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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3 | 연재 [여행유감]
죽어도 좋아?
김사은의 여행, 인도에서 백두산까지
김사은(2019-03-22 16:42:40)

인도의 타지마할이 최악의 미세먼지로 부식되고 있다는 뉴스를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웠다. 10여 년 전 인도에 간 것은 '출장'이지 '여행'이 아니었으므로 기회가 된다면 제대로 된 '인도 여행'을 하리라는 바람이 있었다. 그 가운데 타지마할은 반드시 가야 할 곳이었다. 수려한 외관은 물론이거니와 왕비에 대한 왕의 애틋한 사랑은 구석구석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대리석을 달군 햇볕이 야무나 강 저편으로 물결 따라 느릿느릿 사라져 갈 때, 맨발과 조우한 대리석은 미지근한 온도로 제 몸을 들이대었다. 그 교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미처 마침표를 찍지 못한 그것과의 미련이 남아서 언제든 다시 가고픈 여행지로 남아있었는데, 이제는 미세먼지의 공포가 타지마할의 신비로움을 잠식하고 있다니 속상하다.



인도는 다양성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롭거나 종교적, 내적 성찰을 이유로 가보고 싶은 나라로 꼽히지만, 내게는 좀 더 특별한 인연이 있다. 바로 삶과 죽음의 공존성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취재차 동행하게 된 인도와 네팔 출장은 성지 순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참석자 대부분은 부처님을 향한 간절한 구도의 여정이었고 그중 몇 명은 지인들의 권유로 함께한 여행길이었다. 여행은 설레고 순례는 경건하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긴장하고 숙연했다. 그러하였으니 이 모임의 책임자는 막강한 부담감으로 더욱 고뇌했으리라. 게다가 종교적 순례의 목적으로 먼 길을 나선 사람들은 고 연령자가 대부분이었다. 어쩌면 마지막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여행에 합류했을 것이다.
80대의 '그분'은 더욱 진지한 표정이었다. 여행기간 중 새벽 예회에도 꼬박 참석했고 금강경 설법을 들으면서 정말 행복해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유독 '그분'이 기억되는 것은 바라나시로 가는 델리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면서 했던 인상적인 인터뷰 때문이다. 하염없이 지연되는 기차를 기다리면서도 갠지스를 간다는 기대감으로 상기되어있던 '그분'은 인터뷰에서 "자식들이 걱정했지만 너무도 가고 싶었던 부처님의 나라에 간다고 하니까, 어머니를 잘 이해해줘서 고맙고, 인도에 와서 정말 행복하다."면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명랑하게 말했다. 목소리에 묻어나는 기쁨과 행복감은 어떤 기계적 '이펙트'보다 강렬하고 진솔했다.
기차는 밤새도록 달려서 어스름한 새벽, 우리를 바라나시에 내려놓았다. 주최 측은 여행자를 배려해서 짐꾼을 하나씩 붙였는데, 어두침침한 역사에서 나의 캐리어를 짊어진 짐꾼을 찾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흡사 전쟁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분주하고 복잡했다. 그 사이 어떤 할머니가 쓰러졌다는 말이 바람결에 들렸으나 확인할 겨를도 없이 일행을 따라 이동해야 했다. 갠지스의 일출을 보고 돌아올 무렵, '그분'이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했는데 사망했다는 전언이 있었다. 사인死因은 심장마비였다. '그분'은 기차에서도 행복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고 저녁으로 나온 김밥도 맛있게 잘 드셨다고 했다. 그러나 연세도 많은 데다 긴장감을 벗어나지 못해 강박감을 가지셨던 것은 아닐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분'의 동생이 동행해서 법적인 부분도 잘 마무리되었고 가족들의 동의하에 갠지스에서 제일 좋은 화장터에서 화장을 마쳤다.
일행은, '그분'이 복을 많이 지으셨기에 그토록 원하던 부처님의 나라에서 열반에 드시어 가장 좋은 예우를 받게 되었다고 위로했다. 평소 공부심으로 죽음 준비를 잘 해오셨고 고통 없이 생을 마감하신 것도 축복했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며칠 전까지 "엄마 건강하게 여행 잘 다녀오세요."라고 인사하며 여행비도 두둑하게 넣어줬을 자녀들에게는 모친의 사망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나의 녹음기에는 마침 그분의 최후 육성이 담겨있었다. 49제를 앞두고 '그분'의 육성을 편집해서 유가족에게 보내드렸다. 가족들은 어머니의 마지막 목소리를 들으면서 오열했지만 "정말 행복하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고인의 두 마디는 비통해 하는 가족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서야 비로소 어머니를 편하게 보내드릴 수 있었다고 했다. 나는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김 PD가 큰 덕을 쌓았다.'고 치하까지 받게 되니 송구하고 민망했으나 어쩌면  '그분'도 좋아하실 것 같아 다행이었다. 생각하면, 기차를 기다리던 그 순간, 어떻게  '그분'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는지, '그분'은 또 어쩌면 그렇게 풍성한 감정을 담아 마음을 표현해주셨는지 그 우연 아닌 필연에 놀라울 따름이다.


