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호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9.8 | 연재 [마당기행]
도시재생을 완성시키는 것은 결국 소프트웨어다
2019 마당·전주도시재생자원센터 공동기획 도시문화기행 <서울>
이동혁(2019-08-14 15:17:34)

도시재생이 화두다. 무조건적인 철거와 재개발 시대를 거쳐 쇠퇴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 도시들은 이제 '재생'에서 그 답을 찾고 있다. 신도시, 산업단지, 뉴타운 개발 등 그동안 도시를 양적으로 키운 팽창 위주의 대규모 재개발 사업이 더 이상 도시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는 공통의 이해와 공감 속에서 중소 규모의 주민참여형 도시재생 전략을 바탕으로 도시를 질적으로 정비하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특히, 2017년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도시재생에 더 크고 많은 힘을 싣고 있다. 도시재생의 새로운 국면이 펼쳐진 것이다.


도시재생이 하나의 유행처럼 우리 도시를 휩쓸고 지나가지 않게 하려면, 보다 심층적인 고민이 이뤄져야 한다. 오래된 건물을 새롭게 리모델링하고, 거리 미관을 말끔하게 다듬는 것은 도시정비지, 도시재생이 아니다. 하드웨어와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은 그 안에 담길 '소프트웨어'다. 어떤 가치를 지향하며 무엇을 담아낼 것인가, 주민들에게 보다 더 보탬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지역의 정체성을 지켜 갈 것인가, 지역 공동체와 도시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그런 내실에 대한 고민들이야말로 도시재생이 진정으로 숙고해야 할 문제들일 것이다.


서울로 떠난 7월 도시문화기행에선 도시재생의 소프트웨어에 초점을 맞춰 관계와 공동체의 상생에 집중하고 있는 '어쩌다 가게'와 '어쩌다 집', 서촌이 품은 문화적 토양을 계승하며 자고, 보고, 읽고, 먹고, 걷는 인간의 다섯 가지 행위를 통해 건강한 문화 생태계를 제안하는 '통의동 보안여관'을 들여다봤다. 기행의 안내를 맡아 준 SAAI 건축사무소 이진오 소장과 통의동 보안여관 최성우 대표의 성의 있는 설명과 강연 속에서 우리 지역 도시재생의 내실을 짚어 본 소중한 시간이었다.



어쩌다 가게 망원
관계에 대한 고민, 임대인과 임차인의 상생을 꿈꾼다

서울 망원시장의 한적한 주택가, 그 골목 한편에 건물 모양도, 이름도 독특한 가게가 한 곳 있다. 이날 기행단이 처음으로 방문한 '어쩌다 가게 망원'이다. 온통 하얀 바탕에 불규칙한 외관이 눈에 띄는 이 공간은 계단과 복도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가게들이 반층 구조로 들어서 있어 일반적인 건물에선 느낄 수 없는 개방감이 지나는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곳이다. 또한, 건물 출입구를 따로 만들지 않고, 1층 복도를 건물의 앞뒤 골목을 잇는 골목길로 조성하여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왕래를 유도한 점도 어쩌다 가게 망원의 특징 중 하나다.
이진오 소장이 이처럼 독특한 구조로 건물을 설계한 이유는 그가 천착하고 있는 '관계'에 대한 철학 때문이다. 여러 가족과 함께 복작복작하게 살며, 부모님이 일을 할 땐 다른 집에 맡겨지는 일도 많았다는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러한 이웃집과의 왕래에 익숙했다. 지금과 그 시절이 같다고 말할 수 있는 없지만, 여전히 그에게 관계는 중요한 화두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흐른 만큼 더욱 깊어졌다고 해야 할까. 1층 통로를 개방한 이유도 단순히 독특한 외형을 추구한 결과가 아니라 골목들이 서로 단절되지 않길 바라는 그의 철학이 담긴 결과물이다.
어쩌다 가게에는 작은 가게와 공방 11곳, 사무실 5곳이 모여 있다. 책방, 밥집, 카페, 꽃집, 공방, 칵테일바 등 개성 있는 가게와 공방들이 있고, 인테리어 업체, 건축사무소도 들어와 있다. 입주자들은 창고, 회의실, 라운지, 마당 등 공간을 공유하며, 정수기, 프린터, 빔프로젝터, 냉장고 등 비품도 함께 이용한다. 이처럼 전용 공간보다는 공유 공간을 많이 확보하여 함께하는 시너지를 키우고자 한 점도 이진오 소장의 관계 철학을 엿보게 한다.
그의 의도처럼 어쩌다 가게에 모인 이들은 서로 관계를 만들고 이어가며 작은 연대를 끈끈하게 다지고 있다. 예를 들어, 입주자들끼리 자발적으로 모여 이벤트를 개최하거나 마켓을 여는 식이다. 느슨한 연대를 표방하는 어쩌다 가게지만, 그 관계망을 들여다보면 결코 가볍거나 느슨하지 않다는 점이 흥미롭다.
"친구의 친구와 친해지듯 어쩌다 가게를 중심으로 또 다른 관계가 형성되기도 해요. 그렇게 입주자들의 관계가 확장되면서 더욱 건강한 관계망이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개인이 홀로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계하며 더 오밀조밀한 연대가 만들어지는 거죠."
어쩌다 가게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입주자들이 내쫓길 걱정 없이 장사하길 바라는 건강한 상생의 마음도 어쩌다 가게가 관심을 받는 큰 이유다. 이진오 소장은 입주자들을 위해 5년간 같은 임대료와 임대 기간을 보장하고 권리금 역시 받지 않는다는 규칙을 세웠다. 홍대 앞 상권이 번창하면서 자영업자들이 처음 자리 잡은 터전에서 쫓겨나다시피 하는 일이 빈번해진 상황에서 어쩌다 가게의 이러한 시도는 젠트리피케이션의 대안으로써 큰 의미를 갖는다.
장사를 하는 자영업자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임대료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건물주에게는 공실이 가장 큰 스트레스일 터. 그렇다면 어쩌다 가게의 5년 임대료 동결이 그 방법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어쩌다 가게의 실험의 끝이 어디일지 기대감을 품게 하는 대목이다.


