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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 | 연재 [여행유감]
미완성이라는 완성, 미륵사지
장미영의 미륵사지
장미영(2018-11-16 12:51:03)



학창시절 부산으로 여행을 가서 놀란 적이 있다. 조그만 소도시에 살던 내가 거대한 도심의 규모에 위축된 것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낯설게 느껴지던 풍경들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 그 풍경은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빼곡한 산, 그 산꼭대기까지 나무처럼 지어진 아파트 단지이다. 또한 허리 한번 펴지 않고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도로에 겹겹이 등장하는 산맥, 그리고 그 산맥을 반복해서 통과하는 터널들도 그 풍경에 자리한다. 부산의 흔한 풍경이 내게는 왜 그리 낯설고 신기했는지는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 이유는 내가 속한 지역과 부산은 매우 이질적인 풍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당시 익산에 살고 있었고 일가친척은 부안과 김제에 살고 있어서 전북 지역을 벗어날 일이 거의 없었다. 가을에 익산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황금빛으로 물든 논이 파란 하늘을 받치고 있었다. 나에게 익숙해서 당연했던 풍경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대평원 일대였던 것이다.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탁 트인 풍경과 넓은 공간을 좋아하게 됐다.
부산 여행을 다녀와서 바라본 호남지역의 풍경이 그 전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이때부터 하나의 습관이 생겼다. 그 습관은 가을이 깊어지면 한 번씩 호남에 위치한 사찰을 찾는 것이다. 호남의 사찰은 높고 푸른 하늘과 낮고 널따란 사찰의 가람배치가 어우러져 더 웅장하다. 올가을에 내가 방문한 곳은 미륵사지다. 익산 시내와 거리가 다소 떨어진 장소에 위치한 미륵사지를 가는 길은 나에게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 딱 좋은 시간을 주었다. 음악 몇 곡을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니 미륵사지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찾아 간 미륵사지는 내게 좋은 소식을 건네주었다. 서탑의 복원작업이 드디어 마무리된 것이다. 미륵사지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탑 두 개가 있다. 동탑은 1993년 복원되었고 서탑은 1998년부터 복원작업을 시작하여 20여 년 만에 복원 작업이 완료되었다. 아직 외부의 가설물이 철거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 덕분에 3층에 올라서서 석탑을 내려다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탑의 1층 기단부에서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가까이에서 서탑을 바라보았다. 복원이 완료된 후 처음 마주하게 된 석탑의 몸체는 예전 기억보다 훨씬 더 웅장했다. 오랜 기간 동안 시멘트에 쌓여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정갈하면서도 고귀한 기운이 느껴졌다. 또한 석재의 활용도 잘 살펴볼 수 있었다. 기존 판석들을 최대한 활용했다고 하는데 새로운 판석을 붙인 흔적들도 고스란히 감상할 수 있어서 더 만족스러웠다. 우리나라 최대 크기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3층에 올라서서 서탑을 바라보았을 때 그 크기를 비로소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사찰의 규모에 비례하는 탑을 지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탑을 기준으로 하여 미륵사의 규모를 상상해보면 너무 넓어서 감당이 안 될 정도이다.
과거 일본은 서탑이 무너지려 한다는 이유로 시멘트로 탑을 고정시켰다. 일본은 시멘트가 그 당시엔 최고의 재료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문화재를 결코 그런 식으로 복원하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시멘트로 작업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아니었음을 알면서도 실행했음을 의미한다. 일본의 이러한 만행으로 석탑의 판석과 시멘트는 치석 제거 드릴을 이용하여 3년 만에 분리해낼 수 있었다. 가설물 내부에 부착된 안내문을 살펴보면서 이렇듯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100여 명의 전문가와 12만여 명의 노동력이 동원되었다는 안내문은 그동안의 노고와 열의가 이 거대한 유산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3층에 올라 미륵사지의 풍경을 보면서 서탑 복원의 여러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놀라운 변화였다. 문화재 보존 윤리의식이 부족했던 우리나라에서 지자체와 국가가 20여 년이라는 복원기간을 기다려 준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인 것 같다. 불과 몇 년 전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은 성과 내기에 급급한 정치인과 공무원들에 의해 졸속으로 복원된 것을 생각하면, 20년이란 시간이 200년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석탑 복원을 진행하던 전문가들은 시간과 비용 부분에서 끊임없는 압박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들이 지켜낸 인내의 시간과 태도는 우리나라 문화재 복원에 역사적 의미를 가져다줬다. 이번 작업으로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백제의 건축적 데이터를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신소재를 이용한 특허된 복원기술력까지 소유하게 되었다고 하니 이 역사적 복원의 과정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회가 새로웠다.
