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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 | 연재 [마당기행]
천불천탑은 누가 쌓고 만들었을까
제199회 마당기행 / 화순 운주사, 쌍봉사
이정우(2018-12-31 11:25:16)



늦가을 비가 내렸다. 가을비는 어쩜 이리도 사람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는 걸까? 입동이 지난지 2주가 넘었지만 아직 단풍이 발에 밝혀 사근거리기에 굳이 늦가을이라고 우겨 보련다. 끝나가는 계절을 붙잡아 보려는 작은 몸부림이다. 겨울의 직전, 올해 마지막 역사기행은 그렇게 늦가을의 문턱에서 시작됐다.
이번 역사기행의 목적지는 전라남도 화순이었다. 단풍이 붉게 물든 가을산 자락의 산사로 떠났다. 천불천탑의 <운주사>와 철감선사의 <쌍봉사>, 메타세쿼이아의 <담양>을 찾아갔다. 가장 먼저 묵은 먼지를 씻어내는 빗길을 따라 운주사로 떠났다.



민중들의 삶과 염원 속 <운주사>
답사의 최고봉은 우중답사라 한다. 비를 맞으면 온 자연색이 다시 숨을 쉬고, 구름에 가려진 고른 햇볕이 날것의 형태를 보다 도드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구름과 안개가 차분히 가라앉은 비 오는 운주사는 확실히 지금까지 보아왔던 사찰과 무척 달랐다. 사전조사를 통해 운주사가 어떤 곳인지 알고는 있었지만,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보는 감흥에 비할 수는 없었다.
여느 사찰의 불상과 달리 운주사의 불상들에선 부처의 위용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신체 비율은 엉성하고 심지어 눈, 코, 입은 우습기도 하다. 격이 없는 모습이 친근하기까지 하다. 운주사 불상들은 다른 절의 불상들과 달리 서 있거나 앉아 있는 불상들이 적었다. 대부분이 큰 자연석에 기대어 비를 피하고 있었다. 제대로 지어진 불전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모습은 근엄한 부처의 모습보다 삶의 고난에 허덕이던 당시 민중과 더욱 닮아있다.
문득 부처들이 보는 방향을 따라 쳐다보았다. 앞으로 걸을 땐 몰랐던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불상들처럼 아무렇게나 놓인 것 같던 석탑들이 거리와 각도를 맞춰 나란히 서 있다. 자꾸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탑을 겹치게 바라보면 오롯이 가까운 탑만 보이지만, 몇 걸음만 옆으로 움직이면 탑들이 나란히 줄을 맞춰 군더더기 없는 비례미와 균형미를 보여준다.
각양각색의 탑과 불상들처럼 운주사 건립 설화도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가장 많이 알려진 설화는 신라 말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 국사에 얽힌 내용이다. 도선이 중국 유학 후 민생을 안정시키려 하는데, 우리나라 지형을 보니 배와 같았다. 그런데 뱃머리에 해당하는 호남이 영남보다 산이 적어, 산맥이 있는 동쪽은 무겁고 서쪽은 가벼워 우리나라 운세가 일본으로 몽땅 흘러가 버릴까 염려가 됐다. 그래서 도선이 운주계곡 일대에 탑과 불상을 세워 무게중심을 잡았다는 설화다. 또 다른 설화는 도선이 하룻밤 사이에 인근에 있는 바위를 다 몰고 와 천불천탑을 세우면 혁명이 성공하는데, 한 동자승이 '날이 샜다'고 거짓을 외치는 바람에 마지막 와불을 세우지 못하고 새 나라 건설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설화다. 그 외에도 천불천탑을 만든 이에 대한 주장은 여럿 있지만, 정설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즉, 누가 왜 운주사를 창건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문헌에는 운주사가 어떻게 기록돼 있을까. 조선 중종 25년(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천불산은 능성현 서쪽으로 25리 떨어져 있는데 그곳에 운주사가 있다. 절의 좌우 산기슭에는 석불과 석탑이 각각 1,000개씩 있다"고 적혀 있다. 또 조선 인조 10년(1632년) 능주목지에 "운주사 금폐-운주사는 지금 폐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석불 70기와 석탑 12기가 남아있지만, 본래는 탑과 불상이 각각 1,000개씩 있었다고 전해진다. 정유재란 이후 폐사되면서 관리가 소홀해졌고, 탑과 불상이 묘지 상석이나 주춧돌 등으로 사용되면서 사라지거나 크게 훼손돼 왔다.
과거 운주사에는 일주문이 없었다. 천왕문도, 사천왕상도 없었다. 격식을 차리거나 세속과 구분 짓는 어떤 상징물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일주문이 생겼다. 그리고 운주사 안내 지도를 보면 지금은 있지도 않은 천왕문을 그려 놓고 신규 탐방로도 그려 놓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사찰과 똑같은, 특징 없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과연 예전 운주사의 '절 같지 않은 절'의 모습을 잃어가는 게 좋은 것일까.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이야기가 많지만 한 가지 사실은 확실했다. 늘 고난과 역경에 맞서고 떠돌 수밖에 없었던 민중들의 모습과 그들의 바람이 운주사에는 담겨 있다는 것.
계속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풍경은 서서히 안개와 빗속의 고요함 속에서 멀어져 갔다.


