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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 | 연재 [임안자의 쿠바여행 ②]
쿠바가 지금, 우리 곁으로 오고 있다
임안자(2019-01-15 12:33:04)

스위스에 살면서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임안자 씨가 2년 전 쿠바를 다녀왔다.
쿠바를 동경하는 독자들에게 좋은 길라잡이가 될 이 여행기는 지난 호에 이어지는 글이다.



텔레비전 뉴스
쿠바의 텔레비전 채널은 다섯 개였다. 그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프로그램은 "텔레노벨라"로 불리는 사랑 타령의 연속극인데 주인집 거실에 놓여있는 LG제품의 텔레비전에선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로 베네수엘라의 텔레수르(Telesur)프로그램을 보여줬다. 그러나 공식 프로그램 말고도 미국 특히 쿠바의 이민자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마이아미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몰래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는 듯했고 심지어 시민 여러 곳의 아파트 단지에서는 거주자들이 공동으로 지하상점에서 파는 장비를 허락 없이 설치하여 위성방송을 본다는 말도 들었다.


베네수엘라의 위성방송 프로그램은 쿠바와 남아메리카의 뉴스 다음에 세계 뉴스의 순서로 진행됐다. 그리고 쿠바인들이 좋아하는 베이스볼과 유럽의 축구시합 또는 서구 젊은이들의 음악밴드들도 심심치 않게 화면에 떠올랐는데 그 중에는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주인집 아들의 말에 의하면 한국 연예인들의 프로그램도 들어있단다. 그런데 놀랍게도 의례 사회주의 국가에서 있을 법한 (쿠바)정부의 선전용 프로그램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자본주의 국가에서 텔레비전만 열면 빠짐없이 나타나는 상업성 광고의 홍수도 전혀 볼 수 없었다. 프로그램 중에는 2016년 2월 11일 러시아 정교회의 모스코바 키릴 대주교의 쿠바 방문에 대한 뉴스도 들어있었다. 쿠바 정부로부터 초청된 키릴 대주교는 1998년 이후 4번째로 쿠바를 방문한다고 했는데 아바나의 정교회 안에서 열린 환영식엔 쿠바 대통령 라울 카스트로를 비롯한 정부의 대표들이 현장에 참석하는 장면이 여러 번 화면에 떠올랐다. 그리고 키릴과 프란시스코 주교들이 하바나 근처에서 가졌던 짧은 모임도 주요 사건으로 다뤄졌다. 1천년 동안 동서로 갈라졌던 기독교의 대표들이 다른 곳도 아닌 사회주의 나라 쿠바에서 만나 서로 껴안는 장면은 역사적인 화해의 행위로서 의미 깊은 사건이었다. 종교면에서 쿠바인들은 전통적으로 가톨릭 종교에 속하지만 마리아와 아들은 산테리아 종교를 택했다. 산테리아는 원래 나이지리아 지역의 요루바 민족의 종교이었으나 이들이 쿠바 정복에 성공한 스페인계 식민주의자들의 노예로 팔려 쿠바에 정착하면서 아프리칸-쿠바인들의 종교로 다시 살아나 가톨릭 종교와 합쳐졌다. 보통 오차, 오차 레글라, 이파 레글라로 불리는 이 종교는 아프리카 후손들이 다수를 이루지만 마리아의 가족처럼 스페인 혈통의 백인들도 들어있다. 시내를 거닐다보면 가끔 머리에서 신발까지 하얀색의 몸차림을 한 남녀를 만나게 되는데 이들은 산테리아 종교의 지도자들이다. 인구통계에 따르면 현재 쿠바에는 스페인 후손인 백인이 63.4%, 아프리카 후손이 16.4% 그리고 백인과 흑인 사이에 낳은 자손들이 20.4%를 살고 있다.


