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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 | 인터뷰 [공간과 사람]
고단한 노동이 빚어낸 건강한 글,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버스기사 허혁
윤지용(2018-12-31 11:22:41)

오랫동안 운영했던 가구점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얼핏 들었지만 버스운전기사가 된 줄은 몰랐었다. 전주에서 시내버스를 운전하고 있는 '허혁'이라는 사람이 책을 냈다는 얘기를 듣고 처음에는 동명이인인 줄 알았다. 책날개에 있는 저자소개를 보니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이 맞았다. 약간 의외이기도 했지만, 전혀 뜬금없는 것도 아니었다. 예전에 잠시 알고 지냈던 시절에 '이 사람 글 쓰면 잘 쓰겠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버스 핸들을 잡고 있을 시간일 것 같아서 문자메시지를 보냈더니 바로 전화가 왔다. 마침 비번이었던 모양이다. 간단한 안부 인사를 주고받고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만나자마자 대뜸 잘하고 있던 가구점은 왜 그만뒀냐고 물었다. 그런 질문할 줄 알았다는 듯이 간단하게 대답한다. "그걸 계속하면 죽을 것 같아서" 무슨 뜻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이 갔다. 이윤을 남기기 위한 불가피한 거짓말들과 동종업자들과의 경쟁이 주는 정신적 피로를 오랜 세월 동안 감당해내며 몹시 피폐해졌다는 말일 것이다.
그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얼마 동안 제약회사에 다니다가 가구점을 냈다. 18년 동안 악착같이 일을 했다. 많은 자영업자들이 길거리로 나앉던 IMF 외환위기 시절도 견뎌내고 부모님이 물려주신 빚 3억 원도 가까스로 다 갚았다. 장사가 본성에 맞지 않은 탓에 남몰래 분노조절장애와 우울증을 앓으면서도 독서와 사색의 힘으로 버텨냈다. 언젠가는 이 멍에를 벗고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겠다는 꿈을 붙들고 살았다.
틈틈이 모은 돈으로 시골에 작은 땅도 장만했다. 귀농하겠다는 결심을 밝히자 아내는 펄쩍 뛰었다. 이제 겨우 빚 다 갚고 먹고살만해졌는데, 느닷없이 멀쩡한 가구점을 그만두겠다는 것에 선뜻 찬성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한사코 반대하는 아내를 설득할 수 없었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쳤다는데 하소연을 받아들여주지 않는 아내가 야속하기도 했다. 그래서 가출을 결행했다. 가출 2주 만에 아내와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졌다. 가구점을 접기로 하되 당장 시골로 가지 않고 도시에서 다른 생업을 찾기로 했다.
그런데 20년 가까이 가구점을 하고 이렇다 할 다른 재주가 없는 사십대 후반의 나이에 막상 새로운 일거리를 찾는 것도 막막한 일이었다. 그래서 일단 대형운전면허를 땄다. 면허증이 있다고 당장 시내버스 기사가 될 수는 없었다. 학원통학버스와 기업체 통근버스를 운전하다가 관광버스를 몰았다. 관광버스를 운전하던 시절에 장수군의 어느 시골마을에서 단체로 전주의 결혼식장에 다녀오는 하객들을 태웠던 날, 운전하면서 꺼이꺼이 울었다.
그날의 기억을 책에 이렇게 썼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이를 악물고 울었다. 울음이 터져나와 이를 악물 수도 없어서 입술을 앙다물고 울고 또 울었다. 뜨거운 눈물이 멈출 줄을 몰랐다. 그 뒤로 그날 왜 그렇게 슬피 울었는지 차분히 생각해보았다. 별 것 없었다. 내가 대견해서 그렇게 울었다. 가게 팔고 반년도 안 돼 관광차 몰고 시골 아주머니 아저씨들 원 없이 춤추고 놀게 해준 내 자신이 너무 멋져서 그렇게도 울었다."
그렇게 경력을 쌓아서 마침내 시내버스 기사가 되었다. 그러나 고객을 상대하지 않고 성실하게 운전대만 잡으면 되는 속편한 직업인 줄 알았던 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단했다. 하루걸러 하루씩 열여덟 시간 동안 꼬박 일해야 하는 육체적인 피로도 그렇지만 감정노동이 만만치 않았다. 버스에 오르내리는 수백 명의 승객들이 모두 '고객'이고 '갑'이었다. 빠듯한 배차시간에 쫒기면서도 몸이 불편한 할머니의 느릿느릿한 승하차를 기다려드려야 하고 무례한 승객의 안하무인 '갑질'도 받아내야 한다. 신경도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대형버스로 혼잡한 도심의 장애물들을 비켜가는 일도 버거운데 버스 내부의 상황과 승객들의 심기까지 신경써야 한다. 오로지 청각과 거울 하나에 의존해서 버스 안의 상황을 파악해야 하고 승객들이 일으키는 온갖 소음을 참아내야 한다.
