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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 | 특집 [전라도 개도 1000년]
전라도는 우리 민족사를 이끈 주축이었다
이동희(2018-03-15 10:05:17)



2018년 올해는 전라도 개도(開道) 천년이 되는 해이다. 고려 현종 9년인 1018년에 전주목권역과 나주목권역을 합치고, 전주의 '전'자와 나주의 '나'자를 따서 전라도라고 명명하였다.
고려는 건국직후 지방세가 강하여 중앙에서 지방에 외관을 파견하지 못하다가 성종 2년(983)에 이르러서야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처음 파견하였다. 이때 전라도에는 전주목, 나주목, 승주(순천)목이 설치되었다.
성종 14년(995)에는 다시 전국을 10도로 나누고 거점도시 12주에 절도사를 파견하였다. 10도제하에서 전라도는 강남도(江南道, 현 전북권), 해양도(海陽道, 현 전남권)로 편제되었고, 전주ㆍ나주ㆍ승주에 절도사가 파견되었다.
전라도(全羅道)는 강남도와 해양도가 현종 9년(1018)에 합쳐진 것이다. '전라도'의 탄생은 타도에 비해 적어도 1세기 정도 빨랐다. 현재의 경상도와 충청도는 10도제하에서 여러 도로 나뉘어 있던 것을 예종 원년(1106)에 합쳐 각각 '경상진주도', '양광충청도'라고 한 것이 그 모태가 되었다. '경상도' 와 '충청도'로 지명이 확정된 것은 각각 충숙왕 원년(1314), 공민왕 5년(1356)의 일이다.
전라도의 가장 빠른 탄생은 우선 지명의 연원에서 주목된다. 즉 '전라도'라는 지명은 가장 오래된 도명이며, 타도와 달리 고려시대 이래 조선을 거쳐 지금까지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현 전라도 영역이 이 때 이미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라도의 역사가 그만큼 오래되었으며, 지역공동체의 역사가 그만큼 깊다는 의미이다.
더불어 도제(道制)의 출범도 전라도가 가장 빨랐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도제가 처음 등장하므로, 결국 우리 역사상 도제가 가장 먼저 시행된 곳이 전라도라는 것이 된다. 이는 지역사적으로 결코 작지 않은 의미이다.



고려시대 전라도를 대표하는 도시는 전주와 나주이다. 하지만 비교선상에서 볼 때 전주가 나주보다 전라도를 대표하는 성향이 더 컸다. 전라도를 순력하는 안찰사의 관아인 전라도안찰사영이 전주에 설치되었음은 이를 말해준다. 안찰사영은 감영의 전신적 성격을 지닌다.
나주는 사실 고려건국과 함께 성장한 도시이다. 통일신라 때 9주가 설치된 곳은 전주와 광주였다. 나주는 고려태조 왕건의 세력기반이었다. 태조비 장화왕후가 나주오씨이며, 그 소생이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이다. 나주는 고려왕실의 어향(御鄕)적 도시이지만 전주가 행정적으로 더 전라도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감영을 일도의 최고행정기구로 하는 지방통치체제가 확립되었다. 전라감영은 전라도안찰사영에 이어 전주에 설치되어, 경상감영ㆍ충청감영과 달리 옮겨가지 않고 조선왕조 5백년 내내 자리했다. 전주는 조선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어향이 되었으며, 전라감영이 소재하여 전라도의 으뜸도시, 호남제일성으로 자리했다. 전주는 전라도 천년의 중심이었다.
전라도 천년 역사문화의 토대는 경제적 풍요이다. 전라도는 조선 제일의 곡창지대로 조선시대 국가재정의 1/3을 담당하였다. 전북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평야인 호남평야가 동진강과 만경강을 끼고 펼쳐져 있으며, 전남에는 영산강을 끼고 나주평야가 자리하고 있다.
전라도는 이런 경제력을 토대로 문화예술을 발전시켰다. 고려청자의 양대 생산지가 부안과 강진이며, 전주를 중심으로 소리, 서화, 한지, 음식문화 등이 발전해 전라도를 예향으로 자리하게 하였다.
또한 전라도는 새 세상을 열어가는 열정 또한 강했다. 조선후기 실학의 비조 유형원이 부안에서 『반계수록』을 편찬하였고, 실학을 완성한 다산 정약용은 강진에서 그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새세상을 꿈꾼 대표적인 역사이다.
전라도는 또 국가적 위기에 꿋꿋이 나라를 지켜낸 곳이다. 전라도는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수호되어 일본을 내쫓는 힘이 되었다.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無湖南 是無國家]"는 이순신의 말은 이를 잘 대변한다. 조선말에도 호남의병은 치열하게 가장 끝까지 일본에 저항했다.
그런가 하면 전라도는 높은 정치적 위상과 함께 정치적 견제를 받은 곳이다. 고려시대 훈요십조와 조선시대 정여립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건이다. 태조의 유훈이라는 훈요십조에 차령이남 사람은 등용하지 말라고 하였고, 전주출신 정여립이 모반을 도모했다고 하여 호남인재들은 중앙진출에 어려움을 겪었다.   
전라도 천년의 역사는, 풍수의 논리로, 반역의 논리로 끊임없이 정치적 견제를 받았지만 곡창지대에 힘입어 경제적 풍요를 구가했고, 문화예술을 꽃피웠으며, 국난극복에 앞장서고 새사회를 열어가는 선도자가 되었다. 전라도는 우리 민족사를 이끈 주축이었다. 이는 전라도의 현재와 미래를 열어가는 역사적 큰 자산이다.  