정보기술의 현장
쿠바에서 인터넷 사용은 결코 쉽지 않다. 민박은 말할 것도 없고 큰 호텔들도 인터넷 연결이 되는 곳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쿠바의 큰 도시에는 국영 커뮤니케이션센터가 있지만 인구 120만인 아바나의 현재 수준으로는 급증하는 수요에 비해 공급은 어림없이 모자랐다. 그런데다가 인터넷 사용에 필요한 카드는 따로 지정된 상점에서만 팔고 있어 인터넷을 한번 쓰려면 두어 시간이 걸릴 때도 있었고 시간당 2쿡인 카드 값도 사실 너무 비쌌다. 그리고 핸드폰의 경우 아이폰은 카드로 와이파이와 연결이 되지만 나의 삼성 Galaxy S3은 아예 연결되지 않아 쓸 수가 없었다. 여행객은 그렇다 치고 쿠바시민들의 사정은 더 나빴다. 주인집의 대비드는 독일에서 형이 선물한 핸드폰을 가지고도 카드 값이 너무 비싸서 전화를 자주 할 수가 없다며 친구들도 그 때문에 불만이 많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2쿡은 쿠바인들에겐 8쿺에 달하는데 일반서민 들에겐 실로 엉뚱한 가격이다. 쿠바의 정보기술 후진성은 외신 기자들을 통해 이미 널리 알려졌지만 쿠바 정부가 문제점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오바마의 쿠바 방문에 맞춰 "앞으로 빠른 인터넷 공급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쉽게 풀릴 것 같지는 않았다.


쿠바의 자랑거리
쿠바의 높은 교육 수준과 최첨단의 의학기술은 이미 세계에 다 알려진 사실이다. 이 두 분야는 자타가 인정하는 쿠바의 자랑거리다. 하나는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모든 교육이 공짜라는 점인데 주인집 대비드만 봐도 그랬다. 그리고 또 하나는 쿠바의 이름난 의료제도다. 실제로 쿠바인들은 진찰을 받거나 병원에 입원할 때 돈을 한 푼도 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주인집 마리아의 언니는 우리가 머무는 동안 취장암으로 수술을 받고 병원에서 화학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모두 무료였다. 다만 약값의 일부는 환자가 내야 한다. 쿠바인들의 평균나이는 78.8살이며 어린이 사망률이 미국보다 낮다는 외신의 통계가 있고 보면 쿠바인들이 누리는 장수는 쿠바 특유의 의료제도와 무관하지 않는 듯했다. 그 밖에도 쿠바정부는 제3세계에 대한 연대 차원에서 오래 전부터 전쟁 지진 태풍 등으로 피해가 심한 아프리카 지역에 의사들을 파견하여 무료로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다. 하지만 허점도 있다. 예를 들어 쿠바에서 의사의 평균 월급은 25-40쿡 정도인데 20쿡을 받는 일반 노동자의 월급에 비해 별로 차이가 없다. 그건 의사뿐만 아니라 대학교수나 과학연구원 또는 수준 높은 기술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며 그 때문에 전문인들이 이중 직업을 갖거나 직업을 바꾸기도 하며 아예 이민을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전거 택시와 올드타이머 자동차
하바나의 택시는 가지각색이다. 자전거택시, 모토택시, 올드타이머 택시 그리고 정부소속의 노란색 택시 등이며 어디든 이들은 손만 들면 그냥 달려왔다. 시가를 천천히 보기 위해 우리는 주로 걸어 다녔지만 한두 번은 자전거택시를 탔는데 거리를 메우는 버스와 자동차 사이를 이리저리 잘도 빠져나가는 운전사들의 재빠른 몸짓은 서커스의 곡예사처럼 아슬아슬했고 반시간의 택시 값은 5쿡 정도 밖에 안됐다. 자전거 택시는 원래 쿠바 시민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값이 싸고 이국적이어서 여행객들도 더러 사용하지만 올드타이머 만큼 인기가 높지는 않았다. 아바나의 중심지에 있는 쿠바정부의 중앙의회 건물 근처에는 온갖 빛깔의 수많은 올드타이머들이 하나의 전시장처럼 늘어져 있고 그 주위를 맴도는 올드타이머 외국인 팬들도 많이 보였다. 올드타이머는 50년대 말 쿠바혁명으로 미국이 후퇴하면서 버리고 간 것들로 본디의 모양은 쉐볼레, 부잌, 캐딜락 등이었다. 