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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3 | 연재 [이휘현의 책이야기]
나는 요즘 <임꺽정>에 빠졌다
홍명희 『임꺽정』
이휘현(2018-03-15 11:11:04)



열권짜리 대하소설 <임꺽정>을 읽겠다고 마음먹었던 게 스무 살 무렵의 일이니, 그 다짐이 실행으로 옮겨지기까지는 스물다섯 해가 걸린 셈이 되었다.
그 사이 세간에 유명세를 타던 이런 저런 대하소설들이 내 손을 거쳐 갔는데, 희한하게도 <임꺽정>은 인연이 닿지 않았다.
얼마 전 심심풀이 삼아 자주 드나드는 전주 시내 중고서점에서 권당 2천7백 원으로 매우 저렴하게 나온 물건이 없었다면, 다짐만 있고 실행은 없던 허송의 세월은 훨씬 길어졌을 것이다.
총 열 권에 2만7천 원이면 요즘 나오는 웬만한 소설책 두 권 값밖에 안 되고, 제품 상태가 매우 양호한데다가, 소장가치도 높은 책이니 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시기가 잘 맞아떨어지려 했는지, 때마침 내가 고관절 수술로 두 달 남짓 직장을 쉬어야 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보니 <임꺽정>이 나와 불쑥 독서로 인연을 맺게 되는 데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요즘 임꺽정과 그 작당패의 마수에 걸려 책 읽기의 재미에 흠뻑 빠져 지내고 있다. 금세 6권까지 읽고 이제 곧 제7권을 펼쳐 들 참인데, 덕분에 답답하고 따분한 병실 생활이 단조롭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 임꺽정은 조선시대의 3대 의적 중 하나다. 나머지 둘은 홍길동과 장길산이다. 이 중 홍길동은 허균이 지어낸 가상의 인물이고, 또 다른 대하소설로서 작가 황석영에 의해 널리 알려진 장길산은 조선 숙종 때 의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임꺽정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남은 실존인물이다. 명종실록에 군데군데 몇 줄로 임꺽정 이하 화적패의 행적이 남아 있는데, 홍길동이 호형호부를 못하던 서얼 출신이었다면, 광대 출신의 장길산처럼 임꺽정 또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난 천민 출신 의적이었다.
오랜 세월 한반도 이 곳 저 곳에서 민담으로 구전되던 황해도 의적 두령 임꺽정의 이야기를 홍명희가 작가적 상상력으로 키워낸 것이 대하소설 <임꺽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구한 말 의병 홍범식의 아들이자 당대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던 벽초 홍명희(1888-1968)는 언어와 역사를 잃어버린 피식민의 설움을 임꺽정 무리의 무용담을 통해 거침없는 필력으로 풀어내었다. 각각의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는 물론이려니와 박진감 흐르는 이야기 전개는 지금 읽어도 독자로 하여금 가슴을 뛰게 하는데,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는 차치하고라도 극장도 TV도 없던 그 시절 이 소설이 누렸을 폭발적 인기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소설 <임꺽정>은 해방 후 책으로도 출간되었으나 지은이 홍명희가 '월북작가'라는 딱지가 붙는 바람에 오랜 시간 남한에서는 저잣거리 이야기처럼 떠돌아야 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에 와서야 소설책이라는 제대로 된 꼴로 선을 보이게 되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해빙 무드 속에서 이 소설이 제법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1990년대 중반에는 모 지상파방송사에서 대하사극의 형태로 방송까지 탔지만, 요즘은 그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


늦바람이 든 나는 요즘 임꺽정 읽기를 주변에 적극 권하는 중이다.
우리 문학에 대한 의무감의 소산이 아니요, 그저 신바람 나고 재미난 콘텐츠를 혼자 즐기기 아까운 까닭에 그러하다.
지난 백 여 년 사이 한국어가 맞이한 급변의 상황이 팔십 여 년 전 쓰여 진 소설의 문투를 예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지만, 지금은 죽은 말이 되어버린 이런저런 옛 단어들의 출몰을 족히 감당하고 나면, 월담 후에 마주하는 <임꺽정>이라는 창고에는 맛난 음식들이 그득하다. 가히 산해진미의 진경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십 년 사이 할리우드가 수퍼히어로 영화 장르로 금전적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는데, 내가 <임꺽정>을 읽으며 자꾸 떠올린 게 바로 마블 스튜디오의 그것들이었다.
당대 최고의 장사 임꺽정, 활 잘 쏘는 이봉학, 표창의 귀재 박유복, 돌팔매의 달인 배돌석, 발빠른 황천왕동이 등 일제강점기 홍명희의 펜 끝으로 살아나 피식민 백성들의 울분을 조금이나마 달래주었던 각각의 주인공들이, 몇 세대가 흘러 간 지금에 와서 페이지를 펼쳐도 여전히 우리에게 생동감을 피력하기 때문이다.
위기와 모험, 분노와 복수, 의리와 사랑, 공포 등 다양한 장르의 외피로 각 장마다 하나 둘 등판하는 일곱 두령이 <임꺽정> 제6권 끝장에 와서 의형제를 결의하니, 내가 이 대목에서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 <어벤저스>를 떠올린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아울러, 연산군의 폭정 아래 함흥 백정 마을로 스며든 양반 이장곤과 봉단의 사랑으로부터 시작하여, 중종 인종 명종까지 이어지는 조선 중기 격동의 시대를 포악한 양반들의 횡포와 억눌린 민초들의 고난 사이에서 종횡무진 누비는 임꺽정 패의 영웅담으로 가득 채워낸 이 이야기는 이 시대에도 분명 공명하는 바가 있다.
비록 판타지에 가까울망정, 황금만능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사법 입법 행정은 물론이요 언론까지 주무르는 권세가들의 야비한 미소를 미디어로 접할 때면 어디 임꺽정 패거리 같은 이들은 없나 하고 분기탱천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었어도 권력을 휘두르는 악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이 악의 지독한 생명력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여전히 <임꺽정>을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아참, 특히 전주사람이라면 <임꺽정> '의형제 편 - 이봉학이' 대목을 눈여겨봐도 좋을 듯싶다. 지금 복원사업이 한창인 전라감영의 풍경이 활 잘 쏘는 이봉학과 전주의 기생 계향의 연애사를 통해 희부윰하게 드러나는 덕이다.
작가 홍명희의 발품 판 실제 기억인지 아니면 순전한 상상의 소산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글 속에서 조선 중기 전라도를 호령했던 전주와 전라감영의 위용이 이봉학의 밭은 발걸음을 따라 선화당과 경기전까지 아우르며 멋지게 드러난다.
관심 있는 분들에게는 분명 눈여겨 볼만한 대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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