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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9 | 연재 [해외기행]
작은 도시의 선택, 행복의 가치를 만들다
일본의 작은 도시들
오민정(2018-09-17 10:45:01)

새벽 2시 30분,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집을 나섰다. 올해 들어 연일 폭염기록을 갱신하고 있었지만, 새벽이라 그런지 얼굴에 스치는 바람이 제법 시원했다. 짐을 차에 옮기며 기행에 참여하기 위해 밀린 일을 해치우던 마지막 일주일이 떠올라 괜히 혼자 웃음이 났다. 그 모습에 배웅을 해 주시던 어머니가 한심하다는 듯 쯧쯧, 하고 혀를 차셨다. 여권을 찾겠다고 집안을 들쑤시고 새벽 3시에 떠나는 일정을 오후 3시로 혼자 착각해서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덕분이었다. "정신 좀 똑바로 차리고. 가끔 내 딸이지만 왜 저럴까 싶다니까." 어머니의 한숨 섞인 핀잔과 함께 드디어 4박 5일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눈을 뜨니 벌써 인천공항. 버스에 타자마자 잠이 들어버린 덕분이었다. 요즘은 머리만 대면 잠이 온다고 혼자 멋쩍어하고 있다가 일정을 담은 작은 책자를 넘겨보았다. 꼼꼼하게 준비된 작은 책자. '작은 도시의 선택, 행복의 가치를 만들다'라는 문구가 특히 마음에 와 닿았다. 일정에 포함된 내용들을 간단하게 훑어보다보니, 이번 기행이 단순한 소도시 여행이 아니라 도시재생과 도시 브랜딩의 저력을 가지고 있는 도시들을 만나게 될 거라는 막연한 추측이 어느새 확신과 기대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첫째 날, 고마쓰-도야마-가나자와
고마쓰의 공항에 도착하자, 더운 공기가 느껴졌다. 작은 공항임에도 매우 깐깐한 입국심사가 이어져 정말 일본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조금 낯선 것이 있었다면 입국안내소에 어르신들이 일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자원봉사 혹은 노인 일자리 정책이 아닐까 싶었는데, 노인일자리가 환경정화 같은 단순노동에 그치는 우리나라와 많이 비교가 되었다.


점심은 일본에서의 첫 식사답게 '우동'이었다. '마루카메(Marukame)'는 일본의 대표적인 우동전문점으로, 사누키식 우동이 대표 메뉴였다. 좋은 재료와 오픈된 주방공정, 즉석조리가 특징인 마루카메는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나는 일행과 함께 깔끔한 맛이 인상적이었던 차가운 우동 한 그릇과 튀김을 먹고, 다음 목적지인 도야마로 출발했다.


낮은 건물과 전원적인 풍경이 어느 새 도회적인 풍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도야마현으로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방문한 곳은 도야마현의 수묵미술관이었다. 일본에서 유일한 수묵화 전용 미술관이라고 하는데, 명칭에 사용되고 있는 '수묵'은 단순히 수묵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널리 일본의 미(美)를 나타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입구에서부터 전통적이면서도 묘하게 현대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미술관치고는 보기 힘든 단층건물과 정원, 넓은 잔디밭과 중앙의 고목 등이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느긋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방문한 날에는 마침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수묵화를 비롯해 염직과 도예 등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특이했던 점은 미술관에 설치된 '다실(보츠코안)'이 있었는데, 일본 전통 차를 즐기며 여유롭게 작품을 감상 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한다. 군데군데 일본의 미학을 담은 공간들도  인상적이었지만 '수묵화'라는 전통적이면서도 일반적인 문화콘텐츠를 작은 도시의 특색 있는 브랜드로 키워나간 점이 몹시 부럽기도 했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도야마 유리미술관(Toyama Glass Art Museum)'. 언젠가 여행 블로그에서 도야마의 필수 여행코스로 본 적이 있었다. 도야마는 유리공예로도 유명한 도시라고 하는데, 실제로 유리 관련 공예품을 파는 가게들을 차를 타고 가면서 볼 수 있었다. 하필 왜 유리공예가 발달했을까 싶어 물어보니, 도야마의 제약산업과 관련이 있었다. 도야마는 예로부터 약 제조·판매로 유명한 도시였다. 그래서 약을 유리병에 담아 보관, 판매한 덕택에 유리제조업이 자연스레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포장방식이 변화하면서 유리제조업이 위축되었지만 유리를 만들던 일부 공예가들이 도야마에 남아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했다.


