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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6 | 특집 [이하연의 귀촌이야기⑤]
달맞이꽃도, 개망초도 풀이다
이하연(2018-07-13 12:12:10)



풀은 인정사정이 없다. 풀도 자랄만큼 자라고 작물도 자라게끔 해주면 굳이 애써 풀을 매지 않아도 될텐데. 5월 봄비가 잦아지자 작물도 크지만 풀은 더 빨리 자란다. 밀밭의 환삼덩굴도 엄청난 속도로 이삭 팬 밀을 타고 오른다. 바쁘다는 핑계로 밭에 가질 못하다가 낫 하나 들고 환삼덩굴과의 전면전을 선포하였다.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덩굴을 뽑아내었다. 한 자리에 앉아 5분은 뽑아대야 한 걸음 옮길 수준이니 수확하는 6월이 올 때까지도 못 끝낼 일이긴 하다. 

 
"뭣혀~?"


익숙한 봉선댁 할머니 목소리가 조용한 산속 밭에 울려퍼지고 고개를 드는 순간 정신이 번쩍 난다. 할머니 어깨에는 익숙한 농약통이, 손에든 막대기에선 이미 정체모를 액체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낫 하나로 풀을 이겨들려고 했던 일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할머니~ 풀약 치지 마세요. 제가 여기 예초기로 벨 테니까 풀약 치지 말아주세요"


황급히 달려가 할머니께 사정을 하니 할머니는 "그럼 이 무건 것을 도로 들고 가란 말여?" 이러시다가 약통 무게를 못 이기고 벌러덩 뒤로 넘어가신다. "아이고 이를 어째?" 80세도 한참 넘으신 왜소한 체격의 할머니가 20키로 쯤 되는 농약통을 이고 평소에는 고라니랑 멧돼지나 지나가는 길에 풀을 없애시겠다고 나타나신 것이다. 내가 말리는 통에 뒤로 넘어가셨으니 이 일을 어쩌나 머리 속이 하얗게 되었는데 다행히 몸이 가벼워서 그런지 별 탈이 없었다.


"긍게 여기다 풀약 치지 말라고? 알았네 글믄 난 여기 신경 안 쓸테니 알아서 혀"


이러고 "호랭이 물어가네" 하시며 웃으신다. 무거운 약통을 사륜차(사발이) 있는 곳까지 들어다 드리고 나니 한숨이 폭 나온다.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환삼덩굴과의 전쟁도 이제 막 시작한 판에 길에 예초기질까지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말았는지. 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밀밭 가의 길이 누렇게 죽어있는 꼴은 못 보겠다. 지금은 온 마을이 풀과의 전쟁을 선포했는지 논둑이며 길가의 풀들이 누렇게 말라간다.
일전에는 이웃 마을 할머니가 본인의 200평 밭에 풀약 좀 쳐달라고 부탁을 하셔서 일을 도와드린 일이 있다. 몇 사람에게 부탁을 하다 거절을 당하고 그 일이 나한테까지 온 것이다. 약통을 등에 매고 막상 할머니 밭으로 가니 전통 휠체어를 타고 요양보호사님 도움으로 밭에 오시는 상황이다. 어디서 본 것은 있어가지고 약통에 물이랑 약을 섞어서 기와 뿌려드리는 거 꼼꼼하게 칙칙칙 뿌려드렸다. 한두시간 하면 다 하는 일인데 오죽하면 이웃마을까지 부탁을 하셨을까. 일 다하고 돌아서는 길에 할머니는 다시 만원을 손에 쥐어주신다. 일 해줘서 고맙다고. 과부 형편은 홀아비가 안다 했던가. 혼자 하기 힘든 일을 이리저리 부탁하는 일이 일쑤인 나는 문득 할머니 심정이 이해가 된다. 거동을 하기 힘든 상황에도 뭐라고 심고 가꾸는 평생 농사꾼 할머니들의 풀약 사랑에는 3년차 소꿉놀이 농부가 쉽게 타박할 수 없는 애절함이 있었다. 할머니들은 풀이라면 질색을 하셔서 밭에 풀 한포기 자라 있는 꼴을 못 보시지만, 그래도 나는 달맞이꽃도 아직은 예쁘고 개망초도 여전히 이쁘다. 바라보다가 훅 뽑아버리기는 하지만... 그렇게 뽑는 건 할머니 머리에 흰머리 하나 뽑는 수준이라 풀 입장에서는 코웃음 칠 일이다.
밀밭 가는 길에 있는 작년의 참깨밭들은 모두 고추밭이 되어 지지대를 세우고 있다. 순창 장에 고추 모종이 동나서 다들 모종 구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작년 고추값이 비쌌다고 올해도 그렇지는 않을텐데 참 희한하게도 사람들 심리가 그렇다. 쓸데없이 돈도 안 되는 밀이나 심어놓고 하릴 없이 밀밭을 매고 있는 꼴이 어르신들 보기에는 얼마나 호랭이 물어갈 일일까. 그래도 오늘 밭에 놀러온 도시 어린이가 밀알 하나를 까 먹어보고는 "맛있다" 하니 며칠 낫질한 것이야 무슨 대수랴 싶기도 하다. 사는 게 뭐 별건가. 이만함 되었지. 매일의 노동이 꼭 돈으로 보상을 받아야한다는 생각은 조금씩 땅에 묻어버리기로 했다. 할머니와의 평화로운 관계를 위해 예초기 작업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할 일 목록에 일거리 하나를 더 얹는다. 사실 다시 생각해보면 할머니가 내 말을 들어주시고 애써 지고 온 풀약을 들고 온 길을 되돌아 가신 일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풀씨 하나도 지긋지긋하게 미워하는 할머니 입장에서 몇 걸음 약 찌끄리면 해결 될 일을 다 못하고 돌아서신 일은 얼마나 대범한 일인가. 이웃 동네에서는 논둑 예초기질을 양날칼이 아닌 톱니날로 했다고 빌려준 논을 도로 회수해가신 땅주인 어르신도 있다던데. 본인 말 안 들으면 사람 취급도 안 하는 경우도 허다한 마당에 젊은 사람 호랭이 물어가는 소리를 들어주시는 할머니가 갑자기 너무나 고마워져서 일거리 하나 더 얹은 것 쯤이야 싶어지기도 한다. 다음주엔 날 선선한 날 예초기 둘러매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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