천년의 역사를 기념하는 것은 향후 미래 천년을 열어가기 위한 것이다. 새천년을 위해서는 지난 천년 집정세력들이 왜곡한 전라도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 전라도는 풍수와 반역의 논리로 전근대에 끊임없이 견제를 받았고 이런 견제가 전라도의 역사를 왜곡하고 호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낳았다. 후백제 역사 왜곡도 그렇다.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
더불어 지역사를 대표할 만한 일들을 기념하고 그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 역사는 정신이다. 역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시적인 것 이상의 힘을 가지기도 한다. 전북자존을 위해서는 경제도 활성화되어야 하고 지역정신도 바로서야 한다. 임진왜란 때 웅치ㆍ이치전투, 정유재란 때 남원성전투와 만인의총, 이 대단한 역사를 전북이 가지고 있지만 이를 기념하고 기리는 일은 미약하다. 1894년 전북을 중심으로 반봉건 반외세를 외쳤던 동학농민혁명 또한 지역정신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있다.
전북과 전남이 분도된 것은 1896년이다. 전라도 분도는 광주가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고, 전주와 나주는 쇠퇴의 계기가 되었다. 전남도청이 나주가 아닌 광주에 설치되었다. 전북도청은 전주에 자리했지만, 전주는 호남의 중심이 아니라 전북의 중심으로 축소되었다. 분도된 지 120년이 넘었다. 미래 천년도 전북인으로 첫발을 내딛는다. 전북의 미래를 위해서는 전북인으로서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
전라도 천년의 역사적 자산으로, 전북의 미래를 위해 특히 주목되는 것은 꽃심의 정신과 전통문화이다. 꽃심은 새로운 문화와 세상을 창출해가는 정신이다. 2016년에 전주정신으로 표방되었는데, 꽃심의 정신은 넓게는 전북, 전라도의 특질이다. 꽃심은 새천년을 위해 지난 천년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힘이다.
전북의 전통문화는 타도와 차별성을 갖는 대표적인 미래 자산이다. 전북은 아직도 사람들의 의식속에 전통이 남아 있고, 전통문화유산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서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데 웅장한 장성의 필암서원은 새건물들이 들어서는 등 원형이 깨져 문제가 되었고, 정읍 무성서원은 사람들의 손길이 덜 가서 초라하게 보이기까지 하지만 원형이 깨지지 않아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전북의 미래를 위해 전통문화의 원형을 잘 보존해야 한다.
한편, 전북의 미래를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낯설고 과감한 시선과 접근이 필요하다.  지난 천년과 현재는 전북의 형편도 다르고 시대도 다르다. 지금의 전북은 풍요로운 전통기의 전북이 아니다. 새로운 시각과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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