어쩌다 집 연남
느슨하게, 그러나 더욱 자유롭고 친밀하게 묶인 이웃이라는 이름의 가족

어쩌다 가게에 이어 기행단이 두 번째로 방문한 '어쩌다 집' 역시 사람들과의 관계에 주목한 공간이었다.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대안으로서 여러 모로 실험적인 모습이 많았던 어쩌다 가게와 마찬가지로 어쩌다 집 역시 새로운 주거 형태에 대한 도전으로서 이색적인 설계와 철학을 보여 준 공간이었다.
어쩌다 집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어쩌다 가게 망원을 세운 이진오 소장이 직접 설계하고 감리한 공간이다. 순서로 보면, 어쩌다 프로젝트의 두 번째 결과물로, 앞서 살펴 본 어쩌다 가게 망원보다 먼저 탄생한 곳이다. 하지만 둘 다 느슨한 연대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많은 공간이었다.
어쩌다 집은 한 건물 안에 골목, 마당, 라운지 겸 식당인 공용 공간과 사무실, 원룸, 쉐어 하우스라는 다양한 개인 주거 공간을 엮어낸 독특한 공유 주택이다. 1층의 라운지는 식당 겸 공유 공간으로 입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식당 앞 공터에 둔 테이블도 이웃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어 관계와 공유에 주목하는 이진오 소장의 철학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가 이처럼 공유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된 계기는 2012년 열린 한일현대건축교류전을 통해서였다고 한다.


"나루세 이노쿠마, 라는 팀이 쉐어 하우스 계획안을 가지고 왔는데, 기존에 어렴풋하게 생각하던 기숙사나 하숙보다 훨씬 더 능동적으로 공유되는 형태였어요. 집집마다 조금씩 공간을 내어 화장실을 모으고, 거실처럼 중심이 되는 공간을 확장시키면 더 풍요롭게 공간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공유에 대해 자극을 받은 프로젝트였어요."


당시 이진오 소장이 제출했던 '20㎡ 프로젝트'의 대안으로서도 공유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방안이었다. 계층에 따라 부각되는 공간 사용의 양극화, 똑같은 20㎡가 상류층에게는 안방 화장실, 중산층에게는 주방, 원룸에서는 집 한 칸의 크기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양극화와 상대적 박탈감의 대안을 쉐어 하우스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어쩌다 집이 전제로 내세우는 가치는 개인주의가 팽배한 우리 사회에 역행하는 공유의 가치다. 혼자 사는 것보다 이웃과 함께 사는 것이 어쩌면 더 자유롭고 친밀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모인 입주자들, 같이 쓰고 나누는 공유의 가치를 실천하며 그들은 일상을 더욱 풍요롭게 가꾸고 있다. 공동으로 사용할 벤치를 조립하는 일에 '집안' 남자들이 알아서 나선다거나 누가 말하지 않아도 먼저 보는 사람이 분리수거 쓰레기를 정리하는 어쩌다 집의 풍경이 꼭 한집에 사는 우리 가족을 보는 것 같다.


