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호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8.10 | 연재 [여행유감]
길고 투박한 문장, 러시아
양승수의 러시아 여행
양승수(2018-10-31 12:31:09)

여행에 이유가 있을까. 이유 없이 가고 이유를 모른 채 떠나고 어떤 이유를 핑계로 나서고 그리고 그곳에서 머물고 부대끼며 여행을 오게 된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 그것이 여행이 아닐까. 여행 가방을 챙기며 여유 공간을 남긴다. 돌아올 때 지금은 알 수 없는 것을 채워오고 싶다. 이것이 이번 여행에 대한 마음가짐이다. 여름휴가 여행지를 러시아 동부로 선택한 것은 최근 방송에서 소개된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여행기 때문도 아니고 러시아 월드컵 때문도 아니다. 35도를 오르내리는 전주보다 8~9도 정도 낮은 기온에 끌리기도 했지만 진짜 이유는 도스토예프스키인지 차이콥스키인지 알 수 없다.



대구에서 하바롭스크(Khabarovsk)로 그리고 횡단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 이동하고 다시 대구로 돌아오는 일정이다. 하바롭스크 공항에 내려선 시간은 새벽 3시를 넘긴 시간. 황량한 주차장에 택시 승강장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덕분에 공항 주변 전체가 승강장이다. 택시가 많지 않다. 운 좋게 택시 하나를 만나 요금 흥정을 하여 숙소로 가는 길. 차장 밖으로 외래식물처럼 들어선 광고입간판이 불길하다. 그러나 숙소에서 잠깐 쉬고 나와서 만난 러시아는 비오는 날 아직 젖지 않은 신발 속처럼 아늑하다. 하바롭스크는 특이하게 도심 전체를 가로지르는 기다란 공원이 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고 둘이나 된다. 도심은 녹지를 녹지는 도심을 볼모로 잡고 대치하는 것도 같고 사이좋게 조화를 이루는 것도 같다. 공기는 맑고 햇볕은 따스하다. 불과 하루 전의 습하고 더운 날씨와 대조적이다.
이번 여행의 목적에 맞게 가능하면 느리게 시내를 걷는다. 평일임에도 도심의 분위기가 걷거나 벤치에 앉은 사람들의 모습이 평일 같지 않다. 꼭 절반은 휴일 풍경에 가깝다. 마음을 먹어야 쉬는 삶이 아니라 평소에도 쉼과 일이 공존하는 삶이라면 좋겠다. 최소한 왔던 길을 되돌아보며 갈 수 있어야 한다. 단기적 업무 생산성으로 보면 효율이 뒤떨어지는 모습인지 몰라도 장기적 관점이나 행복을 기준으로 보면 그 효율은 반대일 것이다. 하바롭스크는 평화롭고 날씨도 자연 경관도 좋다. 일정은 환전 때문에 은행을 여러 곳 찾아다닌 일, 읽는데 애를 먹은 음식점 메뉴판, 열심히 찾아갔으나 사라진 미술관 말고는 특별한 사건 없이 평이한 문장이 길게 이어진다. 아이들이 많다. 아이와 함께 있는 어른들이 많다. 아이들이 걱정이 아니라 기쁨이고, 미래가 걱정이 아니라 희망이라면 우리나라의 출산율도 지금 같지는 않겠지…. 여기 저기 건물을 짓는 소음이 멀리까지 울려 퍼진다. 낡은 목조 건물 몇몇이 산림이 울창한 러시아의 전통을 간신히 붙들고 있다. 커다란 콘크리트 건물들이 생겨나면 그 삽화에 어울리는 서사가 생겨날 것이다. 획일화된 지구적 현상이지만 여전히 낯설다. 하바롭스크에는 아무르강(흑룡강)이 인접해서 흐른다. 강폭이 넓어 언뜻 보면 바다 같기도 하다. 때마침 도착한 시간이 마지막 유람선 출발 직전이다. 너울거리는 강과 낙조를 마냥 바라본다. 한동안 이곳이 어디라는 생각도 없다.


