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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9 | 연재 [수요포럼]
한법적 가치를 세워야하는 이유
대한민국, 역사 바로 세우기
윤희숙(2018-09-17 10:48:22)



1948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서는 감옥에 갇혀있던 독립운동가들이 석방되자 환호하며 길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이 사람들은 거의 다 이름없이 죽어갔다. 해방과 함께 청산됐어야 할 친일파들은 이승만 독재정부를 등에 업고 오히려 독립운동가들을 청산했다. 반민족행위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반민특위 역시 좌익척결과 정권유지를 노리던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한채 해산하였다. 유럽에서는 70년이 지난 지금도 나치청산은 계속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48년 제헌국회 반민특위 특별법에서 정한 활동 시한인 1950년 9월 22일 다 채우지 못하고 49년 8월 31일로 단축법안이 통과되며 거의 1년 만에 해체되고 말았다. 반민특위 해체는 해방 이후 단죄되어야 할 친일파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하고 친일파들이 친미, 반공으로 살아남아 그 세력을 유지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여기에서 출발한다.



<반헌법열전편찬위원회>는 '진정한 헌법적 가치란 무엇일까? 헌법의 이름으로, 국가권력과 폭력을 동원해 헌법적 가치를 훼손한 이들은 진정 누구일까? 법률적 심판이 불가하다면 역사의 이름으로 기록하고 심판해야 한다.'는 뜻으로 2015년 7월 조사활동을 시작. 3년만인 2018년 7월 12일 국회에서 헌법제정 70주년 반(反)헌법행위자열전 편찬 1차보고회 <헌정사 적폐청산과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발표했다. 질곡의 현대사를 낳은 장본인들 중 주요 인물 9명과 나머지 106명의 반헌법 행위자를 선정, 명단과 그들의 행적을 공개했다. 그들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앞으로 나아가려는 역사의 발목을 잡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위원회에 책임편집인으로 참여한 한홍구 교수는"학교에서는 사소한 규칙을 어겨도 칠판에 이름을 적는데 헌법을 파괴하고 민간인을 학살하고 헌법 부정을 자행하고 무고한 시민을 잡아다가 조작해서 간첩 만들고 그런 자들 기록을 안 하면 안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도 떵떵거리면서 잘 살았기 때문에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라며 더 늦기전에 기록으로 반드시 남겨야 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역사에 기록될 반헌법행위자들
한홍구교수는 이번 강연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주요 인물 9인으로 뽑힌 한경록, 박찬일, 윤진원, 양두원, 허문도, 이학봉, 박처원, 고영주, 양승태 중 가장 최근의 인물인 양승태와 그 외 김기춘의 행적에 특별히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친일경찰로 시작해 민간인학살 전 분야에서 악명을 떨친 경기도경국장 한경록은 독립운동가를 잡던 친일경찰이 청산되지 않고 다시 경찰로 승승장구하며 좌익척결과 민간인 학살의 주범이 된다, 그의 대한 기록은 많지 않았는데 1952년 12월 미국 잡지 '라이프'에 그의 생활속 사진과 함께 학살장면이 실리는 등 사진 자료와 그를 이승만의 친구로 지칭하는 기사가 대서특필 됐다. 53년 경찰은 퇴직하고 62년 사망할 때까지도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국정농단의 주역 경무대 박찬일 비서관은 이기붕마저 쥐어 흔들면서 경무대 인의장막 총 수령으로 4.19 혁명이후 노쇠한 이승만의 눈과 귀를 막고 직권남용과 부정축재를 일삼았다. 그러나 처벌은 겨우 '공용서류무효죄'로 구속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중앙정보부 해외공작단장 윤진원은 김대중을 납치했지만 죽이지 않고 살려보낸 장본인으로 실미도 부대를 창설했지만 결국 권력에 버림받은 인물이다. 중앙정보부 차장보 양두원 동백림사건 유학생 납치,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의 총지휘자로 서독대사관 참사관으로 주미공사를 역임했으나 최악의 국위손상 코리아 게이트 책임자로 두 나라에서 사실상 추방당한다.
5공화국 최장수 민정수석 이학봉은 보안사 출신 정치군인으로 정승화 게엄사령관 연행 및 고문, 김재규 고문수사와 김대중 내란음모조작 최태민 조사방면, 수지김 간첩조작 책임자다.
당시 치안감 박처원은 대공 경찰로 전두환 정권에서 시국사건 고문 수사를 지휘하며 1980년대 학림용공조작, 김근태 고문, 박종철 고문치사은폐조작을 주도한 혐의로 기소돼 처벌받았다.
특히 뛰어난 그의 고문기술은 친일 경찰로 유명한 노덕술로 부터 전수받았다 한다 노덕술은 일제치하 수백명의 독립투사를 고문한 인물로 반민특위에서 조사한 인물이었음에도 반이승만 세력 숙청과 좌익분자 검거를 위해 친일행적에 대한 면죄부를 받고 다시 경찰에서 똑같은 고문을 자행했다.
