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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6 | 연재 [백제기행]
미지(未知)의 가야문화, 찬란했던 역사의 흔적
다시, 역사를 만나다 ③ |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정우(2018-07-13 12:00:51)



한반도 고대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 3국 중심으로 서술되었다. 가야까지 4개의 나라였지만 삼국의 그늘에 가려진 당시를 '삼국 시대'라 말하며 가야는 잊혀졌다.
해양무역으로 찬란한 철의 문화를 꽃피웠던 가야. 가야 역사에 대한 기록이 매우 적기 때문에 지난 1500년 동안 가야는 잃어버린 역사였다. 때문에 '신비의 나라', '잊혀 진 나라'라고 말한다. 역설적으로 고고학 자료가 풍부하게 남아 있어서 그 문화상의 복원뿐 아니라 역사의 재구성도 시도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가야 유적들이 발굴조사 되면서 가야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 그러나 영남지역 밖의 가야사에 대해선 아직 알려진 게 거의 없다. 특히 전북지역을 백제의 땅이라고 했지만 최근 들어 전북지역 가야유적들이 확인되면서 거대한 가야 문명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햇살이 빛나는 초록의 계절 5월. 찬란했던 가야의 역사를 만나기 위해 대가야 문화의 중심권역인 경상남도 고령과 해인사로 떠났다.


역사의 숨소리, 가야산과 해인사
산새의 재잘거림과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가 유난히 반가웠던 날. 가야산이 품고 있는 해인사를 찾아 첫 발걸음을 옮겼다. 가야의 역사를 온전히 마주하기 전 산책길에 기분이 들떴다. 가야와 가야산은 이름만 보아도 많은 시간을 함께 했으며 숨겨진 이야기가 가득해 보였다. 가야산이란 이름은 이 산이 옛 가야국이 있던 지역에서 가장 큰 산이었기에 자연스레 '가야의 산'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가야산에 위치한 법보사찰 해인사. 웅장한 규모의 전통사찰로 고려 고종 때 만들어진 대장경이 장경각에 보관되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해인사는 바다 해(海)와 도장 인(印)이라는 한자를 가지고 있다. 마치 대장경을 보관하는 걸 예상이라도 한 듯 '바다처럼 많은 도장'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해인사라는 명칭은 '해인삼매(海印三昧)'로 불교용어다. '바다에 풍랑이 쉬면 삼라만상 모든 것이 도장 찍히듯 그대로 바닷물에 비쳐 보인다'는 뜻이다. 모든 번뇌가 사라진 부처의 마음속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업이 똑똑하게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번뇌도 조금 사라지길 기대해본다.
주차장에서부터 일주문까지는 제법 올라가야 하는데, 그 길에 성보박물관이 있다. 이상하게도 현금으로만 입장권 구매가 가능한 박물관이지만 해인사의 귀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팔만대장경을 비롯, 다양한 목판을 전시해 우리 전통의 우수한 목판인쇄기술을 알게 한다. 실제 팔만대장경은 가까이에서 볼 수 없으니 여기 전시된 모조품으로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걷기 좋은 산길을 걸어 올라가니 일주문이 떡 하니 보였다. 가장 첫 번째로 보이는 문으로 소박한 아름다움이 주위 경치와 어우러져 일품이었다. 일주문으로 들어서니 다른 경관이 또 나를 반겼다. 소박한 아름다움의 일주문이었다면 아름드리 큰 나무들이 장엄한 풍경을 만들었다. 장대한 나무들이 절을 지키는 문지기처럼 서있었다. 일주문을 지나 해인사의 실질적인 문인 봉황문을 지나고 해탈문 그리고 범종각과 구광루를 지나야만 비로소 대적광전을 볼 수 있다.
해인사는 화엄경을 중심 사상으로 창건하였으므로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나자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그 위에 드디어 팔만대장경과 장경판전이 있다.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는 장경판전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판전은 대장경을 보관하는 건물 총 4동으로 구분되어 있다. 대장경판을 보관하기 위해 건물을 서남향으로 지어 직사광선이 직접 닿지 않게 하고, 소금, 숯과 횟가루, 모래를 차례로 놓은 판전 내부 바닥은 목재경판의 보관에 알맞은 평균 습도를 유지하게 한다. 이는 경판의 변형을 줄일 뿐 만 아니라 해충의 침입까지도 막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또 눈에 띄는 구조물이 있는데 바로 창문이다. 창문의 크기와 모양을 달리하여 자연적으로 통풍이 되도록 하였다.
장경판전의 창문 틀 사이로 보이는 팔만대장경판은 오랜 세월을 무색하게 할 만큼 잘 보관되어 있었다. 대장경이란 범어로 '세 개의 광주리'라는 뜻인데, 부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경(經), 부처를 따르는 사람들이 지켜야 알 도리를 밝히고 있는 율(律), 부처의 가르침을 해석하고 있는 론(論)으로 구성된다. 세계적으로 여러 종류의 대장경이 있지만 그 완성도 면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바로 팔만대장경이다. 경판 수가 무려 8만개가 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해, 흔히 '8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나 탈자 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다시 산길을 되짚어 내려왔다. 아까보다 더 물소리가 반갑게 들렸다. 하산하는 길에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초등학생시절 이후 원효 대사의 해골 물에 얽힌 이야기를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해골 물이야기는 사실 허구이고 실제론 원효가 토굴인 줄 알고 편히 잠을 잤는데 일어나 보니 그곳이 무덤임을 알게 되었다 한다.  그 일을 통해 원효대사는 진리는 밖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충격적인 이야기는 잠시 뒤로 한 채 가야산이 품어준 나물이 곁들어진 산채비빔밥을 맛있게 먹었다. 이제 본격적인 가야 이야기를 듣기위해 자리를 옮겼다.


