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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 | 특집 [이하연의 귀촌이야기 ④]
봄의 텃밭엔 새로운 씨앗이 온 힘을 다해 땅을 뚫고 올라온다
이하연
(2018-05-15 10:31:04)



분홍꽃 완두가 손가락만치 자랐다. 때 아닌 함박눈을 맞아 이파리가 다 꼬실라진 토종감자도 며칠사이 눈에 띌 만큼 자랐다. 혹시나 뜨거운 햇살에 녹아버릴까 싶어 마른 풀을 덮어줬던 너브내상추, 꽃상추, 개새바닥상추도 예쁜 노란잎, 붉은잎을 자랑하며 잎을 늘려간다. 내 눈엔 아기자기 이쁜 작물들이 여기저기 많지만, 100평 남짓 봄 텃밭은 여전히 쇠별꽃, 광대나물, 개망초, 봄까치꽃의 차지다. 텃밭 가득히 이것저것 심어서 빨리 자라는 걸 보고 싶지만, 이렇게 따뜻하다가도 된서리가 내리면 서둘러 심은 호박이며 고추, 가지는 다 얼어버리니까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때에 맞춰서 씨를 심어야 하고, 조금 빨리 키우려면 비닐을 덮어 모종을 키운다. 그래서 꼬꼬마 토마토, 오이, 호박, 참외, 고추들은 모두 작은 비닐온상에서 곱게 자라고 있다. 갓난 아이 다루듯이 저녁엔 비닐 이불 덮어줬다가 아침이 되면 걷어주고 쨍쨍한 햇살에 흙이 마를까 물을 주며 돌보아준다. 씨앗에서 갓 나온 싹들도 언제 크나 싶게 더디 크지만, 그래도 봄날은 풀도 더디 크고 마음도 몸도 덜 고되다.   


너브내상추, 개새바닥상추, 말이빨콩, 제비콩, 까치수수, 몽당수수, 쥐이빨옥수수...


이름만 들어도 옛이야기가 술술 나올 것 같은 씨앗의 이름들. 상추는 청상추, 적상추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이곳에서 만나는 상추는 이름도 모양도 맛도 제각각이다. 마트에 가면 노란 참외밖에 없지만, 작년에 처음 심어본 푸른빛 사과참외는 얼마나 달콤하던지. 친구들에게 한 두 개씩 보내뒀더니 다들 이렇게 맛있는 걸 왜 마트에 안 파느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매운 듯 달콤한 듯 크지도 작지도 않은 토종고추 수비초도 작년부터 심고 있는 토종씨앗이다.


이 씨앗들은 할머니의 손에서 손으로, 시집가는 딸의 지겟짐에 어머니가 한 꾸러미 싸서 넣어주었다는 씨앗 보따리에서 나왔을 것이다. 한해라도 거르면 그 귀한 씨앗 하나가 사라지니까 귀찮다하여 어느 것 하나 심지 않을 수 없었던 씨앗 농사. 매년 씨앗을 받고 그 씨앗을 다시 심는 일이 농부의 일이였다. 석과불식이라하여 씨과실은 먹지 않고 남겨둔다 하였다. 해마다 농사를 짓고 나면 먹을 것과 씨앗으로 남겨놓을 것을 구분하였다가 씨앗은 잘 보관해서 다음해 농사에 쓰기 때문에 30년 전에 심었던 것이나 지금 심었던 것이나 같은 맛이다. 그 맛이 씨앗 속에서 전해져오고 있어서 어르신들은 토종팥으로 팥죽을 끓여야 어릴 적 먹던 맛이 난다고 그러신다. 요즘 나오는 팥은 동글동글 때깔도 좋고 큼직하고 이쁘지만 옛날 그 맛은 아니란다.