공안검사 출신으로 영화 변호인에 나오는 부림사건 당시 수사검사였던 고영주는 통진당 해산과 전교조 법외노조화 이론가다. 세월호 특조위 진상조사 방해한 공을 인정받아 방문진 위원장으로 취임, MBC파괴의 주역이 되고, 사학분쟁위원으로 부패사학 설립자 옹호, 친북반국가행위자 인명사전 편찬위원장을 맡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해 명예훼손죄로 고발당했다.
스타급 반헌법행위자 2명이 경남고출신인데 양승태와 김기춘이다. 경남고는 김영삼, 문재인 전·현직 대통령을 2명이나 배출한 명문이다. 양승태는 서울법대 졸업후 사시에 합격하고 서울민사지법 판사 부산지방법원장, 법원행정처 차장, 대법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사법농단 사태 발생 이전에 이미 반헌법행위자로 선정되었고 조작간접 6건, 긴급조치 12건을 판결하며 공안조작사건을 도맡아 승승장구한 사법엘리트주의의 화신으로 민복기 유태흥이 울고 갈 정도로 최악의 대법원장이다. 과거사를 뒤집고 노동을 탄압하며 박근혜와 거래를 했다. 법대로 판결하려는 판사를 사찰한 사법부의 안기부장 그런 그가 박근혜가 대법원장 동태를 파악하니 '중대한 반헌법적 사태'라며 반발했다. 하지만 국회청문회에서 판사들 사찰한 것이 폭로되어 사법부 안팎에서 중대한 반헌법행위로 비판받게 된다. 양승태가 1975년 판결한 4건의 간첩사건은 양승태의 경남고-서울법대 선배인 김기춘이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조작했으며 재일동포사건 등 그가 판결한 6건의 간첩조작사건은 재심에서 5건이 무죄판결을 받았고 1건이 재심 진행중이다.
양승태와 김기춘의 경악할만한 합작품은 최근에 밝혀진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이다. 일본 아베정부와 전범기업을 위해 한국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대통령이 우려를 표명한 후 김기춘 비서실장의 소집으로 2013년 12월. 김기춘, 황교안, 윤병세, 차한성 등 4인이 비서실장 공관(공관에 모인 이유는 집무실과 달리 공관은 출입자 기록이 남지 않음, 부적절한 자리 인식 가능성))에 모여 긴급회동을 갖고 재판결과를 두고 법부무 판사들의 해외파견 문제로 외교부와 딜을 한다. 이 기막힌 회동은 법원행정처에서 작성한  대외비 문건 '강제징용자 판결 관련 외교부와의 관계'에서 '외교부에 절차적 만족감을 주기 위해 노력하자'가 공개되면서 밝혀졌다. 이 회동 후 주 유엔 대표부에 법관이 파견되고 대법원은 민사소송규칙을 개정 '국가기관 등이 대법원에 의견서 제출을 가능'케 했다. 2015년 11월 법원행정처 '오스트리아 파견' 문건 작성 '신일철주금 사건에 외교부 입장을 반영해 재판 지연' 2016년 11월, 외교부 '배상판결시 양국관계 파국' 의견서 제출하자 2017년 6월, 주 제네바 대표부에 법관파견이 성사되고 사법부는 5년동안 결론을 내리지 않다가 2018년 7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재판을 회부했다. 전쟁피해국 대통령과 정부, 외교부, 사법부가 작당해 자국 징용피해국민을 저버리고 전범국과 전범기업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 재판부와 딜을 했다. 이게 나라냐?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부이고 외교부이고 법원인가?. 국민기본권 보장은 안중에도 없고 특히 양승태의 대법원은 단지 해외에 판사들을 파견하기 위해 사법농단 행위로 헌법의 가치를 저버렸다.
그럼에도 법원은 관련 자료 압수수색 영장을 번번히 기각하며 제식구 감싸기에 급급했으나 검찰의 외교부 압수 자료에서 이 같은 '징용재판 거래'의 진실과 사법부의 민낯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양승태는 과거청산 없는 민주화가 낳은 괴물 대법원장으로 기록되었다.
양승태는 여성 인권사건 등에서 전향적인 목소리를 내는 합리적 판결을 내린 경우도 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호주제 위헌제청, 성범죄 친고죄 폐지 여성의 종중 회원인정 등 또한 여성인 김소영 판사를 대법관으로 발탁하고 법원행정처 처장에 임명한 것. 그러나 김소영의 발탁은 여성주의 보다는 법원행정권 남용에 대한 비난을 무마하고 자신에 우호적인 후계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시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는 전형적인 사법엘리트로 법원내의 핵심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나 그 화려한 마지막은 참담하다. 양승태는 한국 사법사상 헌법 파괴에 앞장선 최악의 대법원장으로 기록될 것이고 '반헌법행위자열전'에도 그 이름을 나기게 되었다. 어쩌면 대한민국의 사법역사는 양승태 이전과 그 이후로 기록되어야 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양승태 대법원장을 반면교사로 삼아 한국 사법부가 더 이상 치욕의 길을 걷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 때만 해도 양승태가 구속까지 될 것이라고는 확신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피고인으로 재판정에 서는 것을 거의 확신한다.


