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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5 | 연재 [연재/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17)
시집 식구들과 나
임안자 영화평론가(2021-05-07 11:54:53)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⑰


[시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임안자씨]


시집 식구들과 나

임안자 영화평론가


시아버지와 나


남편 페터는 부모의 별거로 두 살 때부터 아버지와 떨어져 살았다. 어릴 때 받은 정신적 상처로 그는 아버지가 싫었고 성년이 되어서는 그의 경제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그가 일찍 가족을 떠나 공동체에서 스스로 가난한 삶을 택했던 것도 아버지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려는 결심 때문이었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그는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시아버지를 결혼 직전에야 만날 수 있었다. 페터는 미루고 미루다가 할 수 없이 결혼을 한 달 앞두고 나를 소개하기 위하여 시아버지와 둘째 부인 티틀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데려갔다. 그리고 가는 도중에 처음으로 나에게 어린 시절에 계모한테서 당했던 푸대접을 말해주었는데 사뭇 침울한 표정이었다. 


시아버지와의 만남은 그러나 예상했던 것보다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는 계모와 함께 우리를 친절히 맞았고 내가 인사를 하자 시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고는 ‘네가 한국에서 왔다니 이게 무슨 행운이냐’며 눈물을 글썽거려 놀랬다. 우리는 커다란 안방에서 계모가 준비한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잔말을 나누는 동안 시아버지는 책장에서 책 하나를 뽑아 나에게 건네주면서 ‘이 책은 지금부터 네가 갖고 있어라’며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덧붙였다. 내가 받은 책은 재미 작가 강용흘(姜龍訖, 1903년-1972년)이 1931년에 쓴 소설 “초당”이었다. (강용흘(1898-1972) 작가는 한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1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 뒤 보스턴 의대를 거쳐 하버드 대학에서 영미문학을 전공했으며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편집위원으로 일하다 말년에는 뉴욕대학과 예일대학에서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강의했다. “초당”은 미국에서 대성공을 거둔 뒤 불어, 독일어, 체코, 유고슬라비아 등 10개 말로 번역되어 유럽에서도 인가가 높았다.) 



[강용홀 작가의 책 THE GRASS ROOF 2]



시아버지는 강용흘 작가를 1934년 런던에서 만났다. 해외 청년들이 드나드는 문화클럽에서 강용흘 작가와 그의 친구를 만나면서 셋은 곧 친구가 되어 자주 만났다. 한국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그는 함경도 지식층 집안의 자손들인 두 청년을 통하여 한국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근대사, 특히 일본 식민주의 통치와 그에 대항하는 한국인들의 3.1 운동에 대해서 자세한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그에 분개한 나머지 그는 런던을 떠나기에 앞서 한일간의 뜨거운 쟁점에 대한 긴 글을 썼으며 그 글은 그가 한때 프리랜서로 일하던 바젤란트의 일간지 란드솨푸틀러에 두 번에 걸쳐 발표됐다. (그 글들은 내가 간직하고 있다.) 강용흘 작가는 시아버지와 런던에서 헤어지기 전에 우정의 표시로 1932년 런던에서 출판된 “초당”의 원문인 “THE GRASS ROOF"를 결혼 전의 시부모에게 헌정함과 동시에 시아버지에게 석윤(石潤,, 빛나는 돌) 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는데 그때가 1934년 8월 30일이었다. 


