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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4 | 연재 [연재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16)
시부모의 결혼과 재혼
임안자(2021-04-08 10:57:25)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16)



시부모의 결혼과 재혼 


시어머니 에리카 보스(1911-1986) 시아버지 베르너 플루바허는 1935년에 스피츠에서 만났다. 시아버지는 마침 그때 그랑 스피처호프 호텔에서 부모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고 있던 참이었는데 우연찮게 양쪽의 아버지들은 프라이마워라이 회원으로 진즉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부친들의 소개로 알게 젊은이는 한눈에 반했다. 시아버지는 시기에 런던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었으나 서둘러 집에 돌아올 정도로 첫사랑에 빠졌다. 그런 한편 시어머니는 부모들의 호텔 사업 지역인 칸톤 아르가우의 도시 아라우에서 지금의 고등학교 전신인 사범학교를 다니던 중에 가족이 스피츠로 이사하면서 학교를 떠났다. 실은 아라우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어쩔 없이 그만둔 것이다. 그래서 항의를 하고 학교 교사들까지 나서서 그녀를 도와줬지만 아버지의 철통같은 옹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는 딸의 소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자기 밑에서 호텔 사업을 도와주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작업이래야 기껏 호텔 직원들을 단속하고 해외의 주요 손님을 보살피는 하찮은 일들이었다. 시어머니의 여동생 프레니도 사정은 똑같았지만 그녀는 그와 반대로 아무 불평 없이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고분고분하며 따라붙어 시어머니의 처지는 더욱 난감했다. 그러던 중에  호텔의 울타리를 벗어날 있는 기회가 그녀에게 주어졌는데 그것은 제네바 근처에 있는 미국인 여학생들의 기숙사 사감 자리였다. 그녀는 시아버지와 결혼할 때까지 그곳에서 직장 생활을 즐기며 자유롭게 살았다. 

      

  시부모는 사귄 년이 지난 1936 가을에 스피츠 성곽 교회에서 성대히 결혼식을 치렀다. 가족들의 표현을 빌리면그들은 잘생긴 외모에 지적인 매력이 넘치는 멋진 쌍의 신혼부부였다. 결혼 뒤에 시부모는 바젤시에 딸린 리헨 구역에 새살림을 차리고 시아버지는 이전의 정치적 활동과 예술 탐구를 중단하고 부친의 회사에서 평범한 월급쟁이로 생활비를 벌었다. 그의 초기 월급은 낮은 편이었으나 평소 음악을 좋아하던 그들은 음악회와 미술 전시에 열중하며 그런대로 행복한 날들을 보냈다. 그리고 2 대전이 터지자 시아버지뿐만 아니라 시어머니까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피난 유대인 친구들의 가족을 적극 도와주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바젤의 진보적인 젊은이들과 결합하여 사회주의의 조직체를 만드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처럼 14년을 단짝으로 같이 살다가 어느 시아버지에게 다른 여자가 생기면서부터 시부모의 결혼 생활은 허무하게도 빨리 무너졌다. 그들은 1948년에 별거하고 1950년에 이혼했다. 그리고 8 베라와 4 아들 페터는 시어머니가 맡아 길렀다.      


  이혼 뒤에 시아버지는 여섯 위인 새로운 연인 틸디 마이어 (1906-1992) 바로 가정을 꾸몄다. 직업이 재봉사였던 그녀는 그때까지 혼자 살다가 시아버지를 만나 늦게 결혼했다. 시어머니에 비해 겉모습이나 지적 수준이 눈에 띄게 떨어졌으나 자타가 인정하는살림꾼으로 집안일에 서투른 시어머니와 대조적이었다. 이를테면 시아버지가 가족과 친지들에게 이혼의 이유로 꼬집던 말도살림살이에 부실하고 혼란스러운 아내에 비해 틸디는 집안일을 꾸리고 마음을 편하게 해줘서 좋다였다. 하지만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이혼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성생활의 부조화였으며 때문에 둘의 관계는 진즉부터 삐거덕거리고 있었다’.