사법농단의 주인공들, 한국 정치의 주역이 되다-작은 양승태들
국회법사위원장 여상규는 간첩조작사건 판결을 해왔던 판사였다. 그가 유죄를 판결한 사건 피해자 석달윤씨는 진실화해위에서 간첩조작을 확인하고 진실규명 결정 및 재심을 권고해 23년이 지난 후 무죄선고를 받았다. 올초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여상규에게 과거 자신의 잘못된 판결에 대한 소감을 물었고 그는 "내가 왜 책임을 느껴! 웃기고 앉아있네" 라고 반응해 국민의 공분을 샀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려 놓고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을까? 이런 자가 어떻게 법사위원장을 맡을 수가 있는지 그들은 그 자리에서 양승태의 사법부를 비호하고 있다. 자한당이 법사위원장을 절대 포기 못하는 이유다. 국회법사위가 대한민국 사법부 개혁 발목잡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심진구라는 고문피해자가 지워지지 않는 고문의 흔적을 안고 가해자들을 몽타주로 그렸다. 그중 한 명으로 밝혀진 자가 당시 공안검사로 이름을 날린 정형근 전 한나라당 의원. 대한민국은 이런 자들이 떵떵거리며 사는 나라였다.


해방을 맞았지만 독립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꿈꾸던 나라는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사의 비극은 여기에 있습니다. 큰 틀에서 독립운동과 민주화 친일파와 군사독재의 역사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일 무서운 건 일제 강점기 잔재, 독재 정권 잔재가 우리 몸속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순간의 역사> 중 한홍구


드물지만 과거 고문경력이 드러나 추락한 정치인도 있다. 추재엽 양천구청장은 언론에 나온 그를 알아본 고문피해자들이 나타나며 고문 자행 과거가 드러났지만 선거 때 고문 사실을 부인하는 거짓말이 드러나 당선무효형을 받았다. 그는 80년대 보안사 수사관으로 근무했다.
과거 공안사건 학・노련 사건 관련자 25명에게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무기에서 집행유예까지를 선고하고 김대중 전대통령 등 18명이 연루된 명동사건 판사였던 황우여 전 한나라당 대표, 재일동포 모국유학생 간첩조작사건에서 유학생에 징역 10년을 선고하고 김대중에게 내란음모죄와 계엄법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를 내릴 수 있게 한 전남 장성출신 김황식은 이명박 정부시절 총리를 지냈다.
'우리가 남이가' 초원복집 사건. 대선승리를 위해 관권을 동원해 지역감정을 조장한 부산모임 기관장 및 김기춘 전 법무장관과 관련자 모두 무혐의 처리됐다.  당시 사건 담당검사는 김진태, 부장검사는 정홍원이었다.  박근혜 정부에서 다시 살아난 김기춘 비서실장은 김진태는 검찰총장에 정홍원은 국무총리로 발탁함으로써 빚을 갚았다.
삼청교육대 설립에 깊이 관여하고 당시 국보위 내무분과위에서 활약했던 이완구 역시 정치인으로 승승장구 했다. 채동욱 검찰총장을 찍어내며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방해, 과태료와 세금체납 상습범, 검찰수사 부당간섭, 전관예우 변호사법 위반 의혹을 받는 이런 사람이 국무총리가 되었다. 그 사람이 황교안이다.
이러한 정치검찰의 행보는 계속 이어진다. 노무현 전대통령 검찰출두 당시 '노무현 당신은 더 이상 대통령도 사법고시 선배도 아닌 그냥 뇌물수수혐의자로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거요' 라던 우병우는 최순실 관련 질문에 입을 다물고 침묵한다. 검찰에서 조사받는 그의 모습이 공개되었는데 조사를 받는 사람인지 하는 사람인지, 그는 민정비서관에 이어 민정수석으로 승승장구하며 사법부를 장악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박근혜정부는 이들을 불러모아 공포정국 카드로 정권을 유지해야 할 만큼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이 모든 것을 밝히는 도화선은 세월호 사건과 최순실이었다

