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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 | 인터뷰 [인터뷰]
권리와 편견, 문화와 예술에서 답을 찾다
장애인인권연대 최창현 대표
이동혁(2019-01-15 12:35:41)



살아만 있다고 산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다른 사람과 소통하며 일을 하고,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고, 스스로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아야 한다.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기본 조건이지만, 장애인들에게는 여전히 높고 어려운 벽이다. 수많은 동정과 편견의 시선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고, 정책, 구조, 시설 등 사회 대부분은 비장애인들에게 눈높이가 맞춰져 있다. 장애인들에겐 차별과 배제가 일상이다. 비장애인들의 공간에 끼어들 수가 없다. 분리된 공간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거리는 더욱 멀어지고, 서로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진정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은 과연 언제쯤 찾아올까? 그날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는 이가 있다. 장애인인권연대 최창현 대표다. 2013년 장애인인권연대를 설립해 차별 해소 노력을 펼치고 있는 그에게서 장애인 인권 문제의 현주소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들었다.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장애인 권리
"지방 자치 시대라고 하지만, 지방 정부만으로는 장애인 정책을 독자적으로 실행할 수 없는 구조예요. 뜻있는 단체장들은 많지만, 법률 제약이 심하고, 결정적으로 지방에는 예산이 없죠."


최 대표는 장애인 복지 예산이 지금과 같이 열악해진 데에는 이전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말한다. 본래 지방 정부에는 '자체'적으로 예산을 할당해 지원할 수 있는 '활동 지원 추가 예산'이란 게 있다. 하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 이 추가 예산의 쓰임새에 '제약'이 걸렸다. 선심성 복지라는 게 그 명목이었다. 지방 정부의 '자율'에 맡겨진 부분인데도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는 이 역설적인 상황은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사실상 중앙 정부가 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지원을 가까이서 직접 챙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막힌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도내 장애인 등록자 수는 13만 1,700여 명으로, 전체 인구의 7.1%에 달하지만, 장애인 의무 고용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취업 여건과 임금이 매우 열악한 상황이다. 장애인 고용장려금 역시 2004년 30~60만 원으로 확정된 이후 14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오르지 않았다. 허울뿐인 복지 정책 속에서 장애인들은 여전히 우리의 이웃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어려운 삶을 이어 가고 있다.


"시설 인권 침해 문제도 심각해요. 2016년에는 '남원 평화의 집 사건'이 있었죠. '대구 희망원 사건'도 있었고요. 도내에 있는 장애인 시설이 73개 정도인데, 약 1,700명 정도가 거주해요. 그들 대부분이 반강제적으로 시설에 거주하고 있죠. 한국에서 이렇게 사는 곳을 강제하는 부류는 세 부류예요. 군인과 범죄자, 그리고 장애인이죠.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장애인을 범죄자와 똑같이 취급한다는 겁니다."


최 대표는 그런 시설 거주 장애인들을 지역 사회로 끌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공감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같이 살며 서로의 다름을 피부로 체감해야 한다는 것. '탈 시설 자립 운동'은 2000년대 장애인 운동의 중요한 축 중 하나다.


"장애인 문제를 복지 문제로만 바라보는 것도 문제예요. 물론 복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게 바로 인권 문제예요. 지적 장애를 가진 할머니가 십수 년간 일하고도 임금을 받지 못한 채 쫓겨난 '김제 식당 할머니 사건'이 있었죠.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 인권이 얼마나 열악한지 돌아볼 필요가 있어요."


문화와 예술에서 답을 찾다
장애인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은 행정에서도 드러난다. 최 대표가 운영하는 장애인인권연대는 엄연한 인권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인권 문제를 다루는 자치 행정과가 아니라 장애인 복지과로 안내받기 일쑤다. 그 차이는 무척 크다고 최 대표는 말한다.


"우리가 개선하고 싶은 건 인권이에요. 그러러면 자치 행정과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데, 늘 장애인 복지과로 안내를 받아요. 인권을 가진 대등한 존재가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으로만 바라본다는 거죠. 거기다 장애인 복지과는 복지 전문이지, 인권 쪽은 잘 몰라요. 이러니 상황이 나아질 리가 없죠."


장애인 관광 정책도 마찬가지다. 문화 관광과에서 처리할 일을 장애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장애인 복지과에 부과하고 있는 상황. 업무의 가중은 물론 복지와 관광의 괴리 탓에 전문성 역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장애인인권연대에서는 3년 전부터 도내 문화 관광 시설들을 대상으로 접근성 조사를 진행하고 있지만, 위와 같은 비합리적인 행정 구조 탓에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 개선은 여전히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다.