그러나 오늘 쿠바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올드타이머는 대부분 겉모양만 그럴싸하고 대부분 뜯어고쳤거나 새로 만들어졌고 모토는 거의 일본과 멕시코에서 들여온 것들을 쓰고 있다. 아바나에서 일주일을 보낸 뒤 우리는 쿠바의 남쪽에 있는 이름난 담배공장 지역 피나르 델 리오를 가기위해 차를 하나 빌렸다. 올드타이머를 비롯하여 현대, 기아, 도요타, 폭스바겐, 볼보 등 여러 종류의 임대차가 있었으나 우리는 그 중에서 값이 제일 싼 중국차를 타고 남쪽을 향해 아바나를 벗어났다. 남쪽 방향의 고속도로는 낡아서 울퉁불퉁했지만 이른 봄을 맞고 있는 시외의 들판은 파란 초목과 나무들이 꽉 찼고 이름 모를 큼직한 새들이 하늘을 나르고 있어 열대성 지역의 독특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한때 세계의 설탕수요를 좌우지하던 설탕수수밭 농장들은 수출이 위기에 들면서부터 황무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쿠바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쿠바는 기후가 좋아 버려진 농장에 다른 농산물을 얼마든지 재배할 수 있는데도 경제난과 정부의 실책으로 무성한 풀밭이 돼버렸고 그 결과 쿠바에서 소요되는 채소의 40%를 수입으로 충당하고 있다." 그건 그렇고, 2선의 넓지 않은 고속도로는 어쩌다 한두 대 개인차와 여행버스가 지나갈 뿐 대체로 한가했다. 그리고 군데군데에 시외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간이식당이나 음료수 판매소가 보였는데 이상하게도 승객을 위한 쉼터나 버스의 도착지와 운행시간에 대한 푯말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길가에 서있던 사람들이 손을 들어 태워달라는 신호를 보내곤 했는데 우리가 태워준 사람은 해군, 간호사, 애기와 엄마, 젊은 시골남자였는데 주말에 부모를 방문하는 젊은 해군과는 영어가 통하여 오랜만에 쿠바에 대한 소식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네 시간쯤 지나서 우리는 산속에 있는 조그만 도시 비냘레스의 민박숙소에서 이틀을 지냈다. 조그만 시골까지 여행객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국영호텔 민박 가릴 것 없이 빈자리가 없어서 하마터면 가지 못했던 걸 아바나 주인집 칼로스가 친구한테 연락하여 가까스로 찾은 민박이었다. 60대의 주인집 부부는 꽤 넓은 집에서 할머니와 딸의 가족을 데리고 한 집에서 같이 살고 있었다. 아바나의 주인집에 비해 경제적으로 훨씬 여유로워 보였고 큼직한 현대식 부엌에는 최근 쿠바에서 잘 팔리는 중국산 전기밥솥과 플라스틱 그릇들 그리고 큼직한 최신의 냉장고는 삼성제품이었다. 비냘레스는 쿠바에서는 드문 산악지대로 아름다운 경치 때문에 여행객이 많이 들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담배공장이었기 때문에 다음날 피나르 델 리오의 유명한 프란시스코 도메티엔 담배공장을 찾아갔다. 아침 일찍이 갔는데도 관광버스로 온 여행객들이 이미 길게 줄서있었고 큼직한 시가를 입에 물은 경비원이 안내를 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자그마한 공장안에는 세 명씩 열여섯 명의 남녀들이 줄지어 앉아 담배를 하나하나 손으로 만들었는데 5개 담뱃잎이 겹겹이 싸여지고 다듬어지는 과정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곳 작업실에서 만들어지는 커다란 시가(렵권련)는 대부분 미국이나 유럽으로 수출된다고 했는데 그 밖의 쿠바 여러 곳에서 생산되는 시가는 모두 22종류이며 시가 하나의 값은 보통 3-5달러에서 50유로였으나 그 중에는 100달러짜리도 있었다. 남편과 나는 사실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돌아가신 시아버지와 몇몇 친구들이 쿠바시가의 애호가들이었기에 그저 호기심으로 찾아간 것이다. 시가 하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웰슨 오웰, 시그문드 프로이드, 어네스트 헤밍웨이, 윈스턴 처칠, 베톨 브레흐트, 피델 카스트로, 체게바라 등인데 이들이 즐겨 피운 비싼 시가는 그들의 명성만큼이나 숱한 이야깃거리를 남기기도 했다.