시아버지는 40년 전에 있었던 한국 작가와의 경험담을 끝맺으면서 ‘강용흘 작가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다시 만나지 못했는데 그의 조국 한국에서 온 너를 우리 가족으로 맞게 돼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며 아주 들뜬 목소리로 남편에게 ’한국 며느리를 얻게 돼 너에게 고맙다’고 다정스럽게 말했다. 남편은 부친의 절실한 말에 속이 좀 풀렸는지 꽤 부드러운 표정으로 ‘아버지의 런던 시절과 책에 대해 전혀 몰랐었다‘고 말문을 열면서 계면쩍게 웃었다. 그의 옆에 앉아있는 계모는 좀 긴장한 자세로 페터의 눈치를 살피기에 바빴으나 남편은 그에 상관하지 않고 여유 있는 자세로 시아버지와 곧 다가올 우리의 결혼과 가족에 대해 말을 나눴는데, 그간 꽉 막혔던 부자간의 대화가 얼마만큼 트이는 듯하여 곁에서 보기에 좋아 보였다. 그리고 나 또한 강용흘 작가의 귀중한 작품을 이어받아서 너무 감격스러웠던 데다 한국 문화에 폭넓은 이해와 열정적인 관심을 가진 시아버지에게 저절로 친근감이 들었다.


그 뒤로 우리는 시아버지 부부를 우리 집에 가끔 초청하여 한국음식으로 대접하고 시아버지는 우리를 때때로 고급 음식점과 음악회에 초대하여 만날 기회를 만들었다. 그러다 1976년에 우리의 첫아이 카르 현이 태어나자 시아버지는 나에게 아주 비싼 시계를 선물하면서 ’우리 가족을 이어줄 손자를 낳아서 너무 기쁘다‘며 축하했다. 시아버지의 과대한 선물과 축하는 아버지로부터 사치스러운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었고 가부장적 가족제도 따위에 관심이 없는 남편에게는 좀 과장스러웠지만 그럼에도 아버지의 사랑이 그리웠던 나에게는 흔치 않은 행복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런데 나이 탓이었을까? 시아버지는 나이가 들수록, 특히 1992년에 계모가 죽은 뒤부터 자식들과 좀 더 가까워지려고 노심초사하고 나에게도 신경을 많이 썼는데 내가 한국에 갈 때면 ’네 가족은 스위스에 있으니 쉬이 돌아오라‘고 당부하기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1994년에 나의 첫 영화 프로젝트였던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국 영화 회고전”이” 한국 영화로는 처음으로 스위스에서 열었을 때도 그는 내가 대견스러운 듯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내 프로그램의 한국 영화에도 열심히 참여하셨다.


[젊은 시절의 시어머니와 임안자씨]


시어머니와 나


시어머니를 내가 만난 건 1974년 늦여름으로 페터가 결혼 이야기를 꺼낸 바로 뒤였다. 만남의 약속이 있던 날 오후에 나는 페터와 함께 시어머니와 괴티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갔다. 시중에 있는 조그만 아파트에 도착하자 뒤뜰에 차와 케이크를 준비해놓고 우리를 기다리던 시어머니가 우리를 친절히 맞았다. 세련미가 돋보이는 그녀는 내가 독일어에 서투른 걸 알아차리고 영어를 썼는데 시아버지를 통해 한국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대화는 술술 흥미롭게 이어졌다. 


괴티는 그날따라 몸이 아파서 침대에 누운 채 인사를 받았다. 그는 대뜸 나더러 ‘혹시 장학금 문제로 내 사무실에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는데 그러고 보니 한번 본 듯했다. 2년 전이었는데, 내가 프리부룩 대학에 입학하면서 학비 문제로 고민을 하자 스위스 남자친구가 한번 가보라고 해서 그를 사무실에서 만났지만 ‘간호사 직업 때문에 어렵겠다’는 대답을 받고 곧 잊어버렸다. 그래서 내가 맞다고 하자 그는 아픈 중에도 익살스러운 어조로 ‘그때 장학금을 주지 않기를 잘했다. 안 그랬으면 페터 때문에 너를 도와준 것으로 오해를 받지 않았겠느냐’며 스위스인들 특유의 짓궂은 유머로 나를 웃겼는데 페터한테서 미리 많이 들어서 그런지 장난스러운 그가 조금도 낯설지 않고 좋아 보여서 나도 그를 괴티로 부르며 말을 나눴다.     