미술관은 건축가 쿠마 켄고가 디자인한 것으로, 잘 모르는 사람이 밖에서 봐도 '저게 유리 미술관'이겠거니, 하고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색적인 건물 외부만큼 유리와 거울, 나무를 이용한 건물 내부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나무는 길이, 폭, 두께 등이 제각각이었는데 그런 불규칙성이 묘하게 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건물의 4층과 6층은 전시장으로, 현대 유리공예의 거장인 Dale Chihuly(미국)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조명을 받아 더 화려한 색감과 이색적인 유리의 느낌에 감탄하며 열심히 사진을 찍었던 것 같다. 건물 2층에는 아트상품 숍과 카페가, 3층과 5층에는 도야마 시립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시립도서관이 별도 공간이 아닌 미술관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생소했는데, 평일인데도 이용객들이 붐비는 것을 보고 내심 감탄했다. 중학생 여자아이들도 방과 후에 편안하게 올 수 있는 미술관과 도서관.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파고든 예술 공간은 자연스레 그 도시의 브랜드가 되기에 충분했다. 나도 그 틈에 끼여 일행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될 때 까지 책을 훑어보고 메모를 했다.


첫날 마지막 일정인 도야마 현립 근대미술관은 마침 휴관이었다. 전시 관람을 할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미술관의 옥상으로 향했다. 하지만 세 번째의 미술관 답사를 통해 '현'이라는 행정구역 안에 수묵미술관 뿐만 아니라 근대 미술관, 유리미술관 등 시민을 위한 공공문화시설이 다양하게 갖춰져 있는 것이 새삼 부러워지면서도 '우리는 시립미술관 하나도 갖기가 힘든데' 하는 생각에 괜히 심술이 났다.


기행의 안내를 맡은 구선생님이 버스에서 도야마의 하천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해주셨는데, 막상 미술관의 옥상에 올라와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미술관 옥상은 일종의 전망대처럼 여러 개의 하천을 끼고 있는 도야마의 아름다운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도야마의 하천은 도심 속 수변공원으로 잘 가꾸어져 있었으며, 범람으로 인해 이동식 보를 설치하고 수해에 대비한 흔적이 보였다. 도시 전체가 물길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 같다는 느낌을 주었는데, 단순히 기능적인 도심하천정비가 아니라 시민들이 사랑하는 쉼터로서 톡톡히 자리매김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둘째 날, 가나자와
이튿날, 아침식사를 마치고 산책 겸 가나자와의 명물 '겐로쿠엔'을 돌아보기로 했다. 겐로쿠엔은 전통을 자랑하는 일본 3대 공원으로 1596년 가나자와성의 외부정원이다. 그 후 계속 확장하여 현재와 같이 완성되었다. 정원의 명칭은 여섯 가지 승경을 겸한 명원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나중에 오오바 교수님이 알려주신 바로는 정원을 중심으로 해서 도시가 형성되었을 정도라고.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 바쁜 걸음으로 겐로쿠엔을 돌아봤는데, 이곳에서도 다실체험을 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겐로쿠엔이 지역에서도 굉장히 사랑받는 곳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는데, 겨울에 나뭇가지마다 눈으로 인해 피해를 입지 않도록 끈으로 묶는 작업이 매년 지역 뉴스에 나올 정도라고 한다.