개인적으로는 9층으로 추정되는 석탑을 6층까지만 복원한 점이 가장 인상 깊었다. 이는 후대에 과제로 남겨두었다가 해결 가능할 때 복원을 맡기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서탑은 동탑과 큰 차이를 보인다. 어떤 이는 동탑이 너무 이질적으로 보여 없애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동탑은 노태우 정부 시절 기단부만 겨우 있던 것을 역사적 고증 없이 복원해서 너무 하얗고 세월의 흔적도 없어 건축적 기품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불국사처럼 서탑과 동탑의 모양이 다를 수도 있고 동탑의 기록이 나올 수도 있다는 상황을 무시하고 서탑의 모양을 모방하여 동탑을 복원했다. 동탑은 남아 있던 부자재도 사용하지 않은 채 2년 만에 만들어졌다. 사람들에게 완성된 모습을 보여준 동탑이 극적효과를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동탑의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는 혼자 현대적이고 영혼 없던 동탑은 20여 년이나 걸려 복원한 서탑과 공존하게 되면서 의미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20년과 2년의 세월, 동탑과 서탑의 복원 과정을 보면서 문화재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서탑을 둘러보고 목탑이 있었던 자리에 섰다. 내가 들어온 길과 반대편에 자리한 용화산이 보였다. 터의 크기를 가늠하며 미륵사의 모습을 상상했다. 미륵사가 저 높은 용화산 위에 자리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산을 등지고 앞을 바라보고 있으니 삼면의 평야가 미륵사의 마당이자 터가 되었다. 드넓은 대지를 품어 시원하고 넓은 공간을 갖게 되니 호남의 사찰들은 굳이 산으로 올라갈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미륵사도 산에 올라가는 대신 넓은 대지를 확보하기 위해 늪을 메워 땅을 닦고 터를 마련했다. 나는 미륵사지의 풍경을 보며, 어떤 곳이든 평지로 터를 닦고 가람배치를 하는 백제인의 평지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둘러본 바로는 보통 산지가 많은 지역은 산 위에 사찰을 지었다. 산세에 가장 조화로운 곳에 대웅전을 세우고 불상을 모셨다. 그래서 불상이 바라보고 있는 쪽을 보았을 때 풍경이 가장 아름다웠다. 하지만 미륵사와 같은 호남평야의 사찰들은 산 중턱보다는 평야에 사찰을 짓는다. 김제의 금산사, 속리산의 법주사, 변산반도의 내소사도 그렇다. 김제의 금산사는 뒷산의 경사지에 사찰을 지을만한 터가 있어도 평지로 내려와 사찰을 지었다. 속리산의 법주사는 마땅한 위치가 없자 산위의 분지를 메워 평지로 만들어 사찰을 조성했다고 한다. 내소사는 산 위의 터가 더 좋지만 산 아래의 기울어진 터를 이용해서라도 사찰을 지었다.
호남평야에 살고 호남의 사찰을 좋아하는 나는 그래서 이 지역에 살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이 점을 꼭 소개해주고 싶었다. '백제는 넓은 평야지대에 살기 때문에 땅의 모양에 따라 기둥을 낮게 하여 평지에 어울리도록 사찰을 짓는 특성을 가진다'라고 정리한 건축가 신영훈의 '백제계 건축'도 소개해 주고 싶다. 때문에 미륵사지에 와서 두 개의 탑밖에 없다고 실망한 이들이 있다면 평야를 닮은 미륵사지를 상상하며 넓은 공간의 활용과 지세를 살펴보라고 말해주곤 한다. 그렇게 미륵사지를 바라볼 때, 비로소 미륵사가 보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방문한 미륵사지는 미완성을 완성한 서탑 6층 복원을 통해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리고 당연히 드넓은 터와 시원하게 펼쳐진 평야가 위로와 같은 편안함도 주었다. 문화재를 보는 다양한 관점이 필요해진 이 시점에서 많은 이들이 미륵사지에서 미륵사를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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