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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9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에 대하여
초록밤
김경태 영화평론가(2022-09-14 11:45:44)

보는 영화 읽는 영화 | 초록밤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에 대하여


글 김경태 영화평론가








<초록밤>은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는 ‘아버지(이태훈)’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잠시 후, 영화는 뜻밖의 충격적인 장면으로 일상에 균열을 낸다. 아버지는 야간 순찰 중 밧줄에 목이 매달려 죽은 고양이를 발견한다. 그는 별 동요 없이 한참 동안 그것을 응시한 후 아파트 한 귀퉁이에 땅을 파서 묻어준다. 당연하게도, 그 고양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즉, 그것은 엄연한 타살이다. 그 죽음의 이미지는 삶의 조용한 변곡점이 되어 무능력한 가부장의 일상에 서서히 스며들어간다.


다음 날 아침, 아버지는 화장실 문을 열어 놓은 채 대변을 보고, 또 손을 씻지 않고 나온다는 이유로 잇달아 ‘어머니(김민경)’의 구박을 받는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그런 잔소리에 익숙한 듯,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그 장면은 수치심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완고한 고집이 가부장으로서의 그의 지위를 얼마나 위축시켜버렸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무엇보다, 대변을 보는 행위를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에 대해서 더 이상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때, 인간은 동물에 근접해 버린다. 무력한 아버지는 가부장으로서의 위상뿐만 아니라, 인간의 위상마저 잃어가고 있다. 한편, 서른이 넘은 아들인 ‘원형(강길우)’은 부모와 같이 살며 장애인 활동보조를 하고 있다. 오래된 여자친구가 있지만 벌어놓은 돈이 없어 결혼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의 가부장으로서의 미래는 아버지와 별 다를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이들 가족은 집주인이 재계약을 해주지 않아 이사를 가야만 한다. 때마침, 원형의 할아버지가 죽어서 남긴 시골의 허름한 집을 팔아 새로운 집을 찾는데 보태고자 한다. 그런데 그 집에는 할아버지와 동거하던 노년의 여성이 여전히 살고 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할아버지의 통장을 내놓고 이제 집을 비워달라고 말한다. 더 이상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기에 갈 곳 없는 노년의 삶은 눈앞에 닥친 그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집을 나가는 대신 그 집에서 목을 매다는 선택을 한다. 자살은 갈 곳 없는 노인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이다. 아니, 엄밀히 말해, 그것은 자살이 아니다. 그녀는 다른 인간들에 의해 인간성을 잃고 강제된 죽음으로 내몰린 것이다. 앞서 목 매달린 고양이의 죽음, 그러니까, 가치 없는 동물로서 죽여도, 혹은 죽어도 마땅한 동물의 이미지가 그녀와 겹친다. 그녀의 삶은 동물의 그것과 한 없이 가까워진다.  


가족들은 치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개를 치고 만다. 그들은 쓰러진 들개가 아니라 피가 묻고 훼손된 범퍼의 수리비를 걱정한다. 이름 없는 동물의 죽음 따위는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어머니는 소변을 보기 위해 휴지를 들고 도로 변의 숲 속으로 들어간다. 그때, 죽은 줄 알았던 피 범벅된 들개가 일어나 숲 속으로 달려 들어간다. 쪼그려 앉아 소변을 보는 어머니가 그 들개를 발견한다. 그들은 마주본 채 서로를 한참 응시한다. 그 순간, 달리는 차 앞에서 무력했던 한낱 짐승과 그 차를 몰던 인간은 대등한 위치에 놓인다. 숲 한 가운데에서 무방비로 소변을 보는 인간은 동물과 다를 것이 없다. 


마지막에 영화는 경비실에서 근무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전화 신고를 받고, 벤치 위에 인간의 얼굴이 들어갈 정도로 둥글게 매듭지어져 걸려 있는 밧줄을 발견한다. 그는 그 매듭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어 넣지만 이내 울먹이며 빠져나온다. 그는 그 고양이처럼, 그 노인처럼 차마 목을 매달지 못한다. 여기에서 죽는 것은 자신의 삶이 동물의 삶과 다를 바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자살을 잠시 흉내 내며 그것을 자신만의 의식(ritual)으로 치러낼 뿐이다. 동물의 삶으로 추락하고 있는 자신의 공허하고 무의미한 삶을 구원하기 위한 최후의 몸부림이다. 의식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그리고 인간임을 증명하는 고유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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