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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4 | 연재 [수요포럼]
예술가들의 야영지(野營地), 문화예술의 자생을 고민하다
192회 수요포럼 | 문화예술 플랫폼, 통의동 보안여관
이동혁(2019-04-16 12:49:22)

서울 통의동 2-1번지에 '보안여관(保安旅館)'이라는 묘한 이름의 여관이 있다. 미당 서정주 선생이 머물며 '시인부락'이라는 동인지를 탄생시킨 곳으로 잘 알려져 있는 보안여관이지만, 역사의 거대 담론에서 제외되었던 보통 사람들의 숨결과 흔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감춰져 있던 한국 문화의 한 페이지는 최성우 대표에 의해 우연히 발견돼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됐다. 보통의 미술관과 박물관은 세상의 1%에 주목하지만, 보안여관은 그 나머지 세상에 주목한다. 그곳은 영웅들만을 위한 '명예의 전당'이 아니라 꾸준히 갱신되고 반박되는 동시대 예술가들의 야영지다. 동시에 보안여관은 묻는다. 역사와 시간이 제거된 도시의 효율성은 과연 옳은 것인가?


지난 3월 13일 진행됐던 192회 수요포럼에서는 사회와 예술의 경계에서 자생적 문화예술 플랫폼의 역할을 고민하고 있는 '통의동 보안여관'의 발자취와 내일에 관해서 들었다.



장소를 품은 땅, 그 기억을 더듬다
올해로 12주년을 맞은 통의동 보안여관은 두 채의 건물로 이뤄진 복합문화공간이다. 낡은 타일이나 천장의 서까래, 나무문, 벽지 등 여관으로 사용될 때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보안여관은 현재 갤러리로 운영되고 있으며, 신축 공간인 '보안1942'에는 카페(33마켓), 라운지 바(비바), 서점(보안책방), 전시 공간(보안1942) 등 다양한 문화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두 건물은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결국 두 건물이 하나의 지향점으로 묶여 있음을 나타낸다.


"여관으로 운영되다 2004년 폐업한 것을 2007년에 매입하여 2019년 현재까지 12년째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동시대 문화예술 기관으로서 10년 넘게 한 자리를 지켜 왔지만, 사실 이 장소에는 그 수십 배에 달하는 시간의 그림자가 켜켜이 쌓여 있다. 어제와 오늘이 단번에 단절된 공간이 아니라 80여 년 긴긴 세월 동안 여관으로써 운영되어 온 장소의 기억이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 대표는 공간을 운영하기에 앞서 먼저 "장소나 공간이 어디 위치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부터 탐문을 시작했다.
공간과 장소가 품고 있는 지역성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다. 깊이 들어가면 공간의 당위성과도 연결되는 문제, 최 대표는 지역의 기억을 더듬는 동안 보안여관이 어떻게 문화예술 기관으로서 서촌에서 성립할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찾았다.


"조선의 거의 모든 문화예술적 정체성이 서촌에서 태어났다고 보면 됩니다. 서촌은 조선 시대부터 근대까지 내려오는 문화예술인들의 주된 거주지였고, 그런 인물들이 살았다는 것은 당연히 한국 문화의 자궁 같은 역할을 서촌이 했다는 거죠. 즉, 2007년에 통의동 보안여관이 불쑥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런 기반이 마련돼 있었다는 겁니다."


통의동 보안여관의 고민은 '서촌이라는 땅과 시간의 기억들을 가지고 이곳에서 어떻게 문화예술 기관을 운영할 수 있을까'란 물음으로 이어진다.


"장소는 영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재개발이라는 폭력적인 행위로 도시의 기억들이 쉽게 지워지고 없어지고 삭제될 순 있지만, 사실 장소는 기억과 함께 여전히 유효한 가치로서 과거와 오늘과 내일을 이어 주는 통시적 가치를 발휘하는 곳입니다."


고향 집에서 보이는 아련한 빛, 할머니가 밥을 해 줄 때 들었떤 그릇의 달그락거림, 우리는 그런 장소에 애정을 갖고 천착한다. 그리고 그 장소가 사라졌을 때 우리는 굉장히 큰 상실감을 느낀다. 장소는 기억을 담는 그릇, 장소가 없어진다는 말은 사람들의 기억이 사라진다는 말이고, 나아가서는 원초적으로 회귀해야 할 장소들까지 잃는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공간이란 말에는 사회적이고 공적인 의미가 담겨 있죠. 반면에 장소는 내밀하고 은밀한 개인의 기억이 담긴 곳을 말합니다. 그렇게 구분했을 때, 저희는 통의동 보안여관 2-1번지를 '장소'라고 보는 것이죠."


켜켜이 쌓인 보통 사람들의 기억, 문화로 살아 숨 쉬다
"비가 새서 천장을 뜯어 보니까 아주 오래돼 보이는 박공지붕이 나타난 거예요. 아, 이 건물은 허물 수 없는 건물이구나, 직감적으로 그렇게 생각했어요."