"예를 들어 5,000만 원 예산의 비장애인 관광 해설사 양성 과정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예산을 조금만 늘리면 장애인들도 충분히 참여시킬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 행정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별도의 장애인 양성 과정을 만들어 버리죠. 예산은 예산대로 낭비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분리가 더욱 심화되는 겁니다."


장애인 관광 해설사를 예로 들었지만, 실상은 그마저도 녹록지 않다는 게 최 대표의 설명이다. 장애인을 위한 관광 해설사는 있지만, 비장애인을 위한 장애인 관광 해설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들을 철저하게 문화 소비자로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향유권 못지 않게 창작권 역시 중요함에도 장애인들은 공급자의 위치에서 배제돼 있다. 어떻게 장애인을 문화 공급자의 위치에 세울 것인가. 최 대표가 깊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 중 하나다.


"장애인 문화 기획자가 필요해요. 열다섯 가지 각 장애 유형에 맞춘 기획이 만들어져야 13만 명의 도내 장애인들이 문화 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스스로 주체가 되기 위한 움직임, 지난해부터 진행된 '장애인 문화예술제' 역시 그와 같은 맥락에서 시작됐다. 1년에 한 번뿐인 자리지만, 기량을 갈고닦아도 선보일 기회가 없었던 장애인들에겐 무엇보다 소중한 시간이다. 연습에 대한 동기를 부여해 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존감을 가질 수 있는 값진 자리이기 때문이다.


"장애인 취업률이 얼마인지 아세요? 불과 32%입니다. 그럼 취업하지 못한 나머지 장애인들은 무얼 하느냐, 장애인 편의 시설이 열악하니 나갈 엄두도 못 내고 집 안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 부모 모습을 보고 자랄 아이를 생각해 보세요. 그 아이가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할 수 있을까요? 아니죠. 하루빨리 취직해서 부모를 부양해야겠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게 무슨 존엄이고 행복입니까. 저는 이걸 장애의 문화적 유전이라고 봐요."


그 유전을 끊을 수 있는 대안이 바로 문화와 예술이라고 최 대표는 말한다. 전문성이 필요한 다른 직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접근이 쉬운 것도 문화의 이점이다. 서툴더라도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며 집밖으로 나가는 것, 아이가 부모를 소개할 때 화가나 음악가라고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사소한 듯 보이지만, 장애인 가정에서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문화 공급자로서의 기반 마련이 시급합니다. 장애인 문화 기획자의 존재가 절실한 이유죠. 아직은 더디지만, 문화·예술을 통해 장애인들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차별이나 편견도 조금씩 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사회의 다양성에도 기여할 수 있고요. 이처럼 문화·예술을 인권으로 풀고 싶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차별이 없어지는 그날까지
지방자치개혁운동의 사무국장으로 열렬히 활동해 오던 그가 사고를 당한 것은 2006년,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의 일이다. 그 한순간의 사고로 그는 하반신이 마비됐고,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됐다.


"1년 6개월 동안 입원해 있다 퇴원했는데, 정말 깜깜했습니다. 한동안은 집에서만 지냈죠.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이 아빠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요. 당시엔 아들이 네 살이었으니까 깊게 생각하진 못했겠죠. 그런데 더 자라면? 더 나이를 먹으면 집에만 있는 아빠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래서 집밖으로 나왔습니다. 아들에게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아들에게 떠밀려(?) 집밖으로 나오니 해야 할 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치분권 활동가로서의 경험도 전북 장애인 인권을 돌아보는 데 도움이 됐다. 다시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그는 과감히 부딪혀 보기로 했다. 특히, 행정의 차별에 의문을 품고 문화, 산업, 관광 등 모든 정책에서 장애인 차별이 해소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문제 제기와 의식 개선을 실천했다. 2013년에는 장애인 인권 교육과 상담, 지원 활동에 힘을 싣기 위해 장애인인권연대를 설립, 현재까지 그 활동을 꾸준히 이어 오고 있다.


"내년은 UN장애인권리협약 국내 시행 1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0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죠. 하지만 아직도 우리나라는 UN장애인인권위원회로부터 장애인 대우를 개선하라는 권고를 받고 있습니다. 사랑할 권리조차 빼앗긴 시설 장애인들에게 사랑을 나눌 방과 도구를 주라고 말이죠. 하지만 비장애인들에겐 전혀 와닿는 이야기가 아닐 겁니다. 평소 장애인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차별은 무의식에서 나옵니다. 그 무의식에서 차별이 없어질 때까지 우리는 계속 활동할 겁니다."


비극적인 사고로 장애를 얻었지만, 여전히 당차게 활동하고 있는 최 대표. 그가 겪은 아픔을 우리는 짐작할 수 없지만, 그가 꿈꾸는 미래에 살포시 손을 덧대며 힘을 보탤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 손길들이 우리 사회에서 점차 많아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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