인도 출장은 나에게 여행의 개념을 확 바꾸어 놓았다. 일단 여행에서 일절 불평불만이 사라졌다. 감사함의 연속이다. 계획을 세우고 일행이 모여서 출발하기까지 준비과정을 거치는 동안, 무리 없이 여행을 떠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변수에도 불구하고 우리 일행 중 누군가가 변고 없이 합류하게 된 기적을 감사한다. 리무진 버스가 공항에 도착하여 출국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탑승한 것도 감사한다. 그 비행기가 하늘 길을 달려 목적지에 잘 내려놓아 준 것도 감사한다. 짧거나 길거나 여행기간 동안 좋은 구경 시켜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즐겁게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한다.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니, 패키지에서 싼 것은 싼값대로 비싼 것은 비싼 대로 이유가 있는 셈이라고 생각하면 싼 것은 싸서 좋고, 비싼 것은 그만한 차별성이 있어서 좋다. 자유여행 또한 그만큼 치러야 할 대가가 있는 법이니 여행비는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늘 하는 얘기지만 기대감이 없으면 만족감이 높다. 그래서 나는 내 여행은 언제나 흑자라고 믿는다.
인도 여행에서 얻은 두 번째 교훈은, 위에서 언급한 삶과 죽음의 공존이다. 여행 계획을 세우고 휴가를 내고 그에 맞춰 녹음하고 밀린 일을 하다 보면 대부분 밤잠을 설치며 짐을 싸게 된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여권을 확인하고 캐리어를 닫는 순간, 내 뒷자리를 돌아보면 느낌이 묘하다. 어쩌면 내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이 순간이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다시 한 번 뒷정리를 하게 된다.


4년 전, 유방암 수술을 하고 난 후부터는 여행을 대하는 태도가 훨씬 경건해진 것 같다. '암'이라는 난제에 부딪쳐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힘든 고비를 만나고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죽음과 한발 더 가까워졌다. '암' 이후에 펼쳐질 다양한 인생의 경로를 생각해보고 낙망과 희망, 두려움과 평상심의 저울을 수없이 들이댔다. 그에 앞서 공교롭게도 내가 가장 사랑하고 신뢰하던 후배와 선배가 6개월 간격으로 나란히 암으로 세상을 떠났기에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선배는 인도를 좋아했고, 후배는 백두산에 가보고 싶어 했다. 함께 인도에 가자는 선배와의 약속도 지키지 못했고 백두산에 같이 가자는 후배와의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그때 우리는 "빨리 나아서 같이 여행 가야지."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웠으나 두 사람은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인도보다 멀고 백두산보다 높은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나는 휴직을 하고 수술에 이어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받기로 했다. 1년여의 천금 같은 휴가가 주어졌으나 항암 부작용이 우려되었기에 감히 여행은 상상도 못 할 상황이었다. 제일 무서운 것은 고열, 폐렴과 같은 것인데 담당의사는 소견서를 써주면서 잘 보관하고 있다가 열이 나면 무조건 종합병원 응급실로 가야 한다고 당부했었다. 다행히 병원 응급실로 가야 할 만큼 열이 오르지는 않았지만 그해 공포의 메르스가 죽치고 있어서 공공장소도 피해야 했다. 그즈음 지인이 저렴한 비용으로 백두산을 갈 수 있다고 정보를 보내왔는데 남편이 덜컥 가겠다고 손을 들었다. 군에 입대한 큰 아들을 제외하고 남편과 둘째 아들이 함께 하는 가족여행이 되었다. 든든한(?) 보호자가 둘이나 있으니 까짓 거 도전해보자는 심정으로 4차 항암을 앞두고 용기를 냈다. 1,442계단을 올라서 천지까지 가는 서파 코스였다. 건강한 사람은 바람처럼 오르내릴 수 있지만, 나는 천근만근 돌덩어리를 다리에 매달고 가는 것 같다. 안타깝게 바라보는 남편을 먼저 보내고 쉬엄쉬엄 한 계단씩 올랐다.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라는 말은 명언이다. 아래에서 올려 볼 때는 하늘로 오르는 듯 까마득한 천상의 길이더니,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니 어느덧 100, 500, 700 숫자가 사라지고 1,000계단이 눈앞이다. 일행 중 다른 팀은 벌써 천지를 보고 내려가는 길이라고 했다. 날씨가 변덕이어서 언제 구름에 가릴지 모른다는 말을 남기고 바람처럼 가뿐히 내려갔다. 그들의 건강함이 부러웠다. 드디어 천지가 눈앞에 보이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그토록 백두산에 오고 싶어 했던 후배가 더욱 그리웠다. 둘 다 건강했을 때 함께 왔더라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여행이 되었을까, 그렇게 하지 못함이 후회되고 안타까웠다. 비록 암을 달고 왔지만 천지에 이르게 되니 감개무량했다. 천지는 아픔과 힘든 경계를 다 안 다는 듯, 모든 것을 품어주겠다는 듯 아낌없이 푸른 속내를 보여주었다. 가족과 함께 장관을 볼 수 있어 더욱 감사했다.


나의 여행은 감동의 연속이다.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디에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인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은 명언 중의 명언이다. 암 투병 이후 가족과의 여행을 제1순위로 올리고 중국, 일본, 베트남, 동유럽 등을 다녀왔다. 큰 아들이 제대해서 함께 할 수 있어 더욱 기뻤다. 그리고 소중한 나의 여행의 동반자들과 함께 또다른 여행의 꿈을 그리고 있다. 나는 짐을 싸면서, 혹은 여행지에서 스스로에게 자주 묻는다.


"지금 행복해? 지금 여기서 죽어도 좋아? 그러면 성공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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