 

예술의 도시 하바나
16세기에 설립된 아바나는 18세기에 이르러 스페인의 가장 중요한 항구가 될 정도로 성장을 하면서 한때는 카리브 지역의 스위스로 불릴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도시의 중심에 들어서있는 여러 형식의 전통적인 건물들은 대개 18-20세기 초에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의 유명한 건축가들이 지은 것들로 1982년에 유네스코에서 아바나 중심지의 건물을 '세계 유산'으로 지정할 정도로 건축미가 뛰어났다. 하지만 오랜 경제난과 카리브 바다의 소금기 짙은 기후로 말미암아 이루 셀 수 없는 건축물들이 계속 짜부라지고 허물어져가고 있어 여행객마저 보기에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좁은 골목을 거닐다보면 지붕이 없는 집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가 하면 대문만 달린 허물어진 집의 마당 안에서 그림을 그리고 사진전이 열리고 있어 마치 어느 공상과학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건축물들의 파손에 대한 대책으로 아바나 시는 1980년에 '35년 프로젝트'를 출발시키고는 쿠바와 외국의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며 몇 백만 달러에 이르는 복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주로 전통구역의 건물들이 수리 대상이며 우리 숙소 옆의 비에야 광장도 지난해 새로 고쳐진 것으로 드디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고 그 옆의 정부청사 건물도 유네스코와 유럽의 지원으로 복구됐다. 현재 수리 중에 있는 주요건물들 가운데는 정부의 중앙의회 건물과 그 앞에서 말레콘 바다까지 이어지는 푸라도의 넒은 길도 들어있는데 한참 진행 중인 공사로 시끄럽고 혼잡스럽지만 작업이 끝나는 2년 뒤의 화려한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바나는 음악뿐 아니라 모든 예술의 도시였다. 50개의 박물관이 있어서가 아니다. 사실 시간이 많지 않아 국립예술박물관과 서너 개 박물관 그리고 갤러리만 들렸지만 대체로 우리가 상상했던 경직된 사회주의 국가의 예술과는 너무나 달랐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예상했던 우리는 개성이 넘치는 뛰어난 예술품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혁명정부의 정치에 찬양은커녕 꼬집고 비평적인 그림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냉전이데올로기에 세뇌가 돼있던 우리들에게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밖에도 프란시스코 광장 옆의 큰 갤러리에서 본 쿠바의 거장 넬슨 도밍게스의 그림과 시내 중심지에 자리한 '아바나의 탈러그래픽실험실'의 '인간 피노키오' 전시전은 개성이 넘치는 쿠바 예술인들의 세계였다. 아바나의 시내 거리에서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되는 동상들은 여느 영웅적 인물보다는 철학자나 시인 또는 예술가의 모습에 가까운 작품들이어서 친밀감을 느꼈다. 그 중에서도 마레콘 바다를 마주하고 서있는 대형의 철제 조각품 '봄'은 바다를 바라보며 봄을 기다리는 여성의 아련한 표정은 가히 모나리자와 비교할 만큼 신비스러웠다. 그러나 당연이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믿었던 카스트로와 체게바라를 위한 동상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 대신 호세 마티와 칼로스 마뉴엘 체스페데스의 동상들이 여러 곳에 세워졌는데 이들은 19세기 쿠바의 독립을 위해 스페인의 식민주의에 항거하고 아프리카인들을 노예제도로부터 행방시킨 쿠바역사의 영웅들이다. 쿠바에서 노예 제도는 1886년에 금지됐고 해방된 아프리카인들 대부분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쿠바에 정착했으며 쿠바 혁명에 전적으로 참여함으로서 쿠바의 시민이 되었다. 나는 아바나에 머무는 동안 2004년 전주영화제의 회고전을 적극 도와준 쿠바영화예술산업원의 해외담당자 마리아 파드로네를 12년 만에 다시 만났다. 말로만 듣던 쿠바영화예술산업원에서 만난 마리아는 나를 얼싸안고는 "다시 볼 줄 몰랐는데 반갑다"며 기뻐하면서 자신의 후계자가 될 30대의 여인 칼라를 소개했다. 자연히 우리 셋의 대화는 한국과 쿠바의 영화에 집중됐었는데 내가 한국영화의 미래에 자신감을 보였던 반면에 마리아는 "옛날과 같지 않다"며 쿠바영화가 위기를 맞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한때 전 남미영화를 대표하던 쿠바영화는 최근에 와서 재정부족과 경영난으로 한해에 고작 5-6편 영화를 만들 정도로 생산력이 떨어졌고 그것도 반절은 유럽과의 합작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전주영화제서 '스위트 아바나'로 대상을 받은 페르난도 페레즈 감독은 국제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쿠바의 대표감독인데도 그의 최근 영화는 거의 유럽과의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그나마 3년 전에 쿠바를 휩쓴 젊은 세대의 영화 '콘두타'는 예외였다. 쿠바의 영화도 다른 예술품들처럼 정부에 껄끄러운 소리를 서슴지 않는데 예를 들어 페르난도 페레즈 작품들도 그에 속하며 2015년 작 '말의 벽(Wall of Words)'의 한 장면을 인용하자면, 다 허물어진 건물의 돌담위에 누군가가 "모두 바꿔라"(Cambiare el todo)고 낙서한 자리에 카메라가 오래 머무는 장면인데 나에게는 변화를 바라는 감독의 호소로 비쳤다. 아무튼 쿠바의 예술인들은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운 처지에 처해있음에도 풍부한 상상과 창작력을 잃지 않고 계속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왔는데 실로 앞날이 걱정스러웠다.