유난히 예민하고 섬세한 감성을 지닌 그에게는 가혹한 업무환경이었을 것이다. 버스 운전을 시작한지 2년 만에 가슴에 병이 들어 심장 스탠트 시술을 해야 했다. 그때부터 SNS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날그날의 느낌을 차곡차곡 정리해보려고 한 일인데, 뜻밖에 읽는 이들의 호응이 뜨거웠다. 본격적으로 책을 써보라는 권유도 많았다. 그래서 마음먹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책을 낸 과정도 그의 이력만큼이나 독특하다. 말 그대로 '맨 땅에 헤딩하기'였다. 한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코너에서 진열된 책들을 펼쳐보며 책을 낸 출판사들의 이메일 주소를 일일이 베껴 적었다. 그렇게 모은 50여 개 출판사의 이메일로 원고를 보냈다. 그랬더니 반나절 만에 한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그 후에 다른 출판사들에서도 제의를 받았지만 처음에 연락해온 출판사와 계약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책은 예상 밖으로 금세 화제작이 되었다. 출간 3개월 만에 판매부수 1만 부를 넘겼고 지금은 거의 2만 부를 바라보고 있다. 지난여름 국립중앙도서관이 선정한 '휴가철에 읽기 좋은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속칭 '대박'이 난 것이다. 책이 잘 팔리니 그는 일약 유명해졌다. 유력 언론사들에서 취재요청이 밀려들고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강연도 했다. 그런데 지역 언론사들의 인터뷰 요청은 극구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다. 지역에서 '얼굴이 팔리면' 행여 승객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버스 운행에 지장이 있을까봐서였다. 버스 운전석에 앉아 있을 때만큼은 책 제목 그대로 '그냥 버스기사'이고 싶은 것이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와 ≪대리사회≫를 쓴 김민섭 작가는 이 책의 추천사에서 "노동하는 한 인간의 고백만큼 특별하고 힘 있는 글은 없다"고 했다. 그렇다. 하루 열여덟시간의 고된 노동 속에서 꾹꾹 눌러쓴 글이라 그런지 문장 하나하나가 질박하고 우직하다. 이 책의 글들에서 그가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버스 안의 일상이나 승객들의 표정이 아니다. 버스와 승객들을 바라보는 자신의 내면이다. 그래서 솔직하다못해 투명하다. 무릎이 불편한 꼬부랑 할머니가 아이고 아이고 신음하면서 힘겹게 버스 계단을 오르는 것을 보며 속으로 '집에 좀 가만 계시지 저 몸으로 어딜 돌아다닌데!' 짜증이 났었다고 고백한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에게 당한 폭력의 기억과 장애를 가진 딸아이의 이야기까지 자신의 아픈 개인사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온종일 운전대를 잡고 팽팽한 긴장감을 견디는 일이 힘겹다고 하면서도 그의 책과 말에서는 버스에 대한 애정이 절절하다. 엄밀히 말하면 버스를 타고 내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아주머니들과 어린 학생들, 이른바 '교통 약자'들에 대한 애정일 것이다. 그는 "대중교통문화가 그 사회의 성숙도를 반영한다."고 말한다. 버스기사도 과로하지 않고 승객들도 안전하고 편안한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것이다. 생명과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버스, '속 터져 죽을 만큼' 느리게 다니는 버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나는 "버스기사라는 직업을 대통령하고도 안 바꾸고 싶다"는 그의 말은 믿을 수 없다. 사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의 눈빛이 가장 빛나고 그의 목소리가 가장 들떴던 순간은 책 이야기나 버스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 아니었다. 임실 어딘가에 사두었다는 여섯 마지기 밭뙈기에 흙집 짓고 살고 싶다고 말할 때였다. 어쩌면 그는 '도시'라는 것 자체를 못 견디는 DNA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지면서 생각했다. 아, 이 사람은 여전히 '탈출'을 꿈꾸는구나. 18년 만에 가구점을 탈출했듯이, 언젠가는 버스 운전석에서도 기어이 탈출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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