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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9 | 연재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⑨
영화평론가로서의 첫걸음, 영화 그리고 프리부룩 영화제
임안자(2020-09-11 12:01:42)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⑨


영화 평론가로서의 첫걸음,
영화 그리고 프리부룩 영화제
임안자 영화평론가


신문학을 배우면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영화였다. 한때 문학에 빠졌듯이 시간이 갈수록 나는 영화에 쏠렸다. 거기다 영화학 강사의 해박하고 열정적인 강의는 영화에 대한 내 호기심에 부채질을 했다. 베른과 파리에서 철학, 교육학, 독문학, 예술 연극학을 전공한 강사 스테판 포트만 박사는 프리부룩 대학 말고도 취리히 종합예술대학과 베를린의 독일영화텔레비전아카데미의 강사였으며 동시에 스위스 국영방송의 영화 프로그램 고문으로 활동하던 일인다역의 영화광이었다. 그는 그 밖에도 1966년에 스위스 최초의 국내영화제를 만들어 스위스의 젊은 세대 감독들에게 데뷔의 무대를 제공하고 관객과의 만남을 꾀했다. 그는 또 젊은 감독들과의 실험적인 공동작업을 통해 “새로운 스위스 영화” 시대를 열게 되면서 스위스 영화의 정체성 확보에 앞장을 섰으며 정부와 칸톤의 영화정책에도 깊이 참여함으로 스위스 영화계로부터 “영화교황”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80년대 중반에 감독출신인 여자친구와 공동작업을 통해 극영화 “마지막 마녀”를 만들어 크게 성공한 바 있다.  

    

  포트만 박사는 여러 면에서 아주 인상적이었다. 30대 중반의 그는 어깨에 닿는 밤색빛의 긴 머리에다 구멍 난 진스 바지의 차림이었고 배가 불룩 나올 정도로 먹고 마시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강의실에 들어서면 다른 강사들처럼 앞에 서서 강의를 하지 않고 세미나에서처럼 둥그럽게 둘러 앉아 유럽 영화의 역사를 가르쳤고 세계 대가들의 영화에 대한 해설과 비평을 토론 형식으로 이끌었는데, 그의 폭 넓고 다양한 강의는 나에게 영화학의 전반적인 이해에 귀중한 밑절미가 돼 줬다. 그는 ‘영화는 사회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는 걸 특히 강조했으며 그런 차원에서 다큐멘터리 영화에 관심이 많았고 비디오에 대한 이론에도 제일인자였다. 그 점에서 하나 안타까웠던 건 그 시절에 그는 이미 몇몇 감독들과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있었으나 신문학에 영화학과가 생긴 지가 겨우 일 년 남짓 했기 때문에 학생들이 영화제작 과정에 직접 참여할 기회가 주어지지 못했던 점이다. 그리하여 나는 1974년 봄 학기에 바젤의 대형 텔레비전 광고회사에서 영화학의 현장 실습을 마쳤다. 그런데 그때 마침 70년대 스위스의 “떠오르는 젊은 감독”으로 인기가 높았던 이브 야르상(Ive Yarsan)이 그 곳에 있었고 나는 그의 견습생으로 들어가 3개월 동안 그를 따라다니며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를 직접 지켜볼 수 있었다. 그때 야르상 감독은 다음 작품을 만들 제작비를 보충하기 위해서 광고회사에서 텔레비전 광고편을 만들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스위스에서 잘 알려진 ‘과일 케이크’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에 에피소드 하나를 넣자면, 감독은 케이크를 준비하는 모델의 손보다 내 작은 손이 더 마음에 든다며 내 손을 찍었고 그 대가로 나에게 초콜릿 한 봉지를 선물했다. 아무튼 나는 광고화사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시각적 광고에 대한 졸업논문을 썼으나 내 삶에 중요한 변화가 생기는 바람에 끝을 내지 못했다.

