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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 | 연재 [이휘현의 책이야기]
태초에 김내성이 있었다
김내성 『마인』
이휘현(2018-05-15 10:40:31)



최근 2년 사이 애거서 크리스티(1890-1976)의 추리 소설을 짬짬이 챙겨 읽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소설들이 하나같이 재밌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내 수중에 쌓인 책이 십 수 권이다.
벨기에 출신의 괴짜탐정 에르퀼 포와로 그리고 독신여성이자 천재 할머니 탐정이기도 한 제인 마플(일명 '미스 마플')의 활약상을 보노라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이들 앞에서 모든 난제들은 깔끔하게 해결된다. 악은 그렇게 응징된다. 이 권선징악의 단순한 플롯을 다양한 인물군상의 욕망과 사연을 통해 정교하게 직조해내는 능력!
1920년에 출간된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을 시작으로 아주 오랜 시간 독자들을 사로잡아 온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문학은 그 발표된 양도 압도적이다(80권에 육박하는 그녀의 작품이 한국에서 모두 번역되어 나왔다는 건 얼마나 축복받을 만한 일인가!). 이제 작가는 세상에 없지만, 그녀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은 지금도 세계 어느 곳에선가 꾸준히 읽히고 있을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 연극 등으로도 끊임없이 재창조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영국이라는 나라는 애거서 크리스티라는 자산을 통해 자국의 문화 자부심에 대한 튼실한 기둥을 또 하나 세울 수 있게 된 셈이다.


나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문학을 탐독하며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한국에는 왜 애거서 크리스티나 아서 코난 도일 같은 추리문학의 빛나는 금자탑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일까'.
1980-90년대에 활발히 활동했던 김성종이라는 이름이 떠오르지만, 한국에 비해 장르문학이 제법 발달한 이웃나라 일본의 사례만 놓고 비교해 보더라도 한국 추리문학의 빈곤은 금세 눈에 들어온다.
이제 슬슬 한국 내 장르문학의 소비층이 늘고 있는 현실에서, 그리고 상상력에 대한 정치권력의 억압이 점차 사라져가는 이 시대에, 장르문학의 공급이 그 수요를 따를 수 없을 만큼 부실하다는 것은 이 나라의 문화적 빈곤 혹은 편향을 드러내는 안타까운 징후인 건 확실하다. 지나가버린 과거야 어쩔 수 없다지만, 이제라도 장르문학이 튼실하게 뿌리내릴 수 있는 대내외적 여건이 마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여하튼 이런 복잡한 상념에 빠져있던 어느 날, 우연히 '김내성'이라는 이름 석 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일제강점기의 한반도에서 추리작가로 활동했던 인물인데, 알고 보니 그의 이름은 당대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제법 맹위를 떨쳤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김내성의 작품을 한 번 읽어보기로 했다. 그의 대표작이자 한국 추리문학의 효시로 손꼽히는 1939년 작 <마인(魔人)>이 바로 그것이었다.


<마인>의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경성(서울)의 어느 화려한 가장무도회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식민지 땅 조선에서 백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미모의 무용수 '주은몽'. 백만장자 백영호와의 결혼을 앞둔 그녀에게 어느 날부턴가 목숨을 위협하는 유령 같은 존재 '해월'이 출몰한다. 만인의 스타를 죽이려는 살인귀의 등장. 그리고 여러 차례 전달되는 협박 편지. 언론은 이 사건을 연일 보도하고, 주은몽의 목숨을 해월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나선다. 추리소설가 백남수, 변호사 오상억, ××경찰서 임 경부와 박 부장 등등. 하지만 그들은 조연에 불과하다! 진짜 해결사는 따로 있었으니, 그는 바로 당대 조선에서 명탐정으로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던 '유불란'.


공명심의 노예가 되어 버린 사법주임 임 경부여! 귀하는 한시바삐 그 비열한 공명심을 걷어차 버리고 자타가 공인하는 명탐정 유불란 씨의 조력을 구하라! 이 중대 사건을 무사히 해결할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유불란 씨가 있을 뿐이다!

- 김내성, <마인>, 142쪽 -
 
유불란은 정교한 추리와 민첩한 판단력으로 주은몽 살해위협 사건과 이후에 벌어지는 연쇄살인의 실체를 파헤쳐 간다. 그리고 그 안에 주은몽을 둘러싼 가슴 아픈 과거가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주은몽의 주변인들 또한 모두 그녀의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물들이다. 그렇게 등장인물들 간 복잡하게 얽힌 사연들이 다양한 복선과 거듭되는 반전으로 폭로되면서, <마인>은 독자들에게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일제강점기 암울했던 시대의 공기를 담는 대신, 오로지 '읽는 재미' 하나를 붙잡고 장르문학 본연의 목표를 향해 내달린 듯하다. <마인>이 신문에 연재되던 당시 그의 작가로서의 변은 이렇다.


"…이 <마인>에서 '심오한 인생의 진리'를 발견한다는 것보다는 하나의 오락적 독서물로서의 성과를 기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6쪽)


이 순정한 목표는 8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독자인 나로 하여금 오롯이 공명하고 있음을 증명해주니, 어쩌면 그의 뜻은 꽤 성공을 거둔 셈이다. 무엇보다도 주인공이 매력적이다. 저 멀리 유럽에 에르퀼 포와로와 미스 마플, 셜록 홈즈가 있었다면 조선에는 바로 유불란이라는 토종 명탐정이 있었던 것이다!


김내성은 해방 이후에도 장르문학의 불모지인 한국에 추리소설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다양한 작품 활동을 벌여왔다. 하지만 1957년 마흔 여덟의 나이에 뇌일혈로 사망하면서 그의 노력은 미완으로 주저앉고 만다. 그 사이 그의 이름 석 자도 사람들에게서 서서히 잊혀갔다.
만약 김내성이라는 추리소설가가 좀 더 오래 살면서 수많은 추리문학을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길 수 있었다면, 그리고 그 작품 안에서 명탐정 유불란의 활약상을 더 볼 수 있었다면, 우리의 문화적 자부심은 좀 더 고취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한국의 장르문학은 지금보다 더 풍성하게 자리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가정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이른 죽음이 남긴 안타까움은 어찌할 수 없다.그렇다고 이 허망한 마음을 그냥 탄식으로만 끝낼 것인가.
그가 남겨놓은 <마인>이나 <청춘극장> 같은 근사한 작품을 읽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그 동안 불모지인걸로만 알고 있던 한국의 장르문학에 이런 자랑할 만한 유산이 남겨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 주변에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일본에서는 지난 2014년 <김내성 탐정소설선>과 <마인>이 번역 출간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장르문학을 말할 때 먼저 이렇게 얘기를 해야 할 것이다.


태초에, 김내성이 있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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