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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규범적 돌봄 관계를 넘어 견고한 연대로
욕창
김경태(2020-11-06 14:14:25)



규범적 돌봄 관계를 넘어

견고한 연대로
글 김경태 영화평론가



퇴직 공무원인 ‘창식(김종구)’은 뇌출혈로 쓰러진 아내 ‘길순(전국향)’의 간병인이자 집안을 돌보는 가정부인, 조선족 출신의 불법체류자인 ‘수옥(강애심)’과 함께 살고 있다. 그는 홀로 거동은커녕 대화조차 할 수 없는 아내를 대신에 집안에 활기를 불어넣는 수옥의 살가운 성격이 만족스러운 듯하다. 창식의 딸 ‘지수(김도영)’는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고 의심을 하면서 홀로 술을 마시기 일쑤다. 그로 인해 예민해진 지수는 욕창 치료에 미숙한 수옥을 차갑게 대하고 그녀를 감싸는 아버지가 못마땅하다. 한편, 과일가게를 하는 장남 ‘문수(김재록)’는 자신보다 미국으로 유학을 간 남동생에게 훨씬 더 많은 돈을 ‘투자’한 아버지를 평생 원망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창식은 차라리, 비록 월급을 받고 하는 일이더라도, 수다스럽게 자신을 챙겨주는 수옥에게서 정서적 안정을 찾는다.


수옥은 서툴지만 나름 열심히 창식의 아내를 돌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사적 욕망을 적당히 채울 줄 아는 넉살을 지녔다. 보고 싶은 드라마가 있으면 당당히 말하며 TV 채널을 돌리기도 하고, 남자를 만나러 나가기 위한 치장을 할 때는 수옥의 옷장에서 스카프를 몰래 빼내서 두르기도 한다. 즉, 영화는 그녀를 계급적 편견에 따라 일방적인 연민의 대상, 혹은 경계의 대상으로 묘사할 의도가 없다.


수옥의 돌봄 노동은 대가가 지불되기 때문에 그녀가 들이는 ‘정성’에는 늘 의심의 눈초리가 따라다닌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그녀가 아무리 열심히 아내와 창식을 돌보더라도 그것은 지불한 임금에 따라 그들이 누려야 할 권리일 뿐이다. 그리고 이미 그 돌봄 노동의 대가는 시장의 평균 가격보다 저렴하기에 사용자 입장에서도 그녀는 쉬이 포기할 수 없는 ‘가성비 좋은’ 근로자이다. 그래서 그녀가 그만둔다고 했을 때, 기분을 맞춰주면 붙잡을 수밖에 없다. 또한 수옥은 불법 체류자이기에, 부당하게 해고되었지만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요구할 수 없다.



창식은 수옥이 주말마다 외출하며 남자를 만난다는 사실을 알고 질투심에 미행을 한다. 그러한 낯선 감정들이 개입할 때, 고용주와 고용인이라는 시장적 관계에는 균열이 발생한다. 이제 돌봄 노동은 상품으로서의 규정된 가치 이상의 잉여 효과를 내게 된 것이다. 급기야 수옥이 비자를 얻기 위해 위장 결혼을 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자, 창식은 그녀를 붙잡기 위해 자신과의 혼인을 제안한다. 아내와 수옥,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내린 완고한 결심이다. 그것은 계급을 초월한 연대로 나아가려는 진정한 환대의 몸짓이다. 또한 요양원에 보내려는 자식들의 뜻에 맞서며 자신이 끝까지 아내를 책임지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기도 하다. 창식은 외부의 도덕적 시선을 의식하기보다는, 가족의 경계를 넘어 현재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윤리적 결단을 내린다. 그러나 아내를 돌보기 위해 이혼을 한다는 것은 자식들에게 모순된 주장처럼 들릴 뿐이다. 그들이 볼 때 아무런 자격이 없는 수옥에게 넘어갈 어머니의 자리, 나아가 아버지의 유산이 걱정일 뿐이다. 결국 자식들이 달려들어 그 불온한 욕망에 제동을 건다.



그들의 결이 녹록지 않은 현실의 벽에 가로막혔을 때, 창식은 수옥에게 손을 내밀며 춤을 권한다. 그들은 서로의 몸을 감싸 안고서 평소 수옥이 즐겨듣는 트로트 음악에 맞춰 위로의 춤을 춘다. 수옥은 그의 어깨에 기댄 채 서러운 울음을 운다. 이제 누구도 그들의 관계를 ‘불륜’이라며 쉬이 손가락질할 수 없다. 애초에 수옥은 그 가족 안의 그 어떤 규범적 자리도, 그 어떤 부당한 금전적 혜택도 누릴 의사가 없었다. 또한 수옥을 향한 창식의 마음은 더 이상 연민이나 애정과 같은 세속적 욕망의 테두리에 가둘 수 없다. 그 관계의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은 단단한 결속으로 나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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