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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6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은유의 세계를 넘어 실재의 세계로
<버닝>
김경태(2018-07-13 12:16:40)



소설가 지망생으로 유통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종수(유아인)'가 나레이터 모델로 일하는 어린 시절 친구 '해미(전종서)'와 마주친다. 종수는 해미가 손에 쥐어진 경품 쪽지로 당첨된 싸구려 여성 손목시계를 그녀에게 선물한다. 해미는 아프리카에 다녀온다며, 자신의 자취방에 있는 고양이를 돌봐달라고 종수에게 부탁한다. 그러나 그 고양이는 좀처럼 그에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폭력 사건으로 입건 된 아버지를 대신해 고향집을 돌본다. 가끔씩 전화가 걸려오지만 대꾸가 없다. 돌아온 해미는 그곳에서 만난 '벤(스티븐 연)'을 종수에게 소개한다. 젊은 나이에 직업조차 불분명하지만 부유한 삶을 누리고 있는 벤이 종수는 못마땅하다. 심지어 자신이 짝사랑하는 해미와 가깝게 지내고 있다.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봤던 해질녘의 노을처럼 사라지기를 갈망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 사라짐은 무서운 죽음과는 다르다. 그러나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은 노을이 사라지는 과정만큼 아름다울 수 없다. 그 사라짐에는 죽음의 민낯이 부재하다. 죽음이 실재라면 사라짐은 그 은유이다. 그녀는 육체적 굶주림인 '리틀 헝거'가 삶의 의미에 대한 굶주림인 '그레이트 헝거'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린 아프리카 춤을 춘다. 그것은 '굶주림'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은유적 의미로 확산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녀는 은유의 세계에 도취되어 있다. 그리고 우물에 빠진 자신을 구해준 이가 종수라고 주장하지만,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종수의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집을 나갔다. 당시 그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어머니의 옷을 마당에서 태워야만 했던 가슴 아픈 기억을 털어놓는다. 벤은 자신이 두 달마다 한 번씩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말하며, 조만간 종수의 집 주변에 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울 것이라고 얘기한다. 벤은 자신의 행위를 자연의 원리, 즉 신의 그것과 동일시한다. 그들이 떠난 얼마 후, 해미가 전화를 받지 않자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종수는 마을의 비닐하우스를 뒤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불타버린 비닐하우스는 없다. 아울러 주변인들에게 우물이 존재했는지의 여부를 묻지만, 그들의 기억은 서로 다르기에 믿을 수 없다. 그 우물조차 은유였을까. 아니면 인간의 기억이란 원래 은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가. 그는 활활 타오르는 비닐하우스 앞에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서있는 꿈을 꾼다. 그에게 '화염'은 상실의 트라우마와 맞닿아 있다. 그 불은 꿈속에서조차 끔찍한 실재이다.

해미는 자신이 원했던 바대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벤 역시 그녀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고 말한다. 종수는 벤을 의심하며 아버지의 트럭을 끌고서 밤낮으로 그를 미행한다. 비로소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것이 은유적 의미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벤이 통제하던 은유의 세계를 넘어 그와 맞서기 위한 실재의 세계로 점차 접어든다. 아무 말이 없던 수화기 너머에서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벤의 집에서 해미의 고양이가 모습을 드러내고 그녀의 손목시계가 발견된다. 그제야 그는 깔끔하게 정리된 해미의 방에서 노트북을 두들기며 창작에 골몰한다. 그 창작의 원천은 실재의 세계 안에 있다.

영화는 끝까지 벤이 살인을 저지르거나 시체를 유기하는, 자극적이며 그만큼 실재적일 수 있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연쇄살인을 정당화하는 은유의 세계를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수는 삶과 죽음을 가볍게 여기며 쾌락에 의존하는 은유의 놀이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벤을 칼로 찌른다. 그것은 스스로를 신으로 비유하는 허상의 거부이자 파괴이다. 종수는 쓰러진 벤을 차에 태우고 자신의 옷가지를 모두 벗어 넣어 진짜 불을 지른다. 그는 벌거벗은 채 트럭을 몰며 불길에 휩싸인 차를 지나쳐 간다. 본질을 잃고 허공에 떠돌던 은유들이 불타오른다. 인간은 결코 노을처럼 사라질 수 없다. 인간의 죽음은 그런 식으로 은유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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