겐로쿠엔을 다녀와서 오오바 교수님을 만나뵈었다. 오오바 교수님은 가나자와와 전주가 자매도시 결연을 맺으면서 전주에 방문하신 적이 있다고 하는데, 더운 날씨에도 직접 가나자와역을 구석구석 안내해주시며 설명해주시는 모습에서 가나자와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사 중 하나로 꼽히는 가나자와역은 전통예술을 이미지화한 쓰즈미문과 역의 기둥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역안의 기둥은 가나자와의 대표적인 전통공예로 꾸며져 있었으며 역 구내에는 이시카와현의 다양한 전통공예품을 갤러리처럼 전시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신칸센 대합실의 공예품이 수납된 벽돌과 화장실 앞의 명장의 화려한 작품까지, 터미널 하나도 지역의 문화자원과 더불어 콘텐츠화하는 그들의 방식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가자나와역을 나와 시이노키교류회관으로 이동하여 오오바교수님의 강의를 들었다. 옛 현청이었던 시이노키 교류회관은 반은 옛 건물 그대로, 반은 현대적으로 리모델링하여  반절로 나뉜 그 경계가 특이했다. 강의를 들으며 가나자와를 돌아다보면서 의문이었던 점은 공예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지역인 만큼, 공예가 예술의 하위영역으로서가 아닌 독자적 영역으로 존중받고 있는지, 지역사회의 경제구조에서 공예산업의 위치와 시스템이었다. 오오바 교수님은 일본이 경기침체를 겪으면서 공예에 기반 한 기업들의 매출이 급감했으며, 현재 젊은 작가들에게 다른 지역의 '안테나 숍' 등을 지원하는 이루어지고 있다는 답변을 해 주셨다. 그 답변을 토대로 가나자와 지역에서의 공예, 그리고 공예를 기반으로 한 기업들의 지역사회에서의 위상과 안테나 숍 등 판로를 개척해야 하는 젊은 공예작가들의 상황을 나름대로 유추해볼 수 있었다.


점심식사 이후 들린 이시카와 현립 역사박물관은 옛 육군 병기고였다. 마치 중세 유럽의 성을 연상케 하는 철문부터 근데 군데 병기고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는데, 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가나자와미술공예대학으로 사용되다가 1986년 현립 역사방물관으로 개관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문화재생사례라고도 할 수 있지만 창건 당시의 모습을 충실히 복원하고 그 공간을 이시카와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 전하는 공간이자, 주민들의 문화시설로서 자리매김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인근의 21세기 미술관은 마침 80년대 일본 현대미술전이 열리고 있었다. 당시 미술작품들을 보는 것은 얼핏 난해한 부분도 있었지만 도시를 향해 열린 공원 같은 미술관이라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이었다. 가나자와시의 중심부에 있어 누구나 쉽게 들를 수 있고 다양한 체험과 만남의 장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21세기 미술관은 다른 미술관과는 다른 스타일로 주목을 받고 있다. 편안함과 즐거움, 편리함을 추구하는 21세기 미술관은 실제로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하는, 생활 속의 미술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 방문했던 스즈키 다이세츠 기념관은 건축물로도 유명한데, 가나자와의 불교 철학자인 스즈키 다이세츠의 사상과 일생을 공감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불교의 선을 서양에 처음 소개한 스즈키 다이세츠는 군국주의를 옹호하는 지식인이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그의 기념관만큼은 정말이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시-학습-사색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의 느낌은 차분하고도 철학이 반영되어 있었는데, 그저 건축스타일만 카피 해 놓은 것과는 우리나라의 사례와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다음으로 들린 히가치차야 거리. 일명 '요정거리'라고도 불리는 히가치차야 거리는 국가가 지정한 역사적 거리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거리에 비해 안의 상점들은 비슷한 상품들과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고 있어 쇠락하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전형적으로  자본이 만든 관광지가 겪는 흥망성쇄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느낌이 들었다. 한 도시 안에서 도시 재생에 관련된 다양한 사례를 볼 수 있어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재미있는 여정이었다.