 
고풍스러운 도시 프리부룩의 추억 



  스위스의 서부쪽에 딸린 중세기 도시 프리부룩은 1481년 스위스연방에 합쳐진 프리부룩 주(Kanton)의 중심도시다. 해발 육백 미터 높이의 고원대지에 세워진 시는 동서남의 세 방향으로 흐르는 사린느 강으로 둘러싸여 일종의 섬 모양새를 갖추고 있어  스위스 다른 도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12세기 도시가 태어날 때까지만 해도 프리부룩은 완전히 독어권에 속했었다. 그러다가 산업 발전으로 불어권 쪽의 노동자들이 계속 들어오면서 18세기 이후부터 불어가 주언어로 뒤바뀌었다. 현재 프리부룩 시의 인구 70%가 불어를 그리고 30%가 독일어를 쓰고 있는데, 고원지대인 도시의 중심지에는 불어를 쓰지만 사린느 강에서 가까운 낮은 지역에는 독어를 쓰고 있으며 그 곳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프리부룩은 독어 발음이며 불어로는 프리브르인데 “자유성곽”을 뜻한다.  


  프리부룩 시의 특징이라면 중세기부터 천백여 년 동안에 지어진 일곱 개의 여러 건축형식을 갖춘 천주교 수도원과 성당들이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있다는 점이며, 그 밖에도 수십 세기의 역사를 자랑하는 건축, 조각, 그림 등의 종교적인 예술품의 중심지로 유명하다. 프리부룩 시를 가리켜 흔히 “스위스에서 가장 큰 역사적인 도시”로 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프리부룩 칸톤은 전통적으로 가톨릭 종교의 지역으로 과거에 스위스뿐만 아니라 유럽의 천주교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전통적으로 보수적 경향이 짙었다. 옛날에는 의복과 가죽의 거래에 힘입어 경제적으로 상당히 풍요로웠으나 20세기에 와서는 스위스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의 하나로 알려졌고, 그건 지난 세기 70년대 내가 프리부룩에서 공부할 때까지도 계속됐었다. 그래서 프리부룩 주의 가난에 대한 농지거리가 떠돌기까지 했는데, 예를 들어 ‘프리부룩 사람들은 목욕을 자주 하지 않아 냄새가 코를 찌를 정도라서 새들마저 프리부룩 하늘을 날 때는 날개로 코를 막고 지나간다’든가 또는 ‘프리부룩 병원에서는 수술 환자에게 마취 대신에 환자가 신던 양말을 코에 대는데, 양말 냄새가 마취보다 더 독하기 때문이다’ 등 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지난 이야기로 21세기에 들면서부터 프리부룩 주의 경제는 눈에 띄게 나아지고 있으며, 정치적으로도 보수성향에서 차츰 벗어나고 있다.


  누가 뭐라든 프리부룩은 나에게 여러 면에서 잊혀지지 않는 추억의 도시로 남아있다. 대학의 첫 여름 방학을 맞아 바젤시립병원에서 일을 시작하던 1971년의 어느 날 의대생 하나가 이비인후과 실습생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도 금발의 청년이었는데 그는 의대 졸업 전 마지막 실습을 위해 왔다고 했다. 키가 크고 날씬한 체격에 날카로운 눈빛의 학생은 다른 사람들에게 민망스러울 정도로 나에게 친절했고 내가 일에 밀려 오후 늦게까지 일을 할라치면 가지 않고 나를 도와주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때 그가 영화관에 같이 가자고 했다. 실은 나도 그의 지적 매력에 조금은 마음이 쏠리고 있었던지라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가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영화관 앞에서 만난 그는 입은 옷이 너무 허술한데다 돈이 없다며 나더러 커피를 사달라는데 로맨틱 하기보다 좀 이상스럽고 야릇했다. 그러나 그가 갑자기 화제를 생뚱맞게 중국 철학자 노자의 책에 돌렸을 때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어쩐지 그런 그가 재밌고 사랑스러웠다. 그는 내가 한국의 가난한 집에서 왔다고 하자 그건 네 죄가 아니고 그게 지금 또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면서 자기를 마르크시스트라고 소개했다. 근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나 다짜고짜 그에게 앞으로 만나지 말자고 사정하듯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가 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너무 놀라워하며 왜 갑자기 그러냐고 걱정스럽게 물었는데, 그 장소에서 한국의 정치상황을 몇 마디로 설명하기엔 너무 복잡하여 불가능했다. 1971년은 박정희 장권이 최악에 이르렀던 때였다. 그에다 그해 독일에서 살고 있던 한국여인이 폴란드 남자와 결혼을 하려다 한국 정보원의 간섭으로 결국 실패했다는 뉴스를 며칠 전에 읽은 것도 마음에 걸렸고, 1967년 베를린에서 일어난 윤이상 작곡가의 사건이 또 다시 떠올랐다.