이틀째 돌아다니는 하바롭스크는 여전히 밋밋하고 참 좋다. 마음의 비늘들이 다시 자리를 잡고 마른 코끝의 점막이 촉촉해지는 시간이다. 이제 저녁이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횡단열차를 탄다. 밤사이 덜컹거리는 기차가 재워주고 은은한 여명을 포근하게 덮어준다. 열차를 타고 가는 사이 처음에는 열차를 막 올라탄 분주한 열기가 객차를 채우다가 가방 속에서 꺼낸 먹거리를 나누어 먹는 동안은 풍요로움이 차오른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모두를 자유롭게 하고 무수한 별빛만 남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불쑥 일출과 아침노을이 새벽을 거두어간다. 그런 다음 마지막은 처음과 같은 분주함이다. 
하바롭스크에서와 달리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몇 가지 일정을 정해두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면 마린스키극장도 보고 빼어난 공연단으로 꼽히는 그곳 발레단의 공연을 보려고 했지만 그 기간에는 발레공연 일정은 없고 때마침 <극동아시아페스티벌>이 진행 중이다. 하루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보고 또 하루는 오페라를 보기로 하고 인터넷 예매를 했다. 좌석 구분이 세세한 편으로 등급이 여럿이다. 티켓 가격은 서울 공연장과 비교해 전반적으로 높은 편은 아니지만 등급이 세세하게 나뉘다보니 최고가와 최저가의 가격 편차가 크다. 지위가 높거나 부유한 사람도 공연을 보지만 그 반대의 사람들도 공연을 본다. 볼 수 있게 한다. 하나의 공연을 바라보는 지점은 다르지만 그러면서도 분명 공유되는 부분이 있고 또 좁혀지지 않는 부분도 있으리라. 사소하지만 이렇게 러시아라는 느낌을 받는다.  
'마린스키' 라는 이름은 황제 알렉산드르 2세(Alexander II)의 황후인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Maria Alexandrovna)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고 한다. 마린스키극장의 본원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에 있고 이곳은 분원인 셈이다. 2012년 APEC 회의를 즈음하여 건립되었다고 하며 공연장은 그레이트홀(1,356석)과 체임버홀(305석)이 있다. 지은 지 오래되지 않아 시설은 현대적이다. 공연장 위치는 블라디보스토크 금각교 근처에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도시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혁명광장 근처에서 택시를 타고 15분 정도의 거리. 저녁 공연을 보러가는 시간이 러시아워와 겹쳐 막심 택시도 잘 잡히지 않는다. 어렵사리 공연장에 도착해보니 적잖이 공연시간이 남았음에도 많은 관객들이 이미 도착하여 공연장 로비 안팎에서 담소를 나누고 제 각각 공연관람 채비를 하고 있다. 분주한 도심에서 보았던 러시아인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이들의 모습은 훨씬 여유 있고 품위 있다. 정장과 드레스 차림이 눈에 많이 띤다. 일상의 연장으로 공연을 보는 것도 좋지만 이렇듯 이런 순간을 더 특별하게 즐기는 이들의 모습 역시 나쁘지 않다. 러시아에서 공연장을 찾을 계획이 있다면 미리 복장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공연장 실내로 들어서는 순간 공항에서와 같이 검색대가 설치 운영되고 있다. 번거로운 것도 사실이겠지만 다중 이용 시설의 테러 대비 등의 측면에서 보면 분명 효과가 커 보인다. 막상 검색은 타이트하지 않았지만 어떤 증후가 감지되거나 어떤 사건 발생 이후에 조절이 가능한 부분이다. 테러 대비에는 효과적이겠지만 이 시대가 우리를 불신의 사회로 이끌어준 것에 대해서는 어찌할 수 없는 서글픔이 생긴다. 상념을 뒤로 하고 소지품을 꺼내 검색대 위에 올려놓았다. 검색대를 통과한 후 들고 있던 가방이 커서 물품보관소를 찾았다. 코트 보관 거치대가 꽤 큰 규모로 갖추어져 있다. 한국에서는 낯선 풍경이다. 지금은 여름이지만 한겨울 시베리아의 찬바람을 헤치고 따뜻한 공연장으로 들어선 사람들이 두꺼운 외투를 벗는 장면이 그려진다.


첫날 보는 공연은 극동아시아페스티벌 프로그램의 하나이며 1부는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협연 그리고 2부는 오케스트라와 합창의 레퀴엠 공연이다. 무대 중앙 앞에 피아노가 놓여 있고, 그 바로 뒤에 지휘자석을 배치했다. 흔한 배치는 아니다. 그리고 오케스트라 연주임에도 음향반사판이 없고 고전적 문양의 대형 배경막을 걸어두었다. 이런 무대배치는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협연 그리고 2부 합창공연에서 많은 수의 합창단 인원을 더해야하는 상황에서 무대공간의 제약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 한편에서는 음향반사판이 없이도 건축음향이 훌륭한 극장이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일 수 있다.
손열음의 모차르트는 수줍게 시작하여 유려하게 나아가고 오케스트라는 조심스럽다. 이 오케스트라의 스타일인가 했으나 다음날 오페라에서 만난 오케스트라는 같은 지휘자였음에도 정말 같은 오케스트라인가 싶게 힘 있고 드라마틱한 연주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오페라 연주에서는 악기 편성도 조금 달라져 금관악기와 타악기 소리가 두드러진다. 1부와 2부 공연이 끝나고 박수가 쏟아지고 연주자들의 인사가 이어지고 있을 때 누군가 꽃다발을 들고 나타나 지휘자와 연주자에게 안겨준다. 한국 극장에서는 다소 생소한 장면이다. 어느 것이 맞고 틀리다고 할 수 없다. 그 공동체가 공감하는 허용의 한계선의 문제이거나 문화의 차이다. 다시 한 번 여기가 러시아라는 실감이 난다.   


