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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 | 연재 [수요포럼]
문화산업시대, 상생의 생태계 구축이 관건이다
대중문화로 한국사회를 읽다
김성식(2018-03-15 10:07:42)



마당의 180번째 수요포럼은 강헌 음악평론가다. '대중문화로 한국사회를 읽다'는 주제로 두 시간을 단박에 내달렸다. 강헌은 어느 하나의 옵션으로 규정되지 않는 평론가다. 애초에 그의 밥줄은 영화판이었다. 초기 독립영화판에서 충무로 문법에 대항한 인물이다. 영화집단 장산곶메의 '파업전야' 시절이었다. 이후 삼성영상사업단으로 이어졌다. 물론 디지털영상 발호 이전의 활동이었다. 지금이야 구석기시대쯤으로 인식되는 VHS시절이다.
강헌의 공식직함은 음악평론가다. 그럼에도 저서가 없었다. 그의 신산한 삶이 그럴 만도 하다. 2015년에 저술활동이 시작되었다. 『전복과 반전의 순간1-강헌이 주목한 음악사의 역사적 장면들-』(돌베개)을 필두로 숨가쁘게 쏟아내고 있다. '전복과 반전의 순간2'가 지난 해에 나왔다. 그 사이에 『강헌의 한국대중문화사1, 2』가 2016년 말에 동시에 발간되었다.
그의 잘 벼리어진 무기에는 '맛집'이 있다. 음식에 관한 수많은 논객과 셰프와 프로그램이 만발하고 있지만 강헌만큼 맛을 내는 논객을 나는 모른다. 음식에 관한한 그는 '백문이 불여일식'론자다. 음식을 공부와 답사로 이야기하는 자는 식탐 들린 걸신을 결코 이길 수 없다. 물론 필자는 그와 찬물 한 잔 같이 마신 적 없지만, 그의 경이적인 '걸신' 행각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의 여정 한 갓길에는 '탈상(脫傷), 노무현을 위한 레퀴엠(2012년)'이 있다. 노무현 서거 3주기를 맞아 발매한 이 음반을 그가 프로듀싱했다. 당시 그가 이렇게 말했다. "노래를 사랑했고, 민주주의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지녔으며, 나라 구석구석 모두가 조화롭게 발전하는 그런 소박한 꿈을 지녔던, 그러나 절반의 승리를 거두고 절반의 좌절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던 한 사람에 대해 음악인과 시민들이 각자의 소중한 진정을 담은 진혼곡집"이라고.
당시가 언강생심 유신이나 80년대도 아닌 2012년이었건만 이런 글도 남겼다. "정치가로서 노무현의 삶이 그랬듯이 초유의 이번 추모 음반이 만들어지는 데엔 글로서 표현할 수 없는 파란만장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웠던 고비는 참여의 뜻을 밝힌 뮤지션이나 음반기획사들이 주변의 만류 압력에 못이겨 중도에 그만둘 때이다. 그저 한 정파의 정치인도 아니고 한 지역의 인물도 아닌,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던 이의 추모 음반에 참여하는 것도 정치적 보복을 걱정하고 경제적 타격을 두려워해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었다."는. 불과 5~6년 전의 일이다. 이명박근혜의 방식은 늘 이랬다. 그게 누구든 성가시다 싶으면 밥줄부터 끊었다. 권력기관을 동원해 세무조사부터 탈탈 터는 식으로 말이다. 음반 하나 내는 일을 무슨 독립운동하듯 해야 했다. 어처구니없던 지난 9년의 단면이다. 


이번 강연 자리에서 그는 '요즘은 명리학으로 먹고산다'고 하였다. 명리학이 뭐냐고 물었더니, 조선시대 유학자네 벼슬아치네 하던 사람들에게 '유학은 낮의 학문이고 명리학은 밤의 학문이었다'고 답한다. 명리학은 모르지만 저게 무슨 말인지는 알만했다. 양지를 쫓는 도덕군자도 자기 운명에 관한 불안을 공맹(孔孟)이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일 테다. 그의 『命理』 1,2권이 이미 2015, 16년에 출간되어 있다.