쿠바에도 한류가?
쿠바는 비수교국이었지만 언젠가부터 알게 모르게 한국과 상업적 교류를 해왔다. 오늘 쿠바에서 삼성과 LG의 텔레비전, 핸디, 가전자품과 현대와 기아의 자동차들을 보는 건 전혀 새롭지 않다. 그에다 요즘 한국의 젊은 남성공연단들이 쿠바의 텔레비전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데 우리가 트리니다드에서 머물던 민박숙소의 가족도 이들의 대단한 팬들이었다. 주인집의 쌍둥이 딸들 파올라와 알리스는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하자 아주 반가워하면서 서툰 영어로 "한국 남자들 너무 예뻐요"라며 감탄을 쏟으면서 CD 하나를 보여줬다. 사춘기의 두 소녀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들이 책상 위에 꽂아놓은 CD의 주인공 사진도 나에게 보여줬다. 그러자 옆에 서있던 유전자계통의 전문의사인 쌍둥이의 엄마도 "한국의 젊은이들이 진짜 귀엽다"며 딸들 편을 들어줬다. 그런가 하면 쿠바영화예술산업원을 방문했을 때 마리아의 후계자 클라라 역시 "남성공연은 자기도 빼놓지 않는 프로그램이"라면서 "쿠바남자들이 워낙 마초들이라 예쁘고 여성처럼 부드러운 한국남성에 빠질 만도 하다"는 그럴듯한 해설까지 덧붙였다. 그 밖에도 이삼년 전부터 한국영화들이 아바나에서 서너 번 상영됐다는 소식을 나는 클라라를 통해 듣고 놀랐다. 클라라는 한국영화의 주간은 쿠바영화제와 쿠바영화아카이브의 주최로 이뤄졌으며 2년 전 임권택 감독님과 부산영화제의 김동호 위원장님이 쿠바영화제에 초청됐다고 했는데 "매번 반응이 아주 좋았기 때문에 앞으로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변화는 영화계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에서도 일고 있었다. 2016년 5월 서울에서 열린 식품전시회를 계기로 쿠바상공회의소 소장 올란도 에르난데즈 궐란의 대표단이 한국을 방문하여 대한상공회소와 경제교류 양해각서를 체결했고 한 달 뒤 한국의 윤병세 외교장관이 카리브국가연합 정상회의에 참가하는 등, 내가 쿠바영화 회고전을 준비할 때만도 쉽게 다다를 수 없다고 느꼈던 쿠바가 어느새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걸 쿠바의 여러 곳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PS: 쿠바는 2014년 말 미국과 수교했다. 앞에서 말했듯 이 쿠바의 수교 조건은 반세기 동안 미국이 실시해온 엠바고의 해체와 그로인한 경제적 손실에 대한 배상 그리고 미국이 백여 년 전에 무력으로 빼앗은 뒤 오늘까지 불법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관타나모의 환원 등이었다. 쿠바의 요구는 그러나 2016년 오바마 대통령의 관타나모의 방문을 빼놓고는 지금까지 침묵 속에 빠져있고 트럼프 정부가 들면서 처음엔 외교적 관계가 풀리는 듯 했으나 그것도 잠깐 지금은 오히려 악화된 상태에 놓여있다. 하나 변화가 있다면 미국시민의 쿠바여행이 좀 더 자유로워진 점인데 그것도 단체여행 때만 가능하며 개인여행은 아직도 허락되지 않아서 애초에 기대했던 미국인들의 여행 붐이 일지 않음으로 최근에 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유럽인들의 쿠바방문과 커다란 대조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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