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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9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사회적 규범을 내려놓고 가족의 본질에 대해 사유하다
어느 가족
김경태(2018-09-17 10:59:15)



<어느 가족>에는 사회적 규범에 비춰봤을 때 인정받을 수 없는 비정상적인 대가족이 등장한다. 삼대로 구성된 대가족처럼 보이지만 여섯 명의 식구들은 사실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다. 그들은 비좁고 허름한 집에서 북적이며 요란스럽게 식사를 한다. 열악한 주거 환경은 차치하더라도, 그 가족은 이미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없을 만큼 기형적이다. 그 집은 원래 할머니 혼자서 살던 곳이며, 그녀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두를 거둬들여 가족의 외양을 띠며 살고 있을 뿐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런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형태의 가족을 제시하며 그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가장의 역할을 맡고 있는 '오사무'는 다리를 다쳐 공사장 일을 쉬게 되고, 그의 아내 '노부요'마저 세탁공장에서 정리해고 당하면서, 식구들은 도둑질과 할머니의 연금에 의지하며 산다. 그리고 갓 성인이 된 '아키'는 퇴폐업소에서 일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또한 아무도 그런 그녀를 비난하지 않는다. 심지어 오사무와 노부요는 '린/쥬리'를 친부모로부터 학대받고 있다는 이유로 몰래 데려와서 돌본다. 이처럼 이 가족에게는 도덕적 감수성이 한참 결핍되어 있는 듯 보인다. 영화는 가족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감히, 그리고 다분히 의도적으로 규범과 도덕을 허식의 차원으로 떨어트린다.

어린 소년 '쇼타'는 오사무와 함께 도둑질을 한다. 경찰의 질타에 오사무는 그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그것 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면, 그는 쇼타를 그저 이용한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엄연한 범죄행위의 대물림은 아버지로서의 자격에 의구심을 들게 한다. 오사무에게 쇼타와 함께 하는 도둑질은 부자간의 유대를 드러내는 자신만의 방식이었다. 도덕적 잣대를 내려놓고 바라봤을 때, 그들의 도둑질은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그들이 부자 관계를 열어젖히는 행위였다. 또한 노부요의 입장에서는 린을 유괴한 것이 아니라 버림받은 아이를 '주어서' 보살펴줬을 뿐이다. 그것은 법적 논리에 부합하지 않지만, 그 진심에 감응한 이들은 설득당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법과 절차를 무시하며 꾸려진 가족은 가족의 구성요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그럼에도 가끔씩 망각하고 또 소홀하게 여기는 그 정서적 결속만을 과잉시킨다.


잠들었던 할머니가 아침이 되어도 깨어나지 않는다.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던 카메라가 이번만큼은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는다. 마치 죽은 이의 얼굴을 가족만이 마주하며 애도할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주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공식적인 가족이 아니기에 공식적인 장례를 치를 수가 없다. 린까지 포함해서 모두가 합세해 땀을 흘리고 옷을 더럽히며 집안에 땅을 판다. 그들은 장례를 매우 내밀하며 사적인, 어쩌면 그것의 가장 근원적인 형태로 돌려보다. 가족들 외에는 아무도 개입하지 않기에, 마지막까지 그들만의 친밀성이 오롯이 돋보일 뿐이다. 그래서 오사무는 자신이 죽으면, 마당의 작은 연못에 묻어달라고 말할 수 있다.


마트에서 물건을 훔쳐 도주하던 쇼타는 다리를 다친 채 경찰에 붙잡힌다. 가족들은 병원에 입원한 쇼타를 버리고 야반도주를 시도한다. 가족을 지키려 거짓말을 하던 쇼타는 상처를 받고 흔들린다. 그러나 그 역시 남은 가족을 지키기 위한 피치 못할 선택임을 이내 이해한다. 오사무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숨기지 않으며, 그를 위탁가정으로 보낸다. 할머니의 말대로, 피가 섞이지 않았기에 각자의 욕심에 따라 서로에게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아도 된다.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에게 따라붙는 희생의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다. 우선시되는 강한 유대와 부차적인 약한 유대, 그 사이에서 그들은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구축한다. 그리고 주변을 의식하지 않은 채 서로의 관계 안에서 충만할 뿐이다. 정상과 비정상을 따지기에 앞서 가족의 출발점은 바로 그런 관계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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