강헌은 단편적 팩트와 정보를 모아 그럴듯하게 서사화 하는 데에 능하다. 즉 '구라쟁이'라는 말이다. 그것도 지식인 언어와 장바닥 언어를 무변으로 넘나들면서 말이다. 본인도 자백하듯이 그는 음모론자에 가깝다. 아니, 음모론적 플롯구성에 능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음모론'은 '장면의 서사화'에 다름 아니다. 그것도 장편대작으로 말이다. 그의 첫 번째 저서 『전복과 반전의 순간』에서 그가 풀어낸 '윤심덕과 김우진의 현해탄의 정사(情死)'가, 그의 음모론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이 사건에서 누가 이득을 보았는가'를 그는 집요하게 캐묻고 있다. 스포일러를 무릅쓰고 누설하자면 '일본기업 축음기 업자'였다.
마당 수요포럼 강연의 주제는 '대중문화'와 '문화산업'이었다. 그의 강연에는 대중문화와 문화산업 시대를 선도한 몇 가지 키워드가 있었다. '세대'라는 개념만 옮기고자 한다. 이 개념은 20세기 전까지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일테면 10대들을 위한 강강술래 버전이 따로 없듯이, 그 전까지의 문화는 다 어른들의 문화였고, 10대들은 어른들의 문화를 따라했던 것 뿐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 김제 광활 방조제 뚝길에서 나훈아의 '해변의 여인'을 즐겨 부른 것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라는 걸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그냥 따라 불렀을 뿐이다.
미국에서 대중문화와 대중문화산업의 기폭제가 된 것이 이른바 '라이징 제너레이션' 즉 '대중문화세대'였다. 이들은 1950년대 후반부터 '저항의 아이콘'으로 등장한다. 소위 로큰롤 세대가 그것이다. 이들 세대는 2차대전 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다. 이들이 걸음마를 시작할 때가 미국은 명실상부한 수퍼 최강국이었다. 그들의 조국은 계급과 신분을 초월한 풍요를 누린 첫 번째 세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10대가 되면서 미국사회도 마치 천국인줄 알았던 환상이 깨지기 시작한다. 우리가 겪었고, 겪고 있고, 앞으로도 겪게 될 '입시지옥문'이 그것이다. 풍요가 지속된다는 것은 중산층이 두터워진다는 것과 같다. 경제적·신분적 제약으로, 또는 필요성에 둔감했던 부모들이 자기 자식도 대학에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누구나 '아이비(Ivy)리그'를 꿈꾸기 시작했고, 금새 과열되기에 이르렀다.
그 중압감은 온통 10대들의 몫이었다. 당연히 학교와 교실은 입시지옥으로 변하고, 10대들은 소수의 아이비 진학자와 대다수의 루저로 나뉘게 된다. 학교와 사회와 교회공동체의 욕망이 학생들을 진학과 낙오로 내몰았고, 낙오자로 낙인찍힌 대다수는 방황에서 저항으로 돌변한다. 이른바 세대투쟁에 돌입한다. 기실 10대들은 가진 게 없다. 유일한 투쟁방식은 반항이었고, 영역은 '문화' 뿐이었다. 10대들은 어른들, 미국의 엘리트 기득권집단이 가장 혐오하는 짓을 골라서 했다. 그 짓은 백인의 흑인 흉내였다. 이것이 로큰롤의 탄생 배경이다. 그들의 부모세대는 세계1,2차 대전을 비롯한 모든 전쟁에서 승리한 세대였다. 그 세대의 마지막 전쟁선포가 '세대전쟁'이 된다. 로큰롤을 '사탄의 음악'으로 규정하고, 정화사업으로 그들을 억압하기 시작한다. 레코드판을 다 불태우고, 이런저런 죄목으로 대중음악인과 방송 피디들을 구속하거나 해고한다. 가히 일사천리다.
