기 시작했다. 바구니에는 과자며, 과일, 음료수 등 음식이 잔뜩 담겨 있었다. 곧이어 노스님부터 가장 어린 스님 순으로 이루어진 행렬이 그들 앞으로 왔다. 사람들은 짧은 기도를 올린 뒤 스님이 들고 있는 그릇에 그것을 넣었다. 하나같이 웃는 얼굴로, 너무나 반갑고 기꺼운 몸짓을 했다. '저게 그 유명한 탁발일까? 사원 안이니까 시주나 공양쯤 되려나? 뭐라고 부르는 의식일까?' 치앙마이 여행 중 가장 맹렬하게 호기심이 끓어올랐던 순간이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태국에는 '부엇'이라는 제도가 있고, '부엇'은 태국에서 태어난 남자라면 누구든 한 번은 절에 들어가서 생활하는 제도라는 것을. 태국에서는 아들이 승려 생활을 하는 동안 쌓은 공덕이 어머니에게로 돌아간다고 믿는단다. 자식이 부엇을 행하기 위해 사원에 들어가면 그 부모는 매일 아침 사원으로 찾아가 승려가 된 자식에게 음식을 보시한다. 내가 보았던 아침 풍경에 대한 의문이 풀리자 사원마다 어린 승려들이 자주 보였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길을 잃는 바람에, 기를 쓰고 조금 더 걸어 보겠다고 버틴 덕에 나만의 치앙마이를 갖게 되었다. 호기심도, 모험심도 별로 없고, 여행도 좋아하지 않으면서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이런 장면 때문이다. 치앙마이를 떠나기 전 친구와 다시 한번 왓람퐁에 가서 시주하는 사람들의 환한 얼굴을 보았다. 이제 내가 사는 곳에도 여름이 왔고, 새벽에 일찍 잠에서 깨는 날이면 문득 그때 보았던 사람들의 표정이 떠오른다. 그리고 나를 그곳으로 안내해 준 개들도 잘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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