세 번째 날, 가나자와-후쿠이-사바에-에치젠-마이즈루
셋째 날, 어제 미처 가보지 못했던 가나자와 시민예술촌을 아침 일찍 방문했다. 이른 시간임에도 시민예술촌을 찾는 시민들이 꽤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진행하고 있는 '폐산업시설 문화재생사업'을 말할 때 대표적인 해외 사례로 꼽히는 시민예술촌. 외양만 보면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재생 사례라고 보기에는 외려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가나자와의 시민예술촌은 문화공간을 활용한 가나자와의 도시 재생전략의 중심축으로, 도시의 문화자원을 활용해 전통문화유산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한편, 현대에 맞는 새로운 문화를 재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당초 다이와 방적 주식회사의 창고단지였던 이 곳은, 시민들의 의견에 따라 문화공간으로 재편했으며 가나자와 시민 뿐 아니라 국내외 신청자 누구나 문화예술을 접하고 연습할 수 있도록 공간을 대여하고 있다.


가나자와 시는 시민예술촌에 한해 1억 7천만엔 가량을 지원하는데, 안내하는 분께 물어보니 시민들이 꽤 많이 이용하기는 하지만 이곳을 이용하는 숫자보다 시민을 위한 가치와 문화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예산을 배정하고 있었다. 해외 사례라고 프로그램 운영이나 외관만 벤치마킹할 것이 아니라 이런 점들을 벤치 마킹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뼈아픈 아쉬움이 들었다. 한정된 예산을 배분하는데 있어 사용하는 사람의 수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시가 문화재생을 통해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가가 아닐까? 누구를, 무엇을 위한 문화재생인지가 한 번 더 돌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셋째 날은 이동거리가 꽤 길었다. 가나자와에서 후쿠이의 에이헤이치 절, 사바에의 안경박물관과 에치젠의 칠기마을, 타케후의 종이마을, 에치젠의 칼마을 등을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구불구불 산길이 이어진 후쿠이는 숲이 울창한 곳으로,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에 나올 법한 풍경이 이어졌다. 풍경을 감상하다가 왜 자꾸 이런 산골로 들어가는 걸까 싶어 책자를 유심히 보니, 이 작은 도시가 일본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지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에이헤이치 절과 안경박물관, 칠기마을, 종이마을과 칼 마을 등 작은 마을과 도시가 어떻게 자기만의 콘텐츠를 이어나가고 브랜드화 시키는 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노력은 안경산업부터 칠기에 이르기까지 제조업을 살리고 일자리를 만들어내면서 후쿠이가 저출산, 고령화를 극복하고 있는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작은 도시를 둘러보며, 이러한 눈부신 성과는 어쩌면 '규모의 경제'처럼 큰 도시가 아닌 '작은 도시'여서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문득 생각이 들었다. 교육과 일자리가 해결되니 오순도순 사는 작은 도시에 대한 만족도가 올라가고 그것이 사람을 모으는 선순환 구조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후쿠이는 도시재생과 산업, 문화의 연계구조를 만들어 낸 것이다.