발견한 사람이 최 대표가 아니었다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허물고 말았으리라. 하지만 그는 달랐다. 어린 시절 규모가 큰 적산가옥에서 생활해 본 적이 있던 그에게는 근대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 그렇게 지붕을 뜯어내고 보안여관의 숨겨져 있던 민낯(?)과 대면하게 된 순간 그는 당장 기존의 설계도를 폐기하고 보안여관의 원형을 지킬 수 있는 설계를 구상했다.


"그러면서 보안여관에 대한 정보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분명히 뭔가가 있을 것 같은 여관인데, 처음에는 아무 정보도 없더라고요. 그러다 누군가에게 서정주 선생이 머물렀던 여관이란 이야기를 듣게 됐어요. 그렇게 서정주 시인의 천지유정에 나오는 한 단락을 찾아내게 된 거죠."


'나는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김동리, 김달진, 함형수 등과 함께 시인부락을 만들었다.' 이것이 그가 찾은 보안여관 최초의 기록이었다. 1936년, 이곳에서 짐을 풀고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등 동년배 시인들과 함께 문학동인지 시인부락을 펴낸 스물두 살 청년 서정주. 뿐만 아니라 이상, 이중섭, 구본웅 같은 문인·화가들의 일탈과 예술혼이 영근 곳도 보안여관 열세 개 방이었다.


하지만 보안여관에는 보통 사람들의 기억도 만만치 않게 담겨 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청와대공보부, 문화공보처, 청와대 총리실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이 이곳에 머물며 숱한 작업의 밤을 보냈고, 청와대 경비 병사들의 면회 가족들과 연인들도 이곳에서 추억을 쌓았다. 보안여관은 명사들이 등장하는 역사 속의 방이기에 앞서 무수한 익명들의 삶이 쌓인 민중들의 방이었던 것이다.


"80년 넘도록 여관 영업을 했으니까 하루에 여섯 명만 들었다 치더라도 어마어마한 숫자가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보안여관을 거쳐간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단순히 서정주 시인 같은 유명인들만 묵었던 곳이 아니라는 거죠."


그런 보통 사람들의 기억을 모아 작년 보안 11주년에는 구술 녹취 전시도 진행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으로 최 대표는 박정희 할머니를 꼽는다. 박정희 할머니는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신여성으로, 인천 제2공립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스물두 살에 이곳 보안여관에서 맞선을 봤다.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할머니에게 보안여관은 단순한 여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최 대표의 생각도 이때부터 박제화된 유물로서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문화의 일부로서 활용하는 방향으로 전환됐다.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이나 작품을 모아서 분류하고 정리해서 보여 주는 곳이 바로 미술관하고 박물관이에요. 그래서 그곳은 영웅들의 기념관이 될 수밖에 없죠. 하지만 보안여관은 가능하면 그러지 않으려고 합니다. 정확히 시대를 알고, 보통 사람들의 시대를 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감성을 품고 자라나다
"보안여관은 꾸밈 없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메시지거든요. 효율성과 기능을 강조하고 수직적 상승을 하는 도시에 이렇게 비효율적이고 냉난방도 안 되는 불합리한 조건을 가진 건물이 있다는 것 자체가 메시지예요."


건물은 짓는 것이 아니라 자라게 하는 것이다. 형태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태도나 마인드를 구겨 넣는 것이 아니라 태도가 쌓여서 형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지난 11년간 보안여관이 진행해 온 프로그램들을 나열해 보면, 그가 보안여관을 어떤 장소로 자라게 하고 싶은 것인지 그 방향성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읽는 것(보안책방), 보는 것(전시 공간), 자는 것(보안 스테이), 먹는 것(33카페), 그리고 걷는 것(인왕산 산책길), 그렇게 다섯 가지 인간 감성을 기반으로 건물을 자라게 하는 것이 그의 목표다.


그리고 결국 보안여관의 이야기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 박정희 할머니가 머물고 간 것이 보안여관의 장소가 그대로 있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사실이듯이 지금의 보안여관을 거쳐 간 사람들도 소중하다. 최 대표는 지난 2년간 보안여관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인터뷰해서 아카이빙하고 있다. 여관이 일시적으로 거주만 하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끼리의 연결점 역할도 해 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생산과 창작, 예술의 생태계뿐만 아니라 그 예술 생태계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 나라, 민족, 시대의 정신 속에서 통의동 보안여관이 어떤 문화예술 기관이 되어야 할지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사실 답도 이론도 없다고 생각해요. 끊임없는 실행과 실패와 연습이 누적되고 축적돼서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속적인 가치를 한 장소에서 계속 유지시키고, 그것이 쌓였을 때에야 비로소 소망한 바가 이뤄진다는 최 대표의 지론은 단순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와닿는 표현일 것이다.


"잠시 하는 것은 쌓이지 않잖아요. 사람의 경험에도 쌓이지 않고, 장소에도 쌓이지 않고, 그 장소를 둘러싼 사람들에게도 쌓이지 않거든요. 일단 한 장소에서 오래 버텨야 돼요."


올해 12주년을 맞은 보안여관을 20년, 30년 뒤에도 그 장소에서 볼 수 있다면 그땐 또 어떤 새로움들을 선사해 줄까. 기억을 품고, 기억을 지켜 가는 보안여관의 발자취 속에서 미래를 엿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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