줄탁동시(줄啄同時) 안과 밖이 합심하여 여건이 성숙될 때 일이 잘 이루어진다



대한민국의 현대사 '줄탁동시'와 엇박자

대한민국은 축구경기에서 발만 대면 골을 넣을 수 있는 찬스처럼 30년 동안 4번의 찬스가 있었다. 해방직후 친일청산 실패, 1987년 6·10항쟁 당시 직선제로 선거패배 1998년 외환위기 후 재벌개혁 실패, 2004년 노무현 탄핵 때 개혁실패 그리고 2017년 촛불집회 박근혜 탄핵과 문재인 정부 출범 그리고 트럼프의 돌발행동이 오히려 대한민국에게 기회가 되고 있다. 해방이후 아니 단군이래 이렇게 한반도에 좋은 여건이 갖추어진 건 아마 처음인 것 같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후 시민들이 6・10항쟁을 일으키지만 대선에서 김대중 김영삼 후보단일화가 무산되며 정권교체에 실패한다. 죽 쒀서 개 준 꼴이다. 94년 핵무기 개발 의혹으로 시작된 북핵위기는 일촉측발의 순간까지 갔다. 한국전쟁 당시 사망자는 적게는 30만명 많게는 100만명으로 추산된다. 94년 미국은 북을 공격할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지미 카터 미국 전 대통령과 김일성의 극적인 만남으로 전쟁을 막았다. 게다가 남북대화 재개로 관계 정상화를 도모하며 남북총리회담 합의서 교환, 정상회담 일정까지 합의해 김영삼과 김일성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앞두고 아쉽게도 김일성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무산됐다. 김영삼 대통령이 이때 북한문제에 전향적인 태도를 취했다면 아마도 대한민국 최초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2000년 6월 김대중대통령은 북한을 방문,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고 6.15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다. 그리고 그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북미도 2000년 10월 올 브라이트 미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고 이어 조명록특사가 워싱턴을 방문해 클린턴을 만나며 클린턴의 방북을 추진하던 과정에서 북미관계에서도 줄탁동시와 엇박자가 이어진다. 클린턴이 재선에 실패하고 부시가 당선되면서 임기내 북한방문이 부시 대통령 당선자측의 비협조와 북한당국의 미온적 자세로 끝내 무산된다. 부시는 ABC(anything but clinton)를 견지하며 클린턴의 정책들을 하나 둘 뒤집고 북미관계 역시 원위치 시키고 만다. 한국정부의 분위기가 긍정적일 때 미국의 조건이 어려워졌고 다시 미국에 오바마정부가 들어서 북미관계 개선을 기대했지만 한국서는 이명박 박근혜정부가 들어서 '줄탁동시'의 기회를 좀체 잡기 힘들었다.
촛불집회로 박근혜가 탄핵되어 파면되고 문재인정부가 정권을 잡았지만 미국에서 트럼프가 예상을 깨고 대선에서 승리하며 전 세계는 '충격'에 빠졌지만 클린턴도 오바마도 성사시키지 못했던 북미정상회담을 트럼프는 성공시켰다. 우리는 이미 1·2차 정상회담을 마쳤고 3차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다. 남북이 화해협력시대를 열고 북미가 평화를 정착시킬 절호가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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