  시아버지는 재혼하고 얼마 할아버지의 공장들을 모두 이어받았다. 남편의 승진으로 단숨에 백만장자의 부인이 틸디는 전에 시어머니가 누려보지 못한 온갖 사치스러움 속에서 상류층 여인으로 편하게 살았다. 그러다 50 말에 좌골신경통의 질병으로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고 후유증으로 세월을 병원과 재활원 또는 온천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 시아버지는 여유롭게 옛날 남녀 친지들과 장거리 여행을 하며 의기왕성하게 살았는데 이래저래 부부 관계는 차츰 멀어지고 냉랭해졌다. 틸디는 의붓자식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베라와 페터는 부모의 이혼 규약에 따라 2주마다 주말을 그리고 커서는 학교 방학기 절반을 아버지의 재혼 가정에서 보내야 했는데 질투가 심하고 매몰찬 계모의 성품 때문에 어린 남매는 숱한 날들을 불안 속에서 슬프고 외롭게 지냈다. 집안 사정이 그런데도 시아버지는 자식들에 관한 일거리는 모두 틸디에게 맡겨버리고 심지어 자식들의 양육비를 잊고 제때에 주지 않아 자주 시어머니와 전화로 말다툼을 하는 자식들에게 별로 신경을 쓰질 않았다. 그리하여 아버지에 대한 실망과 원망의 응어리는 자식들이 어른이 돼서도 풀리지 않아 오랫동안 아버지와 가까워지려고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에게 이혼은 너무나 충격이었다. 그녀에게 남편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첫사랑의 남자였는데 남편이 떠나자 심한 우울증에 빠지고 넋을 잃은 이리저리 허우적거렸다. 시아버지가 이혼 건으로 지적한혼란스러움 갈수록 더욱 심해져 집안 살림도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시어머니는 이혼 3 뒤에 다시 결혼을 했다. 남편 루돌프 리켄바흐(1912-1987) 시아버지의 젊은 시절 친구였다. 수줍음을 타는 그는 친구의 부인을 은근히 사모하며 마흔 살이 넘도록 독신으로 살다가 1953년에 결혼했는데, 그러기 전에 친구 부부의 부탁으로 그가 베라의 괴티(독일어 대부) 되면서 어린 페터와도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그리하여 한동안 썰렁하던 집안은 시어머니의 재혼으로 다시 생기가 돌았고 어린 베라와 페터는 애들을 유난히 좋아하는 의붓아버지를 너무 좋아해 페터까지 그를괴티 부르며 따랐다. 페터 말에 의하면괴티는 친아버지보다 많은 사랑과 관심을 우리에게 진짜 아버지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아버지로 부르고 싶었지만 본인 스스로가 친구에 대한 예의로 그럴 수는 없다며 그냥 괴티로 불러달라고 오히려 우리를 달랬다’. (괴티(Goetti) 기독교계의 세례와 연결되는 ”Pate“ 다른 표현인데, 스위스에서는 대개 종교와 상관없이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부모가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를 대부 또는 대모(Gotte, Patin) 삼는다) 


  시어머니의 번째 남편은 바젤 귀족층의 부르주아 집안의 자손으로 친척 중에는 목사, 학사, 장교 출신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괴티의 삼촌 니클라우스 리켄바흐(Niklaus Riggenbach, 1817-1899) 철도 기관사로 19세기 중반에 톱니바퀴식 철도(Zahnbahn) 발명가로 유명하다. 스위스에서 보통 "산의 여왕"으로 불리는 루체른의 리기산(Rigiberg, 1,798m) 오르내리는 톱니바퀴식 철도와 그에 맞춰 특별히 만들어진 기관차의 원형은 리켄바흐가 1871년에 유럽에서 최초로 발명한 것으로서 스위스 알프스 산악지대의 관광사업 개발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루체른의 교통 박물관과 비츠나우(Vitznau) 리기산행 정거장에 가면 지난 세기 70년대에 설치된 리켄바흐의 동상들을 있으며 고서점에는 그의 자서전도 진열돼 있다. 


  괴티는 변호사이며 장교인 아버지와 독일의 귀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1차대전시 스위스 군사참모로부터 전방 관찰자로 독일 지역에 배치됐었는데 전쟁터에서 대량 살상을 목격하면서 크나큰 충격을 받아 폐인이 되어 돌아왔다. 귀국한 뒤에도 그는 전쟁의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년을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1930 초에 자신의 군용 권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 반면 괴티의 어머니는 1 대전 이후 다시 불거진 독일인들의 국수주의를 지지하고 나중에는 심지어 나치 정권의 추종자가 되어 가족에 커다란 파문을 몰고 왔다. 그리고 미술 전문가인 큰형은 30년대 중반에 베를린에서 세기적인 여성화가 케테 콜비츠(Kaethe Kollwitz, 1867-1945) 아텔리어 옆의 화실에서 미술 작업을 하던 중에 폐병으로 젊은 나이에 타계했으며 그의 죽음으로 괴티 가족의 비극은 절정에 달았다.  