“윤이상 작곡가는 1963년에 벽화로부터 작품을 위한 영감을 북한을 여행했을 때 당시 남한의 군부 통치자 박정희는 이를 공산주의 의 북한을 위한 간첩행위로 평가하여 남한 정보국의 특별반이 1967년 서독으로부터 그를 납치하였다. 윤이상은 서울의 법정 앞에서 섰고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독일 정치가들의 격렬한 항의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2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친 후 그는 1969년 스프레 강(독일)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인용문은 최근 독일에서 발간된 “윤이상 사진으로 보는 인생과 예술“에서 따옴).


  윤이상 작곡가의 사건은 스위스의 한인사회에도 공포감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그런 시기에 마르크시스트라니! 한국에서 반공교육을 철저히 받고 자란 세대였는지라 마르크시스트는 무조건 빨갱이였는데 나 때문에 오빠까지 벌 받을 걸 생각하자 겁부터 났다. 그는 이해하기 어려운지 고개를 흔들었지만 나에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비참하게 그와 헤어진 뒤 후회가 많았지만 그를 다시 만나는 게 두려웠다. 그러다 일 년 반이 지난 뒤 1973년 가을에 나는 불어 코스가 끝난 뒤 그에게 전화를 했다. 그가 보고 싶었고 그를 다시 만날 각오도 있었다. 그와 헤어진 뒤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두 가지 질문은 ‘나는 왜 서른 살이 넘었는데도 내 삶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나라에서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가?’ ‘그럼 국가는 나를 위해 뭘 해줬던가?’였다. 오래 골머리를 앓다가 끝에 가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고국의 정부보다는 내 가슴에 귀를 기울기로 마음을 먹고는 그와 다시 만나기를 바랐다. 뜻밖의 전화에 놀란 그는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안과에서 인턴으로 있었고 새로 여자 친구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며칠 뒤 그는 내가 보고 싶다며 만나자고 했다. 우리가 만난 곳은 옛스럽고 아름다운 프리부룩이었고 재회의 기념으로 나는 미래의 남편 페터(Peter)와 정답게 술잔을 나눴다.  


프리부룩 영화제와 한국영화의 관계
  프리부룩에는 스위스에서 노카로노국제영화제 다음으로 이름난 국제영화제가 있다.  1981년에 설립된 된 것으로, 처음엔 소위 제3국으로 불리던 개발도상국에 속하는 동남아시아, 남미, 아프리카의 영화를 중심으로 경제적 보조의 차원에서 격년제로 행사를 치렀다. 그러다가 소련체제의 해체 이후 1992년부터 프로그램을 러시아를 포함한 동유럽의 지역으로 넓히면서 국제영화제로 확대됐다. 프리브룩 영화제에 한국영화가 처음으로 소개된 때는 1993년으로, 이장호 감독의 다섯 편 영화가 프리부룩 영화제가 최초로 마련한 “회고전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됐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장호 감독은 그의 첫 작품 “바보선언”이 1988년 바젤의 시네클럽 “러 봉 필름”을 통해 소개되면서 박광수 감독과 함께 스위스에서 최초로 알려진 한국의 감독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 감독의 회고전을 계기로 한국영화는 오늘까지 계속 프리부룩영화제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다섯 명의 감독들이 대상을 받았다. 2000년 전수일 감독의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 2011년 이창동 감독의 “시”, 2012년 박기용 감독의 “낙타(들)”, 이수진 감독의 “한공주”의 최우수상과 김의석 감독의 ”죄 많은 소녀“의 심사위원 특별상이 그것이다. 그리고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지난 세기말에 부산영화제의 “한국영화 해외 증진상”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신문학을 마친 20여 년 뒤 이장호 감독의 통역과 프레스를 담당하면서 프리부룩에 다시 가게 됐다. 그 때부터 틈이 생기면 한국영화를 보기 위해 프리부룩에 들리곤 하는데, 영화제서 한때 나와 같이 신문학 강의를 듣던 친구를 만났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가, 그는 90년대 새로 조직된 신문학과(Department)의 학장으로 승진했는데 오랜만의 만남이어서 살가웠다. 프리부룩은 또 내 딸이 2010년부터 2015년까지 언어학 박사과정을 마친 곳으로 이래저래 4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찾아가는데 나에겐 바젤 다음으로 정들은 도시다.                                                    

 10월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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