통의동 보안여관
도시재생은 단절이 아닌 연결이어야 한다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 그 맞은편에 지난 세기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낡은 2층 건물이 하나 있다. 바로 '구 보안여관'이다. 1936년 이전 문을 연 것으로 추정되는 이 구 보안여관은 2004년 문을 닫을 때까지 거의 70년간 청와대와 경복궁 주변의 유일한 여관으로 존재해 왔다.
2007년 최성우 대표의 눈에 띄어 철거될 운명을 면한 보안여관은 그 뒤 갤러리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관행적인 전시 구조에 맞춰 억지로 개조하기보다는 건물이 지닌 역사성을 최대한 살리고자 최성우 대표는 지금도 구 보안여관의 내부를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과거와의 단절이 아닌 계승을 선택한 최성우 대표의 의미 있는 철학이 물리적으로 드러난 공간인 셈이다.
이 구 보안여관의 옆엔 '보안1942'라 명명된 새 건물도 들어서 있다. 언뜻 보면 독립된 별도의 건물처럼 보이지만, 길 건너에서 바라보면 둘을 잇는 구름다리를 통해 서로가 유기적으로 묶여 있는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요컨대, 구 보안여관이 20세기의 흔적을 품은 근대사의 유산이라면, 보안1942는 구 보안여관의 현대판인 것이다.
복합문화예술 공간으로 지어진 보안1942에는 서점을 비롯해 카페, 갤러리, 모임 공간 등이 들어가 있다. 그중에서도 3, 4층의 게스트하우스는 구 보안여관의 정체성을 계승하며 전통적인 숙박업소가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시대에 적합하게 계승하고 확장시키려 했는지 보여 주는 소중한 공간이다. 현재는 일반 관광객뿐만 아니라 해외 문화 예술 관계자들이 한국 문화 예술의 속살을 경험하며 묵는 레지던스로 활용되고 있다.
이처럼 최성우 대표가 쌓아 온 일련의 작업들은 도시재생의 측면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단순히 낡은 공간을 보존해 갤러리로 활용하고 있다는 알기 쉬운 재생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펼쳐 온 작업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과거를 현재에 풀어 내려는 깊은 고민 속에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부터 문화의 중심지로 번창했다는 서촌이라는 지역의 특성, 서정주 시인이 머물며 '시인부락'이라는 문학 동인지를 펴냈다는 기록, 2004년까지 여관으로 운영된 숙박업소로서의 정체성 등 현재의 보안여관은 과거와 동떨어진 장소가 아니라 과거의 연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당시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풍부하게 담아냈다. 시쳇말로 '맥락'이 있는 공간인 셈이다.
우리 지역 역시 정체성과 역사성을 담아 낸 도시재생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깊은 고민 없이 성공 사례만을 쫓아 모방을 반복하고 있단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차근차근 순서를 밝아 나가기보다는 그 편이 훨씬 수월하고 당장 가시적인 성과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맥락을 잃은 장소는 지속성을 갖기 어려운 법, 먼 길을 돌아가는 듯이 보여도 사실 훗날을 생각했을 땐 깊은 고민과 숙고야말로 우리 지역 도시재생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방법이다.
기행단이 이날 돌아 본 보안여관도 사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다. 지금은 17만 명 이상이 다녀 간 핫스팟으로 주목을 받는 공간이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12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공간의 쓰임새가 달라지더라도 공간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켜켜이 쌓여간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그렇게 쌓인 10년, 20년이 다시 또 새로운 공간의 역사를 만든다. 결국 도시재생의 내실은 그런 꾸준함 속에서 다져지는 것이리라.


도시재생에 정답은 없다고 한다. 각 도시마다 쌓아 온 역사가 다르고, 그 역사 속에서 심겨진 정체성도 천차만별일 것이다. 하지만 이날 경험한 공유와 상생의 가치, 역사를 계승하는 보안여관의 발자취는 분명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였다. 그 초심을 다시 상기시킬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기행에 의미를 둘 수 있지 않을까. 다양한 가치들 속에서 우리는 과연 새로운 공간에 무엇을 채울 수 있을지, 넓어진 견문만큼 고민도 깊어진 시간이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