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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6 | 연재 [이휘현의 책이야기 ]
1950년 한반도, 전쟁, 그리고 두 권의 책
김성칠, <역사 앞에서> • 김은국, <순교자>
이휘현(2020-06-08 17:52:32)

이휘현의 책이야기 | 김성칠, <역사 앞에서> • 김은국, <순교자>


1950년 한반도, 전쟁,
그리고 두 권의 책

글 이휘현 KBS전주 PD




지은이 김성칠
출판사 창작과비평



지은이 김은국
출판사 문학동네



어릴 때 부모님의 말을 잘 따랐던 마커스는 사춘기 시절 정육점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일도 잘 도와드렸다. 그가 태어나 쭉 살아온 고장의 인근 대학에 진학한 것도 학업과 가족이라는 두 울타리를 굳건히 지키기 위한 그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대학 진학 후부터 아버지의 간섭과 걱정이 심해지자 마커스는 불만이 커진다. 일 년 후 집과 멀리 떨어진 아이오와의 한 대학으로 편입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학업을 잘 마치고 법조인이 되고자 했던 마커스에게 기숙사 룸메이트, 여자친구 등과의 관계에서 이런저런 마찰과 균열이 생겨난다. 예상치 못했던 오해들이 쌓이면서 마커스는 학장에게까지 ‘반항하는 학생’으로 찍히는 처지에 놓인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그저 학업에 충실하고 싶었던 마커스에게 찾아온 여러 가지 불운. 그 불운은 끝내 울분이 된다. 어느 순간 이 울분이 폭발하면서 마커스는 학교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성장소설이라면 주인공은 이 고난을 극복하고 자기만의 꽃을 피워낼 것이다. 예기치 않은 삶의 고통과 분노가 성장의 자양분이 되어줄 테니까. 하지만 마커스는 성장하지 못한다. 그는 얼마 후 죽기 때문이다. 마커스가 학교에서 쫓겨났을 당시, 한반도에서는 전쟁이 한창이었다. 대학생이라는 이유로 징집 면제 대상이었던 그는 퇴학 후 입대하게 된다. 그리고 부모와 친척, 여자친구와 아주 멀리 떨어진 한반도 중부전선 어느 무자비한 전쟁의 한복판에서 열아홉 살 마커스는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필립 로스(1933-2018)는 인간의 운명에 회의적이다. 전염병 창궐(<네미시스>)이나 죽음(<에브리맨>)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가는 인간의 비극을 냉철한 시선으로 보여준 그가 전쟁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비극 앞에서 허무하게 쓸려가는 인간의 무력함을 설파한다. <울분>은 그런 소설이다.


전쟁에서의 죽음은 대개 수치로 기록된다. 하지만 그 죽음이 품고 있는 개별성은 각자가 보듬고 있는 하나의 우주(들)이다. 치명적인 바이러스와 죽음이 그러하듯 전쟁 또한 이러한 개별의 인간이 보듬고 있는 우주를 눈여겨보지 않는다. 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필립 로스의 문학이 세계적인 작품들이 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다만, 우리가 이 소설 <울분>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는 것은, 소설 속 비극의 정점인 전쟁의 장소가(혹은 주인공이 죽은 곳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한반도이기에 그러는 것이 아닐까.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70년이 되는 해다. 그 트라우마는 여전히 이 시대에도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나는 여기 두 권의 책을 조심히 꺼내 놓고자 한다. 영웅도, 낭만도, 숭고함도 없고 다만 참혹한 현실로만 기록된 전쟁의 기록. 어떤 이유로든 전쟁은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기에.


김성칠(1913-1951)은 젊은 역사학자였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 청년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학문의 꽃을 피운 그는 해방 후 서울대 사학과의 젊은 교수로 자리를 잡았다. 좌와 우로 극심하게 대립하는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롯이 공부의 길을 고집했다. 하지만 시대는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38선을 사이에 두고 수년간 계속되었던 국지적 충돌이 전면전으로 바뀌면서 그의 인생도 송두리째 흔들린다. 우리는 전쟁 발발과 함께 수많은 피난민 대열이 남으로 남으로 쓸려갔다고만 알고 있지만, 당시 서울에만도 자신의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던 시민들이 상당수 있었던 모양이다. 역사학자 김성칠과 그의 가족 또한 그중 하나였다.


소위 ‘인공 치하’라 명명되는 시절을 서울에서 보내며 김성칠은 꼼꼼하게 일기를 써 내려갔다. 좌와 우의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았던 그는 아주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각으로, 하지만 역사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가진 인류 문명에의 통찰력과 따뜻한 인간애로 당대를 응시했다. 그 일기는 훗날 전쟁의 소용돌이 속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이 어떠했는지를 현미경처럼 보여주는 소중한 기록이 되어준다.


1993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된 <역사 앞에서>는 인간을 위해 만들었다는 이념이 어느 순간 괴물이 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인공 치하가 끝나고 서울 수복 후 벌어지는 일 또한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흔한 전쟁의 스펙터클도 없고 승리와 패배 그리고 숭고한 죽음이라는 드라마틱한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 이 일기가 여느 반전영화나 반전소설 못지않은 ‘반전 텍스트’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전쟁 발발 이듬해 고향인 경북 영천에서 한 괴한의 습격으로 그가 죽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의 일기가 계속되었다면, 아마 한반도 현대사 비극의 정점 한국전쟁에 관한 좀 더 생생하고 방대한 사료가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그의 이른 죽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영문학자 도정일이 번역한 김은국(1932-2009)의 장편소설 <순교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눈여겨볼 만한 작품이다. 1964년 발간 당시 미국 문학계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 작품으로 작가가 노벨문학상 후보에까지 올랐었다는 사실과, 한국 독서계가 이 텍스트에 가진 거의 무지에 가까운 깜깜이 정보가 무척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소설 <순교자>의 배경은 서울 수복 후 북진이 계속되면서 미군과 남한군이 점령한 평양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쟁 발발과 함께 인민군에게 총살당한 평양의 열두 목사와 두 명의 생존 목사. 소설은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주인공(이 소령)의 시점을 따라 진행되며, 열두 명의 순교자와 두 명의 배교자로 나뉜 이 성스러운(?) 사건의 이면에 감추어진 구슬픈 진실을 서서히 드러내 보여준다.


하지만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건 사건의 진실 그 자체는 아닌 듯하다. 전쟁의 참상 앞에서 종교적 초월로도 감쌀 수 없는 인간의 공포와 무력감, 그리고 나약함! 허나 신은 이 비극에 아무런 답도 내놓지 않는다!! 다만 그 비극을 체제 우월의 선전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이념 대립 집단과 인간의 광기가 넘쳐날 뿐. 미스터리 구조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흥미롭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 가슴속에 서늘한 느낌을 전해준다.


누군가는 인류 문명의 모든 혁신이 전쟁을 통해 생겨났다고 설파한다. 하지만 그 혁신이란 순수청년 마커스, 오롯이 신에 대한 믿음으로 삶을 의탁하고자 했던 평양 열네 명의 목사들, 그리고 휴머니스트 지식인 김성칠의 피를 머금고 피어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 지구 어딘가에서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 우리를 먹먹한 슬픔으로 몰아넣는 이유. 전쟁은 어떤 이유로건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 전쟁은,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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