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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 | 연재 [윤지용의 두 도시 이야기]
양치기 산티아고의 땅 안달루시아
안달루시아의 도시, 세비야와 그라나다
윤지용(2019-02-25 14:50:30)



안달루시아는 산티아고의 고향이다. 유명한 순례길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묻힌 산티아고 성인(St. Jacobus 성 야고보)이 아니고,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의 주인공 산티아고다. 신부가 되고 싶었던 젊은 양치기 산티아고는 어느 낡은 교회에서 양떼와 함께 밤을 보내다가 신기한 꿈을 꾸고 피라미드를 찾아 떠난다.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의 산티아고가 양떼를 몰고 떠돌던 그곳이 바로 안달루시아 평원이다. 그가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모로코로 가기 위해 배를 탔던 타리파도 안달루시아 남단에 있는 항구이다. 안달루시아 지방은 남쪽 언저리에 시에라네바다산맥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광활한 평원이다. 자동차의 핸들을 조작하지 않고 수십 킬로미터를 일직선으로 달리는 동안 길옆으로 올리브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지는 그런 곳이다.
안달루시아는 스페인을 상징하는 '플라멩코(flamenco)'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플라멩코는 '칸테(cante)'라고 불리는 노래와 바일레(baile)라는 춤이 결합된 종합예술이다. 유럽 각지를 떠돌며 유랑생활을 하던 집시들 중 일부가 15세기 무렵부터 이베리아반도에 들어와 안달루시아에 정착했는데, 이들이 동굴에 기거하며 고단하고 박해받는 자신들의 처지를 노래했던 것이 플라멩코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플라멩코 공연장들은 대부분 동굴집이다. 집시들의 애환을 담고 있다고 해서 구슬프고 처량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곡조와 춤사위가 의외로 정열적이고 역동적이었다.



콜럼버스가 묻혀 있는 세비야
세비야는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에 이어 스페인에서 네 번째로 큰 대도시라고 한다. 지도상으로 보면 내륙에 있지만 과달키비르 강을 끼고 있어 '대항해시대'에 무역항으로 번성했던 항구도시였다. 콜럼버스가 산타마리아호의 닻을 올리고 출항한 곳도 바로 세비야였다. 콜럼버스 이후로도 수십 년 동안 세비야는 아메리카대륙으로 가는 출발지였다. (내가 어렸을 때 교과서에서는 '콜롬부스'였던 것 같은데 지금의 외래어표기법으로는 콜럼버스가 맞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추석도 지난 가을철이었는데 세비야는 낮 기온이 섭씨 35도를 넘어서 몹시 더웠다. 스페인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방은 유럽대륙의 남서쪽 끝으로 아프리카 대륙을 마주보고 있다. 게다가 길가에는 야자수까지 있길래 적도와 가까운 줄 알았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세비야의 위도는 북위 37도로 서울과 비슷했다. 사실 유럽 나라들의 대부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고위도 지역에 있다. 런던이나 프라하 같은 도시들이 북위 50도쯤이다. 동아시아에서 몹시 추운 지역으로 꼽히는 사할린이나 하얼빈 같은 곳들(북위 46도 근처)보다 오히려 더 북쪽인 셈이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들을 다 만나고 오겠네~" 이런 동요가 있다. 오백삼십 년 전의 콜럼버스도 그렇게 믿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서쪽으로 배를 타고 계속 가면 동쪽에 있는 인도에 도착할 수 있으니 값비싼 향료를 몽땅 싣고 오겠다고 스페인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을 설득했다. 마침내 여왕의 후원을 얻는 데 성공해서 1492년의 어느 여름날 산타마리아호를 비롯한 세 척의 배와 120명의 선원을 얻어 '인도'로 향했다.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는 격'으로 신대륙을 발견했다. (사실 '신대륙 발견'은 문제적 표현이다. 대략 2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던 땅이니 '신대륙'도 아니고 '발견'도 아니다. 게다가 콜럼버스가 당도한 곳은 대륙이 아니고 서인도제도의 작은 섬이었다)


