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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3 | 인터뷰 [인터뷰]
남부시장 2층에는 작은 페루가 있다
지구 반대쪽 나라를 사랑하는, 강정희·마르코
윤지용(2018-03-15 10:56:01)

남미대륙의 중서부지역 안데스산맥 기슭에 있는 나라 페루, 경도상으로는 우리나라와 14시간의 시차가 나고 위도상으로는 남반구에 있으니 말 그대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셈이다. 전주 남부시장 2층 청년몰에 가면 그 먼 나라 페루를 만날 수 있다. 젊은이들의 끼가 넘치는 아기자기한 가게들 한 귀퉁이에 '아모르 페루아노'가 있다.



Amor Peruano, 스페인어로 '페루 사랑'이다. 빨강색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면 두 평 남짓한 가게 안에 '깨나', '삼뽀냐', '안따라' 같이 이름도 낮선 악기들과 올망졸망한 공예품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은 왠지 낯익다. 하늘과 맞닿은 고원 위의 고대도시 마추픽추다. 황금을 탐했던 스페인 침략자들에 쫓긴 마지막 잉카인들이 깃들었던 그곳. 그림 속에서 홀로 도도하게 활공하고 있는 한 마리 새가 잉카 원주민들의 민요 '엘 콘도르 파사'를 떠올리게 한다.
아모르 페루아노의 주인은 남편 마르코 씨와 아내 강정희 씨 부부다. 페루 사람인 마르코 씨는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했는데, 지난 2012년 세계소리축제에 참가하러 왔다가 정희 씨를 만나 전주에 눌러 앉았다고 한다. 2012년 9월 13일에 소리문화전당 앞마당에서 처음 만났고 그해 12월 27일에 결혼을 약속했고 이듬해 1월 말일에 결혼했다고, 이 모든 날짜를 기억하고 있는 정희 씨의 마음이 참 살뜰하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청년과 서둘러 결혼할 때 혹시 집안의 반대는 없었냐는 너무 통속적인 질문에도, 착하게 웃는다. 부모님은 별로 반대하지 않으셨는데 이모가 "5년만 살아봐라"고 걱정했단다. 알콩달콩 살다보니 어느새 5년이 지났고 두 사람은 여전히 행복하다.
인터뷰를 위해 찾아갔을 때 마침 마르코 씨는 페루에 가고 없어 아쉬웠다. 그는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도 남쪽으로 1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아레키파'라는 지방 출신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번 비행기를 갈아타고 서른 시간 넘게 가야 해서 항공료만 해도 만만치 않다. 빠듯한 살림살이에 엄두를 못 내서 여러 해 동안 고향에 가지 못했었는데 우연히 인터넷에서 값싼 항공권을 발견해서 모처럼 고향 나들이 하러 갔단다. 사실 정희 씨도 아직 페루에 가보지 못했다. 시어머니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과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는데 화상통화만으로도 충분히 정이 들었단다. 아모르 페루아모에서 파는 페루 토산품들은 모두 시어머니께서 직접 페루 각지를 돌면서 현지의 공예인들에게서 구매해 보내주시는 물건들이다.
아직 우리말이 서툰 마르코 씨는 정희 씨를 '로사'라고 부른다는데 영어의 rose처럼 스페인어로 '장미'라는 뜻이다. 페루 청년과 첫눈에 반해서 사귀다가 몇 달 만에 결혼했다기에, 스페인어를 전공했거나 남미 관련 일을 했었냐고 물었다. 대학에서 의상을 전공했고 어린이집 보육교사로 일했었다는 대답이 뜻밖이었다. 정희 씨는 우연히 몇 번 들어본 안데스 음악에 반해서 심취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남미 출신 외국인들과 온라인 채팅이나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스페인어를 익혔단다.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공부한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데 몇 년 동안 떠듬떠듬 독학으로 공부한 스페인어 덕분에 남편을 만나고 사랑하게 됐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해요."
결혼 후 1년이 채 안 된 2013년 12월에 아모르 페루아노를 열었다. 국내에서 남미음악 연주가로 꽤 알려진 음악가인 마르코 씨가 여기저기 공연을 다니는 틈틈이 남미의 음악과 문화를 알리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어서였다. 아모르 페루아노를 찾는 사람들에게 페루 이야기를 들려주고 즉석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 마르코 씨의 즐거움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정희 씨도 별로 장사욕심이 없어 보인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가게에 들어와 물건들을 만져보고 구경하며 이런저런 질문만 하다가 그냥 나가는 손님들이 대부분이었는데도 전혀 짜증스러운 기색이 비치지 않는다. 정말로 '좋아서 하는 일'인가보다.



아모르 페루아노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동아리 모임도 한다. 2014년부터 3년 넘게 해오고 있는 모임이다. 매주 화요일 저녁에 대학생부터 전업주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 남미 노래를 배운다. 이왕이면 폼나는 스페인말로 이름을 지을 것이지 모임 이름을 그냥 '노래로 배우는 스페인어'라고 하는 것에서도 겉멋부리지 않는 순박함이 느껴진다. 스페인어나 남미 노래를 전혀 모르는 초보자도 언제든지 환영이라는 말에 솔깃해졌다.
"Cuando una puerta se cierra, ciento se abren." 정희 씨가 가게 안에 손글씨로 써 붙여 놓은 스페인 격언이다. '한 개의 문이 닫히면 백 개의 문이 열린다'는 뜻이란다. 로사와 마르코, 이 젊은 부부의 앞날에도 희망의 문들이 활짝 열렸으면 좋겠다.


비운의 잉카제국
오늘날의 페루와 볼리비아 일대를 중심으로 험준한 안데스 산지에 총연장 24,000km의 도로망과 촘촘한 관개수로를 건설했던 '태양의 제국' 잉카는 너무 허망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수만 명의 군대를 가진 잉카제국을 멸망시킨 것은, 스페인 사람 프란치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180명의 병사와 27마리의 말과 40자루의 소총이었다. 정복자들은 잉카의 신전을 허문 자리에 가톨릭 성당을 지었고, 천만 명이 넘는 원주민들을 학살하거나 광산의 노예로 부렸다. 그들이 약탈해간 엄청난 양의 황금과 은에 힘입어 스페인은 16세기에 일약 유럽의 최대강대국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그 많은 황금으로 흥청망청하던 스페인이 과도한 인플레이션으로 스스로 쇠락의 길을 걸었으니, 과연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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