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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3 | 연재 [이휘현의 책이야기]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페스트’를 마주하다
알베르 카뮈 <페스트>
이휘현(2020-03-06 11:54:23)



지은이 알베르 카뮈
출판사 민음사


우한발 신종 바이러스의 창궐은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기세등등하다.
각종 언론에서는 속보로 지난 하루 동안 사망한 사람들의 숫자를 매일 업데이트한다. 오늘 아침 포털 사이트는 ‘중국 후베이성 하루 사망 93명’이라는 텍스트를 띄웠다. 이 소식을 접하는 사람들의 첫 반응은 대개 이렇다. ‘다른 날보다는 숫자가 적구나!’
이제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감정이 없어 보인다. 매일매일 주식시세를 확인하듯, 전날 스포츠 경기 결과를 검색하듯, 그렇게 사망자의 숫자를 바라본다.


공포가 하나의 일상으로 자연스레 스며들면서 사람들은 다소 무감각한 시선으로 이 전 지구적 재앙을 관망하고 있다. 다소의 불편함이 일상의 평범함을 삐거덕거리게 하고, 창궐 초기 순수한 공포 속에서 음험하게 싹을 틔운 악이 우리 마음속 어딘가 웅크리고 있던 혐오와 차별의 본능을 깨워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그 사이 어느 도시에선가는 매일 많은 개별의 삶들이, 누군가의 가족이자 친구이고 또 앞날에 대한 각자의 계획을 가지고 살아가던 실존들이 파괴되어 간다. ‘나’라고 명명되던 우주들이 그렇게 죽음이라는 블랙홀로 무참히 쓸려가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그냥 개량화된 수치의 스펙터클로 목도한다. 어쩌면 그것이 2020년 스마트 시대를 살아간다고 자부하는 인류의 일그러진 거울이 아닐까.


어젯밤 나는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완독했다. 20년 전 첫 번째 독서도, 작년 두 번째 독서도, 3분의 1 혹은 중간 즈음에서 멈춘 게 이 장편소설이었다. 할 일은 많고 책 읽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게 중도 포기의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지금 와서 이 소설을 다 읽고 생각해 보니 그것은 핑계가 아니었나 싶다. 나는 그냥 이 작품이 가진 복잡함이 번거로웠던 것 같다. 거대한 재앙을 마주한 인간의 나약함과 그 안에서 펼쳐지는 여러 복잡한 감정들을 나는 애써 외면하고 싶었을 것이다. 코로나19의 창궐이라는 대재난 앞에서 나는 어떤 절박함에 붙들려 카뮈의 <페스트>를 읽었던 것 같다. 죽음과 고립이라는 중국 우한의 절망적인 상황을 바라보면서도, 어느 순간 문득문득 고개를 쳐드는 내 안의 본능적인 혐오와 인종주의가 당혹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닌, 전지구의 다양한 사람들에게 파고드는 이 악은 어찌하여 사랑과 연대로 정의되는 것들 앞에서 이리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일까. 소설 <페스트>가 이 물음에 명쾌한 해답을 제시했을 리는 만무하다. 나 또한 애초에 그런 의도보다는 그저 나의 부끄러운 민낯을 마주하고 싶은 일종의 염치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나는 카뮈의 <페스트>와 마주했다.


소설 속 배경이 되는 공간은 ‘오랑’이라는 알제리의 소도시다. 인구 수십만의 인구가 오밀조밀 모여 사는 이곳은 가상의 공간이 아니다. 알제리에 실재하는 지역이자 카뮈가 <페스트>를 집필하기 전 약 2년 정도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페스트가 창궐한다. 처음에는 죽은 쥐들이 발견되더니, 몇몇 사람들이 쓰러지기 시작한다. 오랑 시민들은 별것 아니라는 듯 평범한 일상을 이어간다. 어느 날부턴가 사망자의 숫자가 폭증하고 도시에는 계엄령이 선포된다. 오랑은 그렇게 주변 도시들로부터 고립되고, 페스트라는 전대미문의 재난 앞에서 시민들은 몹시 당황한다.


총 5부로 구성된 이 이야기는 페스트의 창궐과 극복이라는 극적인 플롯을 따라 유려하게 흘러간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다양한 군상들이 등장한다. 소설의 서술자이자 주인공이기도 한 의사 리유, 그와 보건대를 조직해 페스트와 맞서 싸우는 타루,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이지만 의연히 정의로운 자가 되기를 자처한 관청직원 그랑. 취재 차 오랑에 왔다가 갇히게 된 신문기자 랑베르, 페스트가 신의 뜻이라며 종교의 초월적 힘을 설파하는 파늘류 신부, 이 혼란 자체를 좋은 시절로 누리려 하는 악인 코타르 등등.
언뜻 보이는 이러한 캐릭터 나열을 통해 우리는 굉장히 통쾌하고 선악이 분명한 대중적인 플롯을 기대할지도 모른다. 카뮈는 그러한 기대감에 호응하지 않는다. 페스트 창궐이라는 전대미문의 재난 앞에서 모든 이들은 다 나약하다. 완벽한 선도 없고 악도 없다. 소설은 끝나지만 섣불리 희망을 설파하지도 않는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독자에게 밀려오는 감정은 복잡미묘함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이방인> 못지않게 카뮈에게 대중적인 호응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바로 그러한 모호함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현실에 영웅은 없다. 이 모든 재난을 한 방에 해결할 만한 신박한 해결책도 없다. 다만 그렇게 각자 부족한 인간들이 ‘연대’라는 힘을 통해 그들 앞에 당면한 어려운 문제와 부딪혀 나갈 뿐이다. 그 지난한 과정은, 그러나 소설적 낭만이 아니라 냉정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해서 묵묵히 발걸음을 내딛는다.


1947년에 발표된 이 소설이 2020년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에게 공명하는 것은, 시간이 흐르고 인류의 문명이 ‘진보’라는 이름 하에 끊임없이 발전을 거듭해왔으면서도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되는 다양한 모순들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안녕과 질서라는 이름으로 진실을 은폐하거나 축소하려는 고위 관료들, 타락에 대한 응징이라는 이름으로 신의 권위를 설파하는 사제들, 부조리한 현실의 빈틈 속으로 촉수를 뻗치는 악, 오로지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 공동체의 환난을 회피하는 무수한 개인들. 70여 년 전 카뮈가 수많은 상징으로 형상화한 이 인물군상의 만화경은 시간을 초월해, 수많은 재난과 불행 상황 속에서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말했듯 카뮈는 <페스트>를 통해 섣부른 희망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도저한 허무의 허방에 독자를 밀어 넣지도 않는다. 공동체에 관한 누군가들의 헌신, 자유와 행복 추구로 대표되는 개인의 의지, 어떤 이든 쉽게 노출될 수 있는 악의 유혹 그 사이의 어딘가에서 조심스레 상처투성이의 희망을 꺼내놓는다. 하지만 그 희망이란 언제든 쉽게 깨질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 복잡한 세계인식이 카뮈 문학의 진수이자, 긴 시간이 흘렀어도 우리에게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가 아닐까.


글 이휘현 KBS전주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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