섬세함과 정교함의 예술혼 <쌍봉사 철감선사부도탑>
신기하게 운주사를 벗어나니 비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이내 그치고 햇볕이 내리쬐었다. 촉촉이 젖은 땅만이 비가 내렸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쌍봉사는 국도를 가다보면 갑자기 마주친다. 숲길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보통 절들과 다르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일주문과 일주문 바로 너머 보이는 절의 모습은 평지에 있는 절집의 풍경을 한층 더 고조시켰다.
오랜만에 보는 천왕문이 반가웠다. 무서운 얼굴을 한 사천왕도 그날따라 인자해 보였다. 천왕문을 지나면 바로 눈앞에 거대한 3층 목탑이 웅장하게 서 있다. 목탑 2층에는 신기하게도 대웅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원래 대웅전이 화마로 인해 소실될 때 현판만 무사했는데, 이후 목탑에 그 현판을 걸어 대웅전이 된 것이다. 이 목탑은 우리나라에서 3층 목탑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었다. 하지만 이 목탑도 화마를 피하진 못했다. 지난 1984년, 아랫마을 할머니가 촛불을 켜 놓은 것이 잘못되어 소진됐었다. 이후 복원 공사에 착공해 지금 모습으로 남아 있다. 사진으로나마 볼 수 있는 옛 목탑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크다.
철감선사부도탑을 만나러 가는 길. 메말랐던 개울물이 흐르고 푸른 댓잎들이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국보 제57호로 지정된 철감선사부도탑. 조형미가 뛰어나고 장중한 모습이 당시 최고의 석공예술을 보여준다. 기단석에는 용과 함께 구름이 꿈틀거리며 당장에라도 피어오를 것 같다. 그 위에서 반은 인간이고, 반은 새인 가릉빈가가 날갯짓을 한다. 몸돌에는 문비라는 자물통을 정교하게 만들었고, 사천왕과 비천상이 그곳을 호위하고 있다. 최고의 정교함은 바로 옥개석이다. 기와를 타고 내려오면서 만나는 막새. 작은 동전만한 이 막새 안에는 여덟 잎의 연꽃이 새겨져 있다. 정교함과 섬세함으로 펼쳐진 탑의 모습에서 빛이 났다. 120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해질 만큼 조각미가 정말 대단했다.
부도탑의 옆엔 철감선사비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보물로 지정된 철감선사비는 애석하게도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비를 지녀야 할 귀부엔 거북이 등 모양, 용의 얼굴을 하고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는 동물이 있다. 오른 발을 치켜들고 왼발은 땅을 꾸욱 누르고 있어 당장이라도 걸어 나갈 것만 같다.
내려오는 길엔 큰 규모의 법당이 신축되고 있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어쩔 수 없는 변화라고는 하지만 혹여나 옛것 속에 요즘 것이 섞여 쌍봉사 특유의 균형미와 편안함, 소박함이 깨어질까 우려가 됐다.


돌아오는 길, 긴 기행을 마무리하듯 담양에 들렀다. 올해의 가을을 산사에 남겨 두고 오는 길이라 부쩍 추워졌다. 이제 겨울이 온 것이다. 메타세콰이아라고 알고 있던 메타세쿼이아 나무들도 겨울 준비에 한창이었다. 낙엽을 다 털어낸 가지는 이제 하얀 눈으로 장식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 CF에 등장하며 계절마다의 매력을 뽐냈던 이곳에선 누구나 배우가 된다. 다소 앙상해 보일지 모르는 이 풍경에서도 나름대로 낭만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메타세쿼이아길에서 떨어진 마지막 낙엽을 밟으며 천천히 걸어 본다. 추억을 쌓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나 역시 오늘을 되짚어 본다. 구름과 비와 햇볕이, 가을과 겨울이 함께한 오늘은 다시 추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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