넷째 날, 쓰루가-마이즈루
사흘간의 빡빡한 일정덕분인지 넷째 날은 제법 여유 있는 일정이었다. 넷째 날 맞이한 마이즈루는 교토부의 북쪽에 있는 항구도시로 해군기지가 있었던 곳으로 가나자와에 비해서 시가지나 건물들이 조금은 쇠락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오전에 방문한 '붉은 벽돌 파크'는 옛 해군의 건물로 오래된 건물을 쉽게 부수지 않고 재생을 통해 시민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이용해 오고 있다는 점에서 그다지 특색은 없지만 문화재생사례로 참고할 만 했다. 하지만 다음으로 방문한 '붉은 벽돌 박물관'은 마이즈루 해군의 어뢰창고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철골벽돌건물이었다. 이 의미를 살려 '세계 벽돌박물관'을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굳이 일본이 '세계' 벽돌박물관이라는 타이틀을 단 것에 대해 의아했으나 세계 유적지의 벽돌들을 한 곳에 모았다는 점에서 실로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또한 거기에는 히로시마의 벽돌도 있었는데, 설명해주시는 분이 '이 벽돌은 그때의 빛을 기억하고 있다'는 다소 시적인 표현을 해주셔서 우리 일행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차를 타고 아마노하시다테 와이너리로 향하는 길, 바닷가와 포도밭이 어우러진 풍경이 새삼 이국적이었다. 이 곳의 기후가 포도농사에 적합할까? 하는 의문이 들어 물어보니, 포도가 자라는데 유럽의 지방처럼 아주 최적의 조건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일본에서 뛰어난 풍미를 자랑하는 포도들이 재배되고 있다고 했다. 와이너리에는 와인 말고도 포도씨로 만든 음료와 코르크 마개를 이용한 앙증맞은 소품들이 다양하게 갖춰져 있었다. 우리는 와이너리 2층의 '포도밭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뒤, '이네 후나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물 위의 집들이 풍경처럼 아름답다는 '이네 후나야'는 '이네'라는 지역에 위치한 수상가옥이다. 이곳에는 230여채의 후나야가 바다에 접하고 있었는데, 그 규모에 비해 바다는 매우 깨끗하고 잔잔했다. 우리가 이네 후나야를 찾아간 날은 공교롭게도 축제날이어서 잠깐 행렬을 구경하기도 했는데, 전통을 지키면서 작은 마을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이네 후나야의 풍경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마이즈루로 돌아와 맞이한 저녁시간, 깜짝 생일파티가 있었다. 여행을 시작하며 일행과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어색함을 떨치려 '이번 생일은 일본에서 맞을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었는데, 정말 같이 간 일행 모든 분에게 생일 축하를 받게 된 것이다. 거기다가 같이 간 김은정 국장님은 생일선물을, 유신욱 대표님은 숙소로 돌아오며 직접 만든 풀꽃 꽃다발을 안겨주셨다. 아침에 '편의점에서라도 미역국 사 먹어라'라는 문자를 집에서 받긴 했지만 귀찮아서 내버려 두고 있었는데, 바쁜 일정에도 생일을 챙겨주시고 따뜻한 축하에 감동적인 저녁을 맞이했다. 비록 태풍 소식이 보도되고 있었지만, 어쨌든 일본에서 맞는 서른여섯 번째 생일은 굉장했다.


다섯째 날, 마이즈루-교토-간사이
간밤 태풍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일기예보에도 불구하고 원래 가기로 했던 미호 뮤지엄은 안타깝게도 재해를 대비해서 운영하지 않는다고 통보해왔다. 아쉬웠지만 대신 우리 일행은 교토 근대미술관과 후시미 겟케이칸 기념관을 방문하기로 했다. 우리와는 달리 도심 속 누구나 가기 쉬운 미술관의 위치와 소장작품들이 퍽 인상적이었다. 미술관 답사 후 '월계관'으로도 알려진 후시미 겟케이칸 기념관에 들렀다.


후시미 겟케이칸은 예로부터 좋은 물이 나기로 유명하며, 또한 술의 마을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무로마치시대때무터 술을 빚어왔다는 후시미에는 스물 여섯 곳의 양조장이 있다. 그 중에서도 외국인들에게 일본 술의 대명사를 '겟케이칸'으로 바꾸어 버릴 정도로 유명한 이 곳은 1637년 창업한 이래 일본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되었다고 한다. 술을 담그는 도구부터 홍보 포스터까지 꼼꼼하게 채워진 기념관을 보니 일본사람들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그것을 이어나가려는 노력, 문화브랜드로서의 저력이 느껴졌다.


공항에 도착하니 벌써 오후 6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전주에는 자정 무렵에야 도착하겠지만, 비행기가 뜨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생각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일정이 끝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번 일본에서의 기행은 도시재생, 그리고 문화재생에 대해 현장에서 얻을 수 있는 울림을 주는 기회였다. 도시재생이 계획자들의 단순한 경관사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시와 문화콘텐츠, 그리고 산업의 영역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었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시민들을 위한 도시를 위한 재생, 가치에 투자하는 재생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소도시들의 도시재생 사례를 보며 좋은 점 뿐만 아니라 도시의 명암을 다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매우 뜻 깊었다. 4박 5일, 짧다고 하면 짧고 길다고 하면 긴 일정이었지만 나에게는 여러 가지를 보고 배울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새로운 분들과 함께 하며 부족한 나에게 따뜻한 축하를 건네주시고 챙겨주신 일행분들게 감사를 드리며, 이 자리를 빌어 이번 기행에 애써주신 마당 관계자분들께도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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