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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9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감정의 깊이를 헤아리는 관계, 서로의 삶을 구원하다
소년시절의 너
김경태(2020-09-14 16:55:34)

보는 영화 읽는 영화 | 소년시절의 너


감정의 깊이를 헤아리는 관계,
서로의 삶을 구원하다

글 김경태 영화평론가


학교에서 재수 중인 ‘첸니엔(주동우)’은 빚쟁이에게 쫓기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며 공부에 매진한다. 그녀는 좋은 대학에 가는 것만이 현재의 가난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교우 관계에는 안중이 없다. 어느 날, 왕따를 당하던 반 친구가 학교 건물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한다. 카메라는 그 친구의 죽음을 자세히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교실을 빠져나온 첸니엔은 그 친구의 고통을 외면했던 지난날에 대해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윗옷으로 친구를 덮어주는 모습을 따라간다. 반면에 다른 학생들은 그녀와 달리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웅성거리며 구경하거나 핸드폰으로 촬영을 하고 호들갑 떨며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아무도 그 곁에 다가가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 순간, 정작 관객에게 충격을 던지는 장면은 바닥에 피를 흘리며 널브러진 학생의 시신이 아니라 방관자가 되어 그 주변을 둘러싼 무덤덤한 표정의 학생들이다.



이처럼 어떤 감정의 결여가 학교를 지배하고 있다. 감정적 동요를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로 보는 입시 위주의 교육이 그 원인이다. 그 안에서 첸니엔의 감정들은 억눌러진 만큼 점차 과잉된다. 그걸 들켜버린 그녀는 다음 표적이 되어 괴롭힘을 당한다. 그나마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는 친구들은 그저 조금만 참으라고 말할 뿐이다. 미래의 학벌을 위해 현재의 감정을 부정하고 지워내야 한다. 참다못한 첸니엔은 경찰에 신고를 해서 친구의 왕따 사건을 증언하면서 일부 가해 학생들이 정학을 당한다. 그녀의 양심을 따른 선택은 결국 더욱 가혹한 보복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자신이 도움을 준 적이 있는 불량배 소년 ‘베이(이양천새)’에게 보디가드가 되어달라고 요청한다. 소년은 감정이 배제된 학교생활의 반대급부가 되어 준다. 어떠한 원칙 없이 서로의 감정에 솔직하게 응대하는 것. 그러나 왕따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반동은 더 커져갈 뿐이다.


마침내, 대학 입학시험 날이 왔다. 이날만 무사히 넘기면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영화는 비가 쏟아지는 그날의 풍경을 길고 세밀하게 담아낸다. 고사장 출입에 앞서 반별로 모인 수험생들은 담임교사의 응원 구호 아래 파이팅을 외친다. 모든 시험이 끝난 후 고사장을 빠져나오는 수험생들은 꽃다발을 든 가족의 환호를 받는다. 감독은 영화가 픽션으로만 소비되는 것을 막기 위해 현실의 입시문화를 사실적으로 기입하며 환기시킨다. 서사의 구조가 느슨해진 바로 그 시점에서 시신 한구가 발견되면서 영화의 분위기는 급반전한다.


그 시신은 첸니엔을 집요하게 괴롭혔던 반 친구의 것으로 그녀가 사고로 죽이고 말았다. 베이는 첸니엔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죄를 뒤집어쓰기로 결심한다. 앞서 그를 다른 불량배들로부터 구해주고자 했던 작은 시도가 그렇게 나비효과를 불러온 것이다. 구원의 손길이 건네는 파장은 의외로 크다.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기 위해 시작된 관계는 그렇게 의외의 힘을 발휘한다. 비록 서로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첸니엔은 눈물로 그를 보낸 후, 학교에서 체득한 감정을 버리는 연기를 탁월하게 선보인다. 그러나 늘 그랬듯이, 그 연기는 오래가지 못한다.



베이가 첸니엔을 배려하기 위해 그녀의 한참 뒤에서 걸었을 만큼, 겉보기에는 너무나 다른 그들의 관계는 오히려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대학을 꿈꾸며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친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감정의 깊이를 공유한다. 그리하여 그 감정의 깊이를 헤아리는 태도는 학교폭력을 몰아내기 위한 시발점임을 천명한다. 삶의 목표가 입신양명이 아니라 서로를 향할 때, 그 관계는 더없이 힘이 세다. 사랑은 원래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마주 보는 것이다. 영화는 그들 사이에 진동하는 감정의 폭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후, 학교폭력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캠페인 영상으로 냉정하게 마무리 짓는다. 그 학교폭력이 뜨거운 사랑을 위한 낭만적 장치로 희석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한 윤리적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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