두 번째 공연장을 찾은 날에는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Queen Of Spades)을 보았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작품을 바탕으로 표트르 차이콥스키가 작곡한 3막 오페라다. 한국에서 공연 소식은 들은 바 없는 작품이다. 생각보다 많은 출연인원에 놀랐고 발레 무용수들이 극중에 나와 주어서 발레를 보지 못한 아쉬움도 달랬다. 3시간이 넘고 4시간에 가까운 오페라. 이 사람들이 공연을 만드는 방식은 우리와 다른 것으로 보인다. 거칠게 말하면 우리는 공연을 관객에 맞춘다. 공연을 하나의 상품으로 보고 관객들이 이 공연을 소비하기 좋은 형태로 기획한다. 관객들의 라이프 스타일, 최근 트렌드 등을 고려하고 작품의 주제가 너무 무거워지는 것도 피한다. 그러니 4시간에 가까운 공연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관객보다 작품 자체를 얼마나 잘 보여줄 것인가에 집중한다. 공연을 그렇게 만들면 관객들은 이 불친절한 기획에 군말 없이 맞추어 그 하루를 움직이고 있다. 거꾸로 보면 이것이 이들 공연이 가진 상품성이다.
공연 중 2번의 인터미션이 있다. 우리와 달리 인터미션 시간이 넉넉하고 극장 안에 먹을 것을 파는 곳이 1층 로비뿐만 아니라 2층 3층 곳곳에 있더라는 것이다. 오페라 막 간에는 거의 로비가 식당의 모습과 견줄만하다. 늘어선 줄에 끼어서 보니 달콤한 케이크가 인기다. 음식을 사이에 두고 있는 러시아인들의 표정과 몸짓을 보니 이들에게 공연 관람이란 다만 무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공연의 일부이며 글로 치면 행간이라고 할까. 공연 내용에 대한 각자의 이해와 관람평을 나누는 시간이며 이를 통해 친교의 깊이를 더하는 시간이다. 우리에게 인터미션은 화장실 가는 시간 정도로 인식되고 실제로도 시간이 짧아 관객 대부분이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국의 관객들이 즐기는 공연이라는 것은 어쩌면 찐 계란의 노른자만 먹는 것이 아닐지. 
오페라 무대는 다리막을 쓰지 않고 제작물을 기술적으로 배치하여 측면에서도 무대 준비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 제작물의 수준도 마감도 수준급이다. 화려한 영상과 조명이 즐비한 한국의 공연물에서 느낄 수 없는 담백하고 깊은 맛. 어쩌면 우리가 뭔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화려한 영상과 조명으로 보다 극적으로 전달되는 무엇이 있고 또 그렇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순간이 있는 것이다. 우리 극장과는 조금 다른 마린스키극장. 어떤 문화가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보다는 자기다운 문화를 가졌거나 그렇지 못하거나가 아닐까. 그렇다면 자기다운 문화란 무엇일까. 어떻게 만들어지고 지속되는 것일까.
훌륭한 자연환경을 가졌지만 노후 경유차가 매연을 뿜으며 달려가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러시아에 도착한 첫날 외래식물처럼 들어선 광고입간판이 불러일으켰던 불길함은 어떤 현실로 드러날까. 다행히 길고 투박한 문장이 아직 끝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미래는 알 수 없다. 러시아의 모습이 먼 남의 나라의 모습만은 아니라는 생각. 이번에 가서 읽게 된 문장이 러시아의 막바지가 아니길 바란다.


돌아와 배낭을 열어보니 조각과 부스러기들을 모아 왔다. 어딘가에 크게 쓸모 있는 것들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은 없다. 어떤 조각은 크고 어떤 조각은 작다. 같은 여행지를 다녀왔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배낭 속에서 쏟아지는 조각들은 나와 같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조각들을 꺼내 매만진다. 같은 사람이라도 시간이 흘러가면 같은 조각을 바라보는 의미도 다를 것이다. 이번에 다녀온 여행은 '어떤 시간'을 다녀왔고 여행의 길동무가 러시아였다는 생각도 든다. 잘 도착했다고 엽서를 쓰고 싶다. 그 때 시베리아횡단열차에서 바라보던 밤하늘 가득한 별들이 누군가가 보내온 엽서였는지 모르겠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