식물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면 그 씨앗은 다시 새싹이 되는 것이 당연한 자연의 순리일텐데, 요즘 농사의 법칙은 조금 다르다. 농약사에 가서 씨앗 봉투에 든 씨앗을 2천원, 3천원 주고 사면 파랑색, 빨간색 총천연색 색깔 옷을 입은 씨앗들이 봉투에 들어 있다. 품종 개량을 해서 F1 종자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심지어 유전자조작씨앗도 나오는 세상이다. 유전자조작씨앗은 제초제 저항성이 있어서 제초제를 해도 살아남는다던가. F1 씨앗은 씨앗을 받아도 다음해 같은 열매가 달리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 농부들은 옛날처럼 씨앗을 이어가며 농사를 짓지 않고, 다들 씨앗이나 모종을 사서 농사를 짓는다. 모종을 키우는 것도 행여나 흙이 마를세라 추워서 얼거나 더워서 녹아버리거나 하는 온갖 변수들 때문에 여간 손이 가는 것이 아니라서 텃밭에 몇 주 씩 심는 것 정도야 사서 심는 것이 훨씬 편하긴 하다. 그런데 다들 씨앗을 사서 쓰면 어머니가 딸에게 전해주던 그 씨앗들은 다 어디로 갈까. 이미 사라진 씨앗들은 얼마나 많을까. 순창에도 토종씨앗으로 농사짓는 농부들은 거의 없다. 돈 되는 농사를 지으려면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순창에는 토종씨앗모임이 있다. 다른 지역에도 비슷한 모임이 있고, 씨앗 도서관이 있는 곳도 있어서 종묘상에 가지 않아도 씨앗을 빌릴 수 있다. 순창의 토종씨앗모임은 1년에 두어번 하는 모임이라, 봄철에 심는 씨앗은 겨울철에 나누고 가을에 심는 씨앗은 여름에 나눈다. 가져간 씨앗은 꼭 심어서 씨를 받아 다음 모임 때 들고 와야 한다. 나도 농사를 짓기 시작한 첫해부터 씨앗 욕심을 부려서 온갖 종류의 씨앗을 받아왔지만 첫해에는 땅이 딱딱해서 겨우 심은 아이들이 다 고사했다. 맛있게 먹고 씨앗을 남기기는커녕 제대로 키우지도 못해서 다음 모임에 얼굴을 못 들고 갔다. 오랫동안 농사지은 언니들은 새로 필요한 거 두서너 가지만 골라가시는데 씨앗 밑천이 없는 나같은 초보 농부들은 다 기억도 못할 정도로 많은 씨앗을 가져가놓고 정작 본전도 못 내고 오기 일쑤다. 둘째해에도 토마토 씨앗은 잘 말린다고 하다가 썩혀서 버리고, 피망씨앗은 바람에 날아갔고, 배추씨앗은 아마도 다른 배추랑 섞여 버렸을 것이고, 토종감자는 멧돼지가 다 먹어버리고, 참외 씨앗은 다음 것 먹을 때 챙기자 했다가 바빠져서 못 남기고 말았다. 실패를 거울삼아 다음번엔 조금 줄여서 가져올만도 한데 씨앗을 고르다보면 또 욕심이 생겨서 한아름 씨앗보따리를 안고 온다. 그래도 언니들은 잘 해보라며 격려도 해주고 조언도 해주셔서 '그럼 이것도 한번 해볼까?'하는 마음으로 하나씩 더 챙겨넣는 것이다.


순창토종토마토, 순창가지, 토종오이, 토종호박이랑 누에땅콩, 그리고 어금니동부랑 말이빨콩 같은 다양한 콩들. 씨앗의 무게를 알고나면 욕심을 버릴만도 한데 딱 올해까지만 욕심부려보고 내년엔 좀 내려놓을까보다. 봄의 텃밭엔 씨앗을 맺을 준비하는 배추꽃, 무꽃이 만발하고 새로운 씨앗은 온 힘을 다해 땅을 뚫고 올라온다. 그 힘으로 일년을 또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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