지금이야 콜럼버스가 '위대한 탐험가'로 칭송받고 있지만 당대에는 그다지 잘 풀리지 못했다고 한다. 첫 번째 항해에서 그는 거의 빈손으로 스페인에 귀항했고 두 번째, 세 번째 항해에서도 여왕에게 장담했던 만큼의 황금이나 향료를 싣고 돌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을 신임했던 여왕이 죽은 후에는 '사기꾼'으로 몰려 스페인 왕실로부터 받았던 작위와 재산을 몰수당했다고 한다. '찬밥'이 된 콜럼버스는 스페인을 떠나 다시 신대륙으로 돌아가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가 쿠바 땅에 묻혔다. 그가 남긴 유언은 "나는 결코 스페인 땅에 묻히지 않겠다."였다고 한다. 스페인에서 당한 괄시에 대한 '뒤끝'이었을 것이다.


19세기말에 쿠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콜럼버스의 유해는 스페인으로 봉환되었고, 그의 항해의 출발지이자 그 덕분에 대항해시대의 번영을 구가했던 도시 세비야에 그를 묻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유언이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땅에 묻지 않고 관을 허공에 띄운 무덤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독특한 무덤은 세비야 대성당 안에 있다. 우리나라의 상여처럼 생긴 콜럼버스의 관은 네 사람의 청동상이 어깨에 메고 있다. 이들은 스페인 통일 이전에 존재했던 네 개의 왕국인 카스티야, 아라곤, 레온, 나바라의 왕들이다. 아마도 위대한 탐험가인 그를 박대했던 것에 대한 사과와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어쨌든 콜럼버스는 끝내 '스페인 땅'에 묻히지 않았다.


모스크를 '재활용'한 대성당
콜럼버스의 무덤이 있는 세비야 대성당의 정식 명칭은 '카테드랄 데 세비야(Cathedral de Sevilla)'이다. 일반적인 성당들을 바실리카(Basilica)라고 부르는데 비해, 카테드랄은 교구를 관할하는 주교가 있는 '주교좌성당'이다.(교구의 수장인 주교가 앉는 의자를 '카테드라(cathedra)'라고 한다고 하니 이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 '주교좌'인 모양이다.) 그런데 이 세비야 대성당은 본래는 이슬람 모스크였다고 한다.


8세기 초반 이슬람세력인 우마이야 왕조가 북아프리카에서 지브롤터해협을 건너와 서고트왕국을 멸망시키고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했다. 피레네산맥 북쪽 지역을 제외하고 지금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땅 대부분이 오랫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이 당시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했던 북아프리카 출신의 무슬림들을 '무어인'이라고 했는데, 스페인 남부 곳곳에 무어인들의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세비야 대성당도 12세기 무렵에 무어인들이 세운 모스크였는데 기독교세력이 이슬람세력을 물리친 15세기 후반부터 백여 년 동안의 공사를 통해 성당으로 변모했다고 한다. 성당 건물의 외관은 유럽의 성당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딕양식으로 바뀌었지만, '파티오(Patio)'라 불리는 중앙정원(中庭, 안뜰)이나 첨탑 등에 이슬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세비야 대성당 자체도 유럽 전역에서 손꼽힐 정도로 웅장한 규모이지만 '히랄다탑'이라고 불리는 종탑도 그 위용이 대단하다. 높이가 98미터에 이르는 이 종탑 역시 본래는 미나레트(이슬람 사원 건물 가장자리에 세우는 첨탑)였다. 이슬람 특유의 기하학적 문양들이 돋보이는 이 첨탑은 높이가 70미터였는데, 모스크를 성당으로 바꾸면서 첨탑 위에 20미터가 넘는 종루를 덧쌓아서 종탑으로 바뀐 것이다.