  

그날 만남이 있었던 뒤 나는 프리부룩으로 바로 돌아갔다. 그래서 그들을 한동안 다시 만나지 못했는데 어느 날 시어머니한테서 편지가 왔다 “....너를 며느리로 인연을 맺게 되어 아주 만족스럽다. 내 아들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라....‘는 상당히 긴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녀의 성의와 너그러움에 고마워 가슴이 후끈했다. 그런데 대여섯 달 뒤쯤 해서 페터로부터 갑작스레 시어머니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전화를 받고 망연자실했다. 물론 내가 그녀에 대해서 아는 건 한두 번의 만남이 모두였지만 그래도 몇 달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정신병 환자라니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어머니는 병원에서 돌아온 뒤부터 갈수록 페터에 지나친 집착과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우리 결혼 날을 앞두고 집착 증세가 최고로 악화되어 그녀가 결혼식에 참가한 것만도 다행일 정도였다. 그러자 베라도 ‘어머니는 우리를 차별대우 없이 키웠는데 페터를 향한 집착 증상은 정신병이 돋으면서 생긴 새로운 현상’이라며 걱정을 했다. 


그녀는 우리가 베니스로 신혼여행을 간다는 걸 알고부터 매일 전화로 베니스가 홍수에 빠져있으니 절대 가지 말라, 페터가 의학박사 자격증을 받는 날에는 축하는커녕 네 실력으로 정말 의사가 될 수 있겠느냐, 애들이 태어나자 애들을 어떻게 먹여 살릴 거냐 등 현실과 동떨어진 질문이 자꾸 페터에게 쏟아졌다. 그처럼 어수선한 시기에 다행히도 바젤을 떠날 수 있는 두 번의 기회가 트였다. 1980년 늦은 봄에 페터는 다보스(Davos)의 결핵병원에서 내과 인턴으로서 4개월간의 트레이닝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초가을에는 런던의 세인트 바르톨로메우스 병원(St. Bartholomew's Hospital)으로부터 교환 의사로 초청되어 13개월을 런던에서 보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해 4월~8월까지 두 살과 네 살 반의 꼬마들을 데리고 스키 지역으로 유명한 다보스에서 조금 떨어진 외진 산골에서 호젓하게 지내고 다음 9월에 런던으로 떠났다. 런던의 경우는 월급이 바젤 대학병원에 비해 반절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시어머니로부터 되도록 멀리 떨어지기 위해 가기로 마음먹었다. 런던에 대해선 뒤에 다시 쓰겠지만 1년 반 동안을 타지에서 살면서 우리는 얼마만큼 활력을 재충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1년 말에 바젤로 돌아오자 시어머니의 전화는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바뀐 게 있다면 시어머니의 간섭이 나에게로 번진 점이었는데 남편의 근무시간에 맞춰 하루에 몇 번씩 전화로 나를 불러 ‘현이가 떨어져 죽지 않도록 아파트의 창문을 꼭 닫으라, 애들에게 줄 음식은 있느냐, 너는 의사들의 모임에 서투를 텐데 그에 알맞은 옷이나 있느냐....’ 몇 년 동안 같은 소리가 내 귀를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그러는 사이 나는 심한 불안과 수면 부족으로 지칠 대로 지쳤고 그에다 환청증과 설사병까지 생겨 미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시어머니의 전화를 차마 끊을 수 없어 눈물을 흘리면서 통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며 며느리의 예의를 지키려고 했다. 상황이 그럼에도 남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시어머니로부터 나를 보호하려고 너무 애쓰는 걸 뻔히 알면서 그를 더욱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어느 날 시어머니의 전화 공격이 밝혀지자 페터는 나에게 ’앞으로 절대 전화를 받지 말라‘고 명령(?)을 하고 괴티에게도 상황의 심각성을 자세히 말했다. 그런 뒤로 기적처럼 전화는 그쳤다. 그리고 나는 잠 부족과 환청에서 서서히 회복되고 6개월 만에 설사병도 그쳤다. 그리고 몇 년 뒤 시어머니의 너무도 슬픈 사망 소식에 우리는 전율했다. 

                                                                 

 6월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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