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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 | 연재 [여행유감]
쿠바에서 정복자의 불편한 흔적과 마주하다
여행기획자 황의선의 쿠바여행
황의선(2018-03-15 10:11:47)



나는 쿠바에 가기도 전에 쿠바에 질리고 있었다.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음악들도 지겨워졌고 잘생긴 체게바라의 멋진 미소도 식상해지고 있었다.

시들어 가는 삶에 활력소가 될까하여 선택한 쿠바인데 가기도 전에 이렇게 지겨워지는 건 조짐이 매우 좋지 않았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쿠바에 다녀온 사람들이 올리는 혁명광장에서 체게바라 부조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보며 나도 곧 저기서 사진을 찍게 되겠구나 하는 딱 그 정도의 기대감.
그런 마음으로 출발했던 탓일까? 인천 공항에서 같은 팀으로 가게 된 분의 성함을 듣는 순간 역시 이 여행을 오는 게 아니었다는 후회가 밀려 들었다. 장인 어른 이름과 같았던 것이다. 의사 사위 바라고 결혼 시켰더니 의대 졸업을 못해 의사는커녕 백수에 날건달인 나를 늘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그런 장인 어른과 함께 여행가는 기분이라니....

13시간의 긴 비행을 하고 중간에 캐나다 토론토에서 갈아 탈 때도 그냥 통과 여객일 뿐인 나에게 캐나다 공항 보안요원들은 어찌나 집요하게 검색을 해대는 지 이 놈의 북미 내가 다시 오나 봐라 싶을 정도였다.



토론토에서 아바나까지 다시 3시간 30분.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아바나.
이런저런 불편함을 겪고 나니 이렇게 먼 곳을 나는 왜 찾아가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남들은 자본의 때가 아직 덜 묻은 사회주의적 자존심이 남아 있는 나라라는 점이 매력인 것 같았지만 사람사는 거 다 비슷하다고 여기는 나에겐 그냥 그랬다. 그래도 지금 가지 않으면 그나마 남아있는 사회주의적 순수함이 사라진다고 하니 가보기는 해야겠구나 싶었을 뿐이었다. 아바나 땅을 밟은 순간에도 이 곳에 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수도 아바나에 산프란체스코 광장이 있다. 주요 광장 중 하나인데 이 곳에서 여행 중 처음으로 내 눈을 고정시키고 흥미를 가지게 하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용산에 전쟁기념관에 가본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텐데 용산에는 덩치 큰 국군이 왜소한 인민군을 안아주는 조각상이 있다. 누가 더 큰 지 누가 더 의젓한 모습인지를 보면 만든 이의 의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좀 유치한 조각상이 산프란체스코 광장에 있다. 이 조각상이 내 눈에 유별나게 더 들어온 이유는 내가 속했던 수도회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주니페로 세라의 동상이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수도회 선배 위인들 중 한 명.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치스코, 샌안토니오, 샌디에고 등등 미국서부와 멕시코 등 소위 프란치스칸 미션 벨트를 만든 사람. 캘리포니아 원주민의 10%를 세례시켜 천주교에 입교 시켰으며 미국과 중미에 지금과 같은 천주교 교세를 만들 수 있게 기초를 닦은 사람 그 전설의 사람 낚는 어부 주니페로 세라였다.

동상 설명에 2015년 9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라를 성인으로 시성했다고 적혀있었다. 아 그랬구나 결국 성인품에 올라갔구나하는 탄식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이 사회주의의 나라에서 세라를 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캘리포니아도 아니고 멕시코도 아닌 여기는 쿠바가 아닌가? 세라가 쿠바에 까지 선교를 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떤 식으로든 인연이 있으니 이 산프란치스코 광장에 거룩하게 서 있는 것일 테지만 너무 뜻밖이고 한편으로는 이걸 보자고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가 싶어 서글퍼졌다.

1784년에 세라가 세상을 떴고 1988년에 복자가 되었으며 2015년에 성인이 되었으니 그가 죽은 지 200여년 만에 그의 공은 천주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축복받은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이리 씁쓸하고 아쉽고 심지어 서글플까? 이 머나먼 땅 쿠바에서 그나마 아는 사람이 동상으로 나타났으니 반가워야 할터인데 반갑기는커녕 쿠바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주니페로 세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면 세라는 스페인 사람으로 작은 형제회라는 수도회에 들어가 신부가 되었고 발령을 받아 멕시코와 미국 서부 등지에서 선교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전무후무하게 많은 사람들을 입교 시켰는데 바로 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 특히 원주민들을 입교 시키는 과정에 대해 사람들의 판단이 갈린다.

