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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4 | 칼럼·시평 [문화칼럼]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노현정(2018-05-03 10:45:11)

촛불 그리고 #MeToo
지난 3월 10일은 탄핵 된지 1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 대책위에 함께 했던 활동가들은 경기전 앞에서 탄핵선고를 함께 보며 울고 웃으며 서로를 뜨겁게 안았다. 대책위를 마무리하며 상황실 활동가들과 언제쯤인지 모르겠지만 촛불 '시즌2'가 펼쳐진다면 그때 다시 또 보자는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있다. 바로 지금이 그 촛불시즌 2가 아닌가 싶다. 사실 촛불의 긴 과정을 돌아보면 광우병 반대로 시작되었던 촛불소녀의 외침과 지난 탄핵정국 때 박근혜 탄핵, 여성혐오 반대를 외친 여성들의 연결된 주체가 이미 말하기 시작했었다. 또한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과제에서 그동안 사회적으로 주목받지 않았던 여성·소수자 과제로, 삶과 연계된 구체적인 과제로 이동하고 있다.


이제는 남성문제
서지현 검사를 시작으로 지목되고 있는 문화예술계, 교육계, 정치계 등등 부끄러운 민낯을 마주하고 있다. 전북지역 또한 예외가 아니다. 혹자는 이 #MeToo를 들불처럼 번진다고 표현을 한다. 이 표현이 적절하게도 한 달도 되지 않은 기간 동안 많은 여성들은 SNS, 대나무 숲, 이메일과 전화를 통해 용기를 내고 있다. 이 정도 라면 이것은 여성문제가 아니라, 남성문제다. 시대가 바뀌었고 시민의식이 성장했지만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았던, 그래서 같은 일을 해도 여성은 성적매력이 있어야 하고 무조건 순응해야 한다고 여기는 사회 속에서 여성을 희롱하고 때리고 성폭력을 행사했던 그런 남성들의 문제라는 것이다. 수직적인 위계 속에 누군가를 지배하고 군림해야만 남자답다고 인정받는 사회가 만든 남성들의 문제라고 이제는 명명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남성들 스스로 이 문제에 대하여 주도적으로 고민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MeToo #한국산 #미국산, Oh My God
누군가는 아니 많은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한국에서 미투가 있긴 했었는가, 미국 헐리우드발 미투를 따라하는 거 아닌가, 오마이 갓이다. 길게는 일제 강점기부터, 짧게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 더 최근에는 '2015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지속적으로 당연하다고 여겨진 관습들에 의문을 던지며 성 차별적 구조에 저항하고 시대를 거슬렀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시작을 고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으로 이야기 할 수도 있고, 민주화 운동 시기 변월수 사건을 시작으로 여성폭력관련 법들의 계기가 된 사건을 말할 수 도 있다. 더불어 진보운동의 미투운동이라면 99년 말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 뽑기 100인위원회 활동을 들 수 있다. 이렇듯 여성들의 말하기는 이전부터 지속되어왔다. 단지 미국 허리우드 발 #MeToo 운동과 서지현 검사의 용감한 고백이 지금 미투운동의 도화선 혹은 변곡점이 될 수는 있으되 원인 아닌 이유이다.


#MeToo의 원인
연일 포털 사이트에 유명인들의 이름이 검색어 1~2위를 다투고 있다. 하루가 지나면 새로운 사람이 나오고, 그럴 사람이 아니네, 여성이 문제가 있었네, 악플 댓글이 달린다. 인간성은 참 좋은데 나쁜 손이 문제야, 그 조직의 특수문제인거지, 권력관계에 의한 거네. 이제 말하기 시작한 여성들의 입을 막으려는 것처럼 미투가 터져 나오는 순간부터 성폭력의 원인은 한 개인의 나쁜 손버릇의 문제, 악마 같은 가해자의 악행, 특정 조직의 문제로 비화되고 있다. 특히 단순히 가해자 개인의 도덕적 문제로 축소하는 악마화는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문제의 일시적인 봉합을 꾀할 뿐이다. 젠더 자체가 이미 권력관계를 의미한다.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성별(gender) 자체가 위계적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 학교에서 남학생이 여선생님을 성희롱하고, 남성 환자가 여의사를 성폭력 문제까지 설명된다. 성별권력관계와 무관한 권력형 성폭력이란 개념은 애초에 성립이 불가능하다.


#MeToo, 언제까지
지금 #MeToo 운동은 여성을 학교에서 일터에서 정치 영역에서 배제하고 소외시키고 도태시키는 메커니즘을 종언하고 있다.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연루된 의미 투쟁의 과정이다. 애초에 그런 성폭력을 가능하게 한 공동체 문화 자체에 대한 점검과 근본적인 개선의 노력이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서 지속되지 않는 한 유사한 사건은 계속 해서 반복 될 수밖에 없다. 요즘 이투 가해자에 대한 번개와도 같은 빠른 판단과 (셀프)처벌 또는 징계만이 답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의 성폭력 사건은 돌출적인 절단면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과거로부터 등장해서 공동체의 미래로 이어진다. 우리가 반성폭력 문화를 만들어 가려면 이투를 특이한 사건으로 자극적인 소비를 할 것이 아니라 더 긴 흐름 속에서 봐야 한다. 나의 가해자성에서부터 성폭력 문화를 종식시킬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인 제도적 개선을 책임 있는 단위와 국가에 요구해야 할 것이다. 의식의 근본적인 전환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해결책이다. 이제 겨우 한 달이 되어가는 데 언제까지 갈 것 같아요? 라고 묻는다. 이전에도 그랬듯 언론매체에서 사라질 수 있겠지만 여성들의 말하기는 계속 될 것이라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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