침묵을 깬 대가야의 숨결
대가야읍을 병풍처럼 감싸는 산 위에는 대가야시대의 주 산성이 있다. 그 산성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위에는 대가야의 성장과 멸망의 시기에 만들어진 대가야 왕들의 무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그 모습은 마치 공룡의 등에 돋아난 비늘 같았다. 천손사상 때문일까. 대부분의 고분들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고, 높은 곳엔 더 큰 고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고분은 사람의 매장시설이다. 이 매장시설은 단순히 무덤 자체의 것으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무덤의 주인의 많은 것을 보여주는 형상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고분은 봉분의 형태, 봉분의 재료, 유구의 재료, 그리고 규모와 위치, 부장유물의 질과 양에 따라 당시의 문화와 역사복원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분은 당시의 사회 현상들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산동 고분군 중 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된 대규모 순장무덤인 지산리 44호분의 내부를 원래의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은 대가야왕릉전시관에 들어갔다. 실물크기로 복원된 44호분 속으로 들어가니 실로 어마어마했다. 무덤의 구조와 축조방식, 주인공과 순장자들의 매장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가야에선 순장문화가 있었는데 이 44호분은 살인순장으로 보여 진다. 사후세계를 믿었던 가야인들은 죽어서도 함께 할 가족이 필요했고 보필 할 신하들이 필요했다. 온전히 누운 시체는 의도적으로 순장 주인공을 위해 살해 한 것이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묻혀있는 44호 분에선 실재 음식도 발굴되었다고 한다.
그 옆에 자리한 대가야역사관에서는 대가야는 물론 고령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대가야의 도읍지인 고령에 박물관이 세워지게 된 것은 지산리 고분에 대한 발굴 조사 성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당시 대가야의 문화가 드러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지금의 고령향교가 자리한 언덕의 한쪽 기슭에 '대가야유물전시관'이라는 아담한 전시관을 열었던 것이 오늘날의 대가야박물관의 전신이 되었다.
고령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부터다. 이를 뒷받침하는 확실한 증가가 바로 '장기리 암각화'다. 알터 마을 입구, 암벽에 새겨진 바위그림이다. 바위그림은 암각화라고도 하는데, 암각화란 선사시대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이나 바램을 커다란 바위 등 성스러운 장소에 새긴 것을 말한다. 전 세계적으로 암각화는 그 지역에서 활동한 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자료로 볼 수 있다.
장기리 암각화에서 보이는 바위그림들은 동심원, 십자형, 가면모양 등이 있는데, 동심원은 삼중원으로 총 4개가 있다.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태양신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십자형은 사각형 안에 그려져 있어 전(田)자 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부족사회의 생활권을 표현한 듯하다. 가면모양은 가로 머리카락과 수염 같은 털이 묘사되어 있고, 그 안에 이목구비를 파서 사람의 얼굴을 표현한 것으로 부적과 같은 의미로 새긴 듯하다. 상징과 기호를 이용해 제단을 만들고 풍년을 기원하며 태양신에게 소원을 빈 농경사회 신앙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암각화가 있는 장소에 가보니 다소 이질감이 많이 느껴졌다. 아직 정비되지 않은 주변경관은 물론 암각화를 고려하지 않고 설치한 펜스가 아쉬움으로 남았다.


전주로 돌아오는 중에, 조법종 교수님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바로 도깨비 이야기다. 도깨비를 생각하면 머리위에 솟은 뿔과 그들이 휘두르는 도깨비 방망이, 그리고 노래가 생각난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방망이로 두드리면 무엇이 될까.
금 나와라 와라 뚝 딱! 은 나와라 와라 뚝 딱!"


도깨비의 뿔은 일본의 조선 민족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 고전과 민담을 한국의 것처럼 덮어씌우면서 생겨난 이미지다. 사실 도깨비의 어원은 '돗+아비'의 합성어다. 돗은 불이나 씨앗의 의미로 풍요를 상징하는 단어이고, 아비는 성인 남자를 상징한다. 자연스럽게 선진 철기 문화로 화려한 시대를 구가했던 가야인들의 이미지와 겹쳐졌다
가야는 철(鐵)의 왕국이다. 고대 가야국이 국가적으로, 그리고 우리나라 고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도 바로 철의 대량생산 때문이었다. 가야지역은 이미 변한시대부터 철을 대량생산해 이웃지역에는 말할 것도 없고 멀리 바다 건너 일본에 까지 수출하였는데 이러한 전통이 가야에 와서 더욱 활성화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가야지역의 유적과 유물이 신라 백제에 못지않음에도 이에 대한 체계적인 보존과 조사연구작업은 상대적으로 뒤떨어져 있다. 가야문화권 개발은 문화유적의 발굴 보존 정비뿐만 아니라 발굴 조사된 자료를 정리, 집대성하는 일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더불어 전북지역의 가야사에 대한 대대적이고 체계적인 조사를 병행하여 경남가야권과 전북가야권 사이 단절된 끈을 연결하여 제대로된 한국의 가야사를 정립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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