스페인 침략자들이 도착한 신대륙은 땅은 너무 넓고 개종시켜야 할 원주민은 많으나 신부들의 숫자는 적었다. 그리고 현지어를 거의 모르는 신부들이 천주교와는 완전히 다른 종교적 관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예를 들면 원죄라든지 은총, 회개라든지 하는 개념이 아예 없는 이들에게 천주교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식을 불어 넣고 그 다음에 용서 받아야 한다고 할 지경이었다. 이런 것도 제대로 안되자 예수회라는 수도회의 호세 신부는 원주민에게 가장 좋은 가르침은 칼과 창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원주민 고유의 신앙과 사원들은 인정되지 않았고 우상이나 미신이라는 이름으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인디언들 중 자신의 신앙을 지키려는 자들은 화형에 처했으며 천주교의 전례의 식에 인디언 고유의 신앙을 섞어 절충적인 부두교가 생겨나자 수천명을 감금하고 고문했다. 이런 잔인한 방식으로 대규모 개종이 진행되었다. 이틀만에 1만 4천명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기록도 있고 1538년 9월부터 1539년 3월까지 모두 5만2558명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주니페로 세라는 이러한 침략적인 선교 활동의 후반기에 등장했다. 캘리포니아는 북미 지역에서 뒤늦게 식민지화 된 곳이었는데 세라가 캘리포니아에서 만난 인디언들은 식량 부족에 매우 고통 받는 상태였다. 신대륙의 인디언들은 농사를 짓고 음식을 보관한다는 개념이 없어서 가축이든 풀이든 식량이 될 만한 것들은 보이는 대로 먹어치우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이들의 문화에서는 이성과 동성, 어른과 아이, 기혼과 미혼, 가족이나 친척 등의 구분 없이 성행위를 하고 있었다. 세라를 비롯한 프란치스칸들은 교육을 통해 이런 일들을 막으려고 했지만, 인디언들이 성당에 단기간만 머무르다 떠나기 때문에 그 시도들은 실패로 끝났다.

주니페로 세라의 선교 전략은 원주민들에게 음식을 주어서 그들이 미션에 머물게 한 다음 그 기간에 교리를 교육시키고 세례를 준다는 것이었다. 식량을 준다는 것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인디언들이 성당에 머무는 동안에는 시키는대로 매일 기도하고 교리를 암송하였다. 만약 순종적이지 않은 인디언들은 벌을 주거나 먹을 것을 제한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인디언들을 제대로 개종 시키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사람들은 천주교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단지 안정적인 식량 수급에 이끌려 왔었기 때문에 세례를 받고는 곧 모든 내용을 잊어먹었다. 인디언들은 농사를 지으며 한곳에 정주하며 사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금세 도망갔다. 결국 수도자들은 이런 식으로는 전도가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도자들이 생각한 방식은 중세 유럽식의 봉건적 정주 방식의 적용을 위한 감금과 강제 개종이었다. 수도자들은 인디언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제공하는 대신 건축·농사 등의 노동을 시켰다. 전통적인 수도원 방식이었다. 다른 것이라면 수도자들처럼 1인용 방이 제공된 것이 아니라 집단 수용했다는 것이었고 위생도 열악했다. 필연적으로 전염병이 돌았다.  이전에 전혀 겪지 못했던 질병이 돌면서 인구가 줄어들었다. 수도자들의 기록에 "그들은 자유롭게 잘 살고 있었는데, 우리가 그들을 천주교와 공동체 생활에 묶어 두자마자 살이 찌고 병들고 죽었다."라고 적혀 있는 걸 보면 수도자들도 이 문제가 심각한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성당 안에 살게 된 사람들은 차차 적응해서 노동을 배워나가고 정상적인 식생활과 윤리적인 성생활을 배워나갔지만 그러는 동안 인구는 계속 감소했고 그들의 언어와 문화가 사라져갔다.
천주교로의 개종은 인디언 문화의 흡수 혹은 말살이었던 것이다.

198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몬터레이를 방문해서 세라를 복자로 시성했을 때 많은 인디언들이 모여 항의했으며 2015년 9월 교황 프란치스코가 시성식을 거행한 당일 밤에 그의 묘비와 동상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한 것은 인디언들의 후예가 느끼는 모멸감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세라의 동상이 인디언 소년의 보호자인양 서 있는 것이 나는 불편했다. 그것도 아직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에 말이다.

역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쿠바 중부의 트리나다드에 있는 노예탑을 보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역사를 돌아보며 마음 편한 날이 왔으면 좋겠다. 남의 나라 먼 타국에 와서도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건 이게 쿠바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 평화 우리 마음에도 평화가 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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