1950년대 암흑의 시대, 우리 식으로 바꾸면 적폐의 시기는 61년 존 에프 케네디라는 듣보잡 대통령의 당선으로 주춤하게 된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40대, 백인 중에서도 언더독(underdog)인 아일리쉬계, 개신교 아닌 카톨릭계, 미국 주류사회의 마이너리티가 대통령이 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백악관 인적청산을 젊은 피로 개비하고, 국무회의를 기업 전략회의 하듯이 노타이 와이셔츠 차림으로, 비행기 트랩에서 007가방을 직접 들고 트랩을 내려오는 이미지로 등장하는 그는 어느덧 20대가 되어 투표권을 획득한 루저세대의 열광의 대상이자 문화적 상징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리가 다 알다시피 겨우 3년도 못 채우고 그가 암살된다. 그동안 '음침한 노친네' 이미지를 일거에 '스타 비즈니스맨'으로 바꿔낸 최초의 대통령이 암살되자 청년들의 상실감은 극에 달한다.
3개월 뒤 사건이 터진다. 미국 10대와 20대의 상실감을 한 방에 역전시킨 '리버풀 출신 네 명의 생양아치'가 그 타이밍을 치고나오는 소위 '브리티시 인베이전', 비틀즈의 출현이다. 1964년 미국에서 발매된 모든 음반 판매의 58%가 비틀즈 판이다. 광풍 그 자체였다. 이로써 어른 세대는 대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전쟁에서 조용히 물러나게 된다. 기성세대와 자식세대가 최초로 문화적 갈등을 겪은 뒤, 문화적 헤게모니가 새로운 세대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그 문화가 태평양을 건어오자 한국의 통키타 문화가 등장하게 되고, 한국판 세대갈등이 똑같은 방식으로 시작을 알된다.
세대 개념은 대중문화의 전면적 등장으로 문화산업시장을 세분화 시켰고, 스타를 앞세운 동일시 전략으로 구매력이 강한 문화상품을 증폭시켰으며,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매개자에 불과했던 매스미디어가 절대적인 힘을 가지게 된 점 등이 그 이후의 변화양상이다. 한류의 스타마케팅이 여기에 딱들어 맞는다. 
 K-팝을 사례로 들어, 미국 일방독주의 문화산업시장에서 21세기에 한국이 독자적인 글로벌 스탠다드가 됐다는 기적같은 사건, 세계 2대 문화시장을 가진 일본도 해내지 못한 문화산업의 빛나는 성과를 열거하던 강헌은 경각심으로 강연을 마무리한다. 현재의 한류문화산업이 지속가능할 지에 관한 문제제기였는데, 강헌은 비관적이다. 몇몇 사례가 등장하였다. 플랫폼을 장악한 대기업의 독점체제가 문제라고 한다. 문화산업도 이미 대기업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며, 그들은 독점체제 강화를 위하여 엄청난 진입장벽을 쌓아놨다고 한다. 재벌기업의 문어발식 확장 모습과 똑같다고 한다.
문화산업의 핵심은 사람이다. 창조적 개발자들이다. 이들이 개발한 콘텐츠 수익이 개발자들에게 돌아가야 개발 인재들이 들어온다. 그러나 지금의 구조는 그렇지 않다. 대기업이나 거대 기획사가 다 가져간다. 콘텐츠 생산 인재가 들어올 만한 매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 불공정 구조를 혁신하는 것이 문화산업 영역의 진정한 적폐청산인데, 이 일을 할 수 있는 권력은 역시 정부밖에 없을 것이다. 문화산업 시장에 있어서 불공적 거래관행을 상생의 생태계로 바꿔놓지 않는 한 미래가 없다는 것이 강헌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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