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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9 | 연재 [이하연의 귀촌이야기⑧]
반농반X
이하연(2018-09-17 11:00:35)



"귀농이에요, 귀촌이에요?"
순창에 내려올 때 초기에 많이 받았던 질문이다. 그때 뭐라고 답을 했었지? 아마 "아직 잘 모르겠어요. 농사는 지을 줄 모르지만 조금은 짓고 싶고, 뭐라고 먹고는 살아야하는데, 농사로는 먹고살기 어려울 거 같고..." 이러면서 말을 흐렸을까?
사실 그게 뭣이 중요할까. 첫해엔 어차피 땅도 없고 농사는 지을 줄도 모르고... 일단 귀촌이라 하자. 농협에서 하루 6만원을 주는 밤 선별 아르바이트를 한 달 간 하기도 하고, 옆 방 친구는 면사무소 단기 계약직으로 역시 최저시급을 받고 일을 하기도 했지만, 괜찮은 지속가능한 일자리는... 아마 있었다면 지금 시골 인구의 대다수인 7~80대 노인의 아들딸들이, 젊은 사람들이 이곳을 떠나지 않았겠지.
그럼 역시 귀농인가? 뉴스를 보면 가끔 몇 억 버는 청년 농부도 나오던데... 어찌어찌 땅을 구해서 밀 농사를 지어 첫 수확을 했지만, 수확한 걸 다 팔아도 돈 백만원도 손에 못 쥐고, 콤바인, 트랙터 삯도 안 나온다. 남들은 좋아하는 등산이며 낚시며 캠핑이며 수백만원을 쓰고 시간도 쓰는데 나는 농사를 좋아하니까 그냥 취미라고 생각하자고 다독다독 거리는 취미농 수준이니 생계를 위한 일을 구하는 것은 다시 필수 옵션이 된다. 귀농이건 귀촌이건 둘 다 오롯이 선택할 수 없는 팍팍하고 가난한 시골살이가 이곳의 리얼 라이프다. 다행히(!) 요즘은 신조어가 생겼다. 반농반X. 한 가지만 해선 먹고 살 수 없는, 주로 가진 거라곤 몸뚱아리뿐인 청년들의 선택지. 그래서 나도 요즘은 "저는 반농반빵을 해요."라고 짧은 답변을 하곤 한다. 농사를 짓지만 빵을 만들어 근근히 먹고 산다. 덕분에 어느 한쪽에도 당당하게 명함을 못 내미는 수준이지만, 여전히 어느 한 쪽도 버리지 못하고 다 하느라고 쉴 새 없이 바쁜 것은 또 다른 딜레마이다. "이럴려고 내려온 시골이간디..."라고 너도 나도 입버릇처럼 중얼거리지만, 여기서나 저기서나 여유로운 시골 생활은 아마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아니었나보다. 사람이 가진 조건에 따라 신은 다른 답이 적힌 시험지를 나눠주신다는 것을, 처음부터 그림같이 예쁜 집과 문만 열면 있는 작은 텃밭과 적게 벌고 적게 쓰는 여유로운 소확행이나 킨포크 라이프는 답안지 문항에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뒤늦게 찾아오는 깨달음이다. 애초부터 '적게'의 액수는 사람마다 달랐던 것일지도. 그래서 누구에게도 참 권하기 어려운 선택이 귀농귀촌, 혹은 반농반X.
뭣도 없이 사는 우리는 그래도 참 재밌게 논다. 친구라도 만나려면 주머니에 몇 만원이라도 꽂아넣고 맛집을 검색하거나 유흥거리를 찾아가는 도시의 삶도 가끔은 그립다. 하지만, 지나가다 "언니~"하며 허물없이 문 열고 들어서도 "밥은 먹었니?"하고 저녁밥을 얻어 먹을 수 있는 이웃은 삶의 행복 지수를 5 포인트 정도 올려줄 것이고, 비가 오면 파전 지글지글 부치는 사진 올려놓고 유혹하는 옆 동네 언니네 마실 가서 대낮부터 저녁까지 줄창 노는 것은 그냥 덤이다. 물론 술은 집에서 직접 담근 것으로! 그럴듯한 맛집은 없어도 갓 딴 옥수수를 쪄서 먹는 맛은 옥수수를 키운 사람이 아니면 모를 것이고,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노지 딸기, 노지 토마토를 새빨간 순간에 따서 한입 먹는 감흥은 어느 미식가래도 부러워할 순간이니 행복 지수는 또 업그레이드된다. 시골에 살아서 행복해요~ 라고 말할 수 있는 꺼리들은 지금 SNS에 접속해서 이웃들 담벼락 한번만 훑으면 몇 가지는 나오겠지.
어쩌면 우리는 뜨거운 여름의 햇살을 잠시 피해 그늘에 숨듯이 고단한 농사와 시골살이에 차양막 하나 쳐 놓고 안도하고 있는 걸지도. 정신을 차리고보면 여전히 비가 새는 허름한 셋집에서 근근히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삶의 청승이 그림자처럼 붙어 있으니까. 소박하고 확실한 행복이라니. 이곳에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농사는 확실한 수입을 보장해주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위태로운 원금이 상환되지 않는 펀드이자 임금을 주지 않는 직장이다. 어쩌면 도시에서의 삶이 더 소확행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반농반X란 무엇을 해도 그지꼴을 면치 못하는 청년들의 서글픈 옵션이 아닐까.
너무 더워서 농사고 뭐고 그냥 도망가고만 싶었던 긴 여름의 끝. 이제 찬바람이 들어온다. 가로등도 없이 캄캄한 밤에 시원한 밤바람 맞으며 고개를 들면 쏟아질 것처럼 별이 총총한 여름과 가을 사이. 아, 이제 연잎을 따러 가야지. 찹쌀로 고두밥을 찌고 누룩을 치대 넣어 갓 따온 연잎에 술밥을 싸서 처마에다 대롱대롱 매달아 놓고 낮에는 뜨거운 햇살을, 밤에는 시원한 바람을 맞고 달콤한 포도향 내는 술이 되걸랑 같이 마시자고 언니들을 불러야겠다. 맛있는 안주를 해 달라고 해야지. 비가 새는 지붕은 올해 장마가 지났으니 나중에 생각하자. 며칠 전에 심은 메밀은 싹이 잘 나고 있을까. 올해 농사는 내년보다는 낫겠지. 많이 수확하면 메밀면을 뽑아서 살얼음 뜬 동치미육수에 쩡 하니 정신 번쩍 드는 한겨울 냉면을 해 먹어야지. 그냥 그렇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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