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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 | 특집 [도시의 유산]
고원의 옹기, 땅과 사람을 담다
진안옹기
이바우, 신동하(2023-01-15 00:05:43)

도시의 유산 | 진안옹기

고원의 옹기, 땅과 사람을 담다






백두대간과 금남정맥, 호남정맥 사이에 담겨있는 진안고원은 크고 작은 산들이 기와지붕 처마처럼 뻗어지고 이어진 모양새다.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이 ‘한없이 많다’는 뜻으로 쓰이는 것은 별나면서 빼어난 고원의 자연환경에서 비롯한다. 고갯길이 끝없는 산골에 겨울이면 한바탕 눈이 내려 경치만큼은 무척이나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곳의 지대는 한반도 지형이 형성된 중생대에 분지가 융기해 만들어졌다. 땅의 역사가 깊은 만큼 무수한 이야기들이 사람살이에 섞여 있지만 그중에서도 진안옹기는 지역의 상징으로 주목받는 문화유산이다. 


진안옹기의 역사는 우리나라 옹기문화의 성쇠와 궤를 같이한다. 전통 옹기가 자취를 감춘 1990년대, 전국 골동시장에는 ‘진안옹기’가 유행했다. “진안장독은 장이 잘 품지(새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품질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마당 한켠이나 아파트 베란다에 장독대를 갖추고 간장, 된장, 고추장 등을 담가 먹는 옛 식문화가 아직 남아있던 시절 얘기다. 요즘 어느 브랜드 냉장고를 혼수품 1위로 선호하듯 당시 진안옹기는 골동가에서 웃돈을 주고 거래될 만큼 유명했다. 


기능과 조형, 빛깔이 고루 우수한 것으로 알려진 진안옹기는 남부식이라 불리는 전라도 옹기 가운데 유독 항아리의 어깨가 발달했다. 옹기 항아리에서 중요하다는 ‘전(입술)’이 확연하고 실하게 잡혀있는 것도 큰 특징이다. 바닥부터 어깨로 이어지는 곡선을 따라 항아리의 모양을 마무리하는 전 부분에 시선이 머물면 왠지 모를 상승감이 느껴진다. 지역의 또 다른 상징인 모래재, 마이산 역고드름처럼 솟아오른 힘과 역동성을 닮은 것이다.


중고명품 이름처럼 회자되던 진안옹기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누구를 통해 이어졌고 왜 다시 살아난 걸까. 호남의 지붕이자 도요지의 보고 진안고원에서 화려했던 도자문화의 한 줄기로 불씨를 꺼트리지 않고 지속된 진안의 옹기문화. 과거부터 오늘까지 굴곡지게 이어져온 땅과 사람의 문화, 옹기를 들여다본다. 





옹기장들이 모여드는 산골 동네

산이 높고 물은 깊어 수많은 골짜기가 발달한 진안은 흙과 땔감이 풍성해 예로부터 옹기 생산이 왕성했다. 옹기를 굽기 위해서는 흙과 나무, 물이 고루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재료는 나무. 옛 옹기장들은 나무가 있는 곳을 찾아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옹기를 구우려면 그만큼 많은 땔감이 필요했다는 증거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도강록> 편을 보면 수수깽이 삼백단으로 충분히 그릇을 구워내는 중국의 사기장과 조선 옹기장을 비교한 대목이 있다. 


“소나무는 한 번 베면 다시 돋지 않는 나무로 옹기점을 한번 잘못 만나고 보면 사방의 산은 발가벗게 되고 백 년을 길러 하루아침에 없애게 되매 옹기점은 또 다시 소나무 있는 곳을 따라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여기엔 작은 오해가 있다. 옹기와 자기는 굽는 데 필요한 땔감 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옹기는 뜸을 들여 지긋이 굽는 것이 번조의 핵심. 공기가 통하면서도 내용물은 새지 않도록, 음식을 저장하고 발효시키기 위해서다. 흔히 찰흙이라 불리는 옹기 점토는 지구의 마지막 변동기에 지층이 형성되고 나서 쌓인 흙이다. 이 지각변동으로 진안고원의 마이산이 탄생(?)했으니 진안에 옹기흙이 흔한 것은 당연한 일. 게다가 인구밀집도가 낮은 산간지역에선 일상생활용 땔감의 소비가 적어 옹기 생산에 쓸 목재자원이 말그대로 풍부했다. 


생산된 옹기가 주로 지역 내 소비보다 외부로 팔려나간 점도 진안옹기의 이름을 널리 알린 요인 중 하나. 산중에서 만들지만 각 지역으로 유통, 판매가 가능했던 것은 발달한 물길 덕분이다. 물이 산을 넘지는 못하니 물길이 먼 곳은 고개를 넘어 다녔다. 과거 옹기장수였다는 장수군 천천면 주민에 따르면 지겟짐을 지고 진안 백운면 노촌리에서 신광재 고개를 넘어가 장수 장에 옹기를 팔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불무혈에서 이어진 옹기굴 불씨





진안의 수많은 가마터 중 현재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는 곳은 백운면 손내옹기점. 이곳은 마을의 혈이 ‘솥혈’인 정천(鼎川)과 소나무가 울창한 송림(松林)이 합해져 행정지명상 정송(鼎松)이 되었고 발음 따라 솥내에서 손내로 불리고 있다. 지명에서 유래하듯 흙과 나무가 충분한 정송마을은 한때 이백여명 식구가 옹기 일로 먹고 살았을 만큼 큰 옹기점촌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 마령현 편을 보면 ‘마령현의 동쪽 동림리에 도기소가 한 곳, 자기소가 한 곳 있다’는 기록으로 정송옹기점(현 손내옹기점)과 가마터의 역사가 오래됨을 짐작할 수 있다. 


정송옹기점은 진안의 지리적 여건과 관계 깊은 특징들을 보인다. 섬진강수계와 금강 상류 옹기장들의 작업방식이 뒤섞여 있는 것. 이동성이 강한 옹기장이들의 습성으로 두 문화권역의 많은 옹기장들이 이곳을 거쳐간 까닭이다. 바닷가에서 해풍을 피하기 위해 지었다는 조대가마가 정송옹기점에 남아있던 것도 마찬가지. 다른 지역의 옹기점 문화가 옮겨와 정착할 수 있었던 경로 역시 물길을 통해서다. 


이곳에서 오래 일한 뒷일꾼 안재호에 의하면 작고한 안강우 사장이 정송옹기점을 운영한 1970-80년대에는 서울경기 지역까지 옹기를 납품했다고 전해질 만큼 진안옹기의 수요와 판매량이 대단했다. 당시만 해도 옹기는 마을일이었지만 현재는 단 한집뿐. 손내옹기의 이현배 씨 가족이 1993년, 옹기의 사회적 수요가 줄어 문을 닫은 옹기점에 자리 잡고 오늘까지 진안옹기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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