  괴티는 고등학교를 마친 큰형의 영향을 받아 일찍이 막시즘에 파고들었다. 30년대에 반나치 좌파운동에 들어가 문학예술계통의 전위예술작가들의 문화운동에 참여하고 40 초에는 나치 정권에 쫓겨 독일에서 피난 좌파 또는 유대인 예술가들의 스위스 정착을 적극 도와주었다. 전쟁 이후 그는 공산당 회원이 되어 공산당 일간지의 문화편집장과 영화평론가로 한동안 일하다가 경비 부족으로 일간지가 없어지자 바젤시 정부의 교육부 공무원으로 직장을 바꿨다. 교육부에서 그는 냉전의 두꺼운 장벽을 무릅쓰고 동유럽과 중국의 예술작품을 바젤에 소개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다재다능한 예술가 영화감독인 이리 트린카(Jiri Trinka, 1912-1969) 초기 영화들과 중국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극단페킹 오페라 그에 속한다. 사회주의 나라들의 예술 초청 작업은 그러나 그가 1953년에 정치적 이유로 시공무원의 일자리를 잃게 되면서 끝났다. 그런데 공교롭게 1956년에 소련 군대가 부다페스트를 공격(헝가리 사건)하자 그에 분개하여 그는 공산당을 떠난 60년대부터 다시 바젤시 교육부의 장학금 사무국장으로 취직하여 정년퇴직까지 공무원으로 일했다.    


  괴티는 정치적으로 시아버지와 공동점이 많았으나 마음 씀씀이나 사는 방식에는 전혀 달랐다. 원래 성품이 겸손하고 인자한 그는 오랫동안 몰래 사랑하던 여인이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어려움에 부딪히자 망설이지 않고 결혼을 하고 가정의 재정립을 도왔으며 애들 교육에 정성을 들였다. 딱히 학교 교육뿐만 아니라 문학 미술 음악 등의 전반적인 문화 교육에도 주목을 돌리고 애들을 위해 장난감들을 직접 손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는 여러모로 훌륭한 의붓아버지며 교육자였으나 젊은 시절에 돈벌이가 튼튼하지 못하여 경제적인 힘은 약했다. 그에다가 설상가상으로 좌파적 활동 때문에 아버지 가족의 미움을 받아 그의 유산마저 빼앗기는 불운을 당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그가 공산당원 문제로 실업자가 되어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에 가족의 대표였던 고모가 조카의 몫인값비싼 집을 공산주의자에 없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헌납하여 어마어마한 손해를 입었다. 그리하여 그는 거의 빈털터리로 장가들었고 결혼 그가 갖고 가족의 유산 품목은 고가구 개와 금과 은으로 쟁반, 술잔, 식사도구들이 전부였다. 시기에는 괴티뿐만 아니라 시어머니도 이혼으로 수입이 줄어들어 시아버지가 애들에게 보내는 양육비로 빠듯하게 살고 있었던 터라서 결혼 초기에 그들의 경제적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그러다 이삼 지나서 괴티가 중급 공무원으로 다시 일자리를 얻으면서 사정은 조금씩 나아짐으로 베라와 페터는 무사히 대학을 끝까지 마칠 있었다. 페터는 어쩌다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그때 괴티가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라는 말로 괴티의 알뜰한 보살핌에 대한 고마움을 나타내곤 한다.  


  시어머니와 괴티는 결혼 20 동안 안정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행복하게 살았다. 괴티는 장학금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한국을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의 장학생들과 접촉의 폭을 넓히고 특히 아프리카 학생들과 가까워졌다. 그들 중에 한둘은 나중에 국가 대표가 되어 스위스를 공식 방문할 집으로 괴티를 찾아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60년대 중반쯤에 시어머니한테 갑자기 심상치 않는 병적 조짐이 보였는데, 다발적인 신체적 통증과 한동안 사라진 듯하던 혼란스러움의 재발 그리고 일련의 정신병 증세들이 한꺼번에 도드라졌다. 우연찮게 60년대 중반은 자식들이 독립되어 집을 떠나던 시기로 1964년에 스물두 살의 베라가 시집을 가고 1968년에 스물두 살의 대학생 페터가 공동체로 삶터를 옮기던 때였다. 그렇지만 그녀의 병세는 자식들이 집을 떠날 흔히 부모들이, 특히 어머니들이 경험하는 상실감으로 인한 일시적 고통과는 달랐다. 아무튼 괴티의 헌신적인 뒷바라지에도 그녀의 질환은 갈수록 심해져서 결국 1974년에 바젤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의학적인 해명은 조울병, 심신증, 정신분열증, 하스테리 의사마다 조금씩 달랐는데 뒤에도 정신병원을 왔다 갔다 하며 계속 치료를 받았지만 이렇다 효과를 보지 못했다. 시어머니는 같은 고통과 혼란 속에서 살다가 1986년에 스피츠에서 괴티와 함께 휴가를 보내던 어느 저녁에 옛날 스피츠 호텔에서 가까운 호수에 뛰어들어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  5월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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