땡볕 아래에 서서 세비야 대성당과 히랄다탑을 바라보면서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아야소피아 성당'을 생각했다. 세비야에 있던 무어인들의 모스크가 성당으로 바뀐 것과 비슷한 시기에 지중해 건너편에서는 정반대로 성당이 모스크로 바뀌었다. 1453년에 오스만 투르크제국이 동로마(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도시의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꾸었다. 비잔틴 건축양식의 백미이자 콘스탄티노플의 상징이었던 아야소피아 성당도 모스크로 바뀌었다. 성당의 천장과 벽에 있던 프레스코 성화(聖畫)들에 석회를 덧칠하고 이슬람 문양을 새겨 넣었다. 이렇게 두 종교가 서로 상대편 종교의 사원을 자신들의 사원으로 바꾼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다른 종교를 용납하지 않고 상대편의 신성을 모독하는 '야만'일까, 파괴해버리지 않고 재활용하는 '관용'일까?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깃든 그라나다
아직 본 적은 없지만 요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드라마가 인기 있는 모양이다. 안달루시아 지방의 그라나다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은 건축물 자체보다 클래식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인 타레가의 기타연주곡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Recuerdos de la Alhambra)'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곡은 타레가가 실연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그라나다를 여행하다가 만든 곡이라는데, 나는 이 구슬픈 곡을 들으면 그라나다에서 퇴각하면서 알함브라 궁전을 뒤돌아보고 눈물 흘렸다는 이슬람의 왕이 떠오른다. 세비야가 스페인 대항해 시대의 영광을 상징하는 도시라면, 그라나다는 무어인들이 이룬 이슬람 문화의 찬란함을 간직한 도시이다.


이베리아반도의 기독교세력은 8세기 초반에 무어인들에게 침략당한 이래로 7백 여 년 동안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싸웠다. 이른바 '레콩키스타(Reconquista) 운동'이다. 스페인어 레콩키스타는 영어의 reconquer(다시 정복하다, 되찾다)와 비슷하니 '재정복'쯤 되는 것 같다. 레콩키스타가 절정에 이른 15세기 후반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의 정략결혼으로 아라곤-카스티야 왕국이 만들어졌고, 이 연합왕국에 의해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 남아 있던 마지막 이슬람세력의 근거지 그라나다가 1492년에 함락되었다. 그라나다를 점령하여 레콩키스타를 완수하고 스페인을 석권한 이사벨 여왕의 후원이 있었기에 콜럼버스의 항해도 가능했다.


레콩키스타 군대에 의해 함락되기 전까지 그라나다의 제후이자 알함브라 궁전의 주인이었던 무함마드 7세는 아름다운 도시와 궁전이 파괴되고 무고한 시민들이 살육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성을 내주고 물러났다. 그의 유일한 항복조건은 '남아 있는 주민들의 이슬람 신앙을 존중해주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슬람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동안에는 기독교도와 유대교도들의 신앙도 어느 정도는 인정해주었던 모양이다. 그라나다를 기독교 군대에게 넘겨주고 바다 건너 모로코로 퇴각하기 위해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던 무함마드 7세는 알함브라 궁전을 뒤돌아보며 '이 아름다운 궁전이 파괴되지 않도록 전투를 피하고 항복한 것이 잘 한 일'이라며 스스로 위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사벨 여왕은 약속을 어기고 얼마 안 가서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들에게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으면 추방시킨다는 칙령을 내렸다. 그래서 주민의 상당수가 추방당하거나 학살당했고 일부는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때 그라나다를 떠나지 않고 남았던 무어인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 알함브라 궁전 북쪽 언덕에 있는 알바이신 지구다. 그라나다에 가면 누구나 비슷한 사진을 찍어 온다. 멀리서 알함브라 궁전의 전경을 찍은 사진이다. 이런 사진을 찍는 장소가 바로 알바이신 지구의 '성 니콜라스 언덕'이다. 이슬람의 궁전을 조망하는 전망대에 기독교 성인의 이름이 붙은 것에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대부분의 역사는 승자의 이름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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