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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사랑을 위한 기나긴 이산의 연대기
마담B
김경태(2018-12-31 11:28:42)



중국과 인접한 함경북도 회령시의 '마담B'는 돈을 벌기 위해 남편과 두 아들을 남겨두고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밀입국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는 브로커에 속아 가난한 농부 '진씨'에게 아내로 팔려간 것이었다. 가난한 이는 더 가난하고 절박한 이를 착취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하여 그녀 역시 생계를 위해 탈북 브로커를 비롯한 여러 불법적인 일들에 가담한다. 돈을 벌어서 돌아갈 작정이었지만, 벌써 10년째 진씨와 부부로 살며 시부모를 모시고 있다. 그러나 무국적의 그녀는 그와 합법적인 혼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가짜 한족 신분증은 그녀가 입을 열어 서툰 중국어를 뱉어내는 순간 들통이 나 버린다. 그녀가 취득할 수 있는 국적은 한국뿐이다. 이를 위해 그녀는 진씨에게 귀환을 약속하며 머나먼 태국 방콕의 탈북민 수용소를 거쳐 마침내 한국에 들어온다. 그곳에는 그녀보다 앞서 도착한 두 아들과 전남편이 기다리고 있다.


이산의 삶은 환대의 문제와 곧바로 결부된다. 먼 길을 돌고 돌아서 당도한 한국은 그녀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한민족이 살지만, 그녀를 환대하는데 실패했다. 국정원에서는 마약 경력이 그녀를 간첩 취급하면서 한동안 구금한다. 그녀는 그러한 의심어린 눈초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 한 채, 감시 속에서 정수기 청소 일을 한다. 불법체류자에서 브로커로, 탈북민에서 간첩으로 소외와 배제의 이름에 겹겹이 갇힌 그녀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란 만만치 않아 보인다. 먼저 입국했던 아들들과 전남편 역시 국정원으로부터 똑같은 취급을 받으면서 인간적인 모멸감에 치를 떨었다. 그 노골적 적대에 막내아들은 카메라를 향해 살의를 털어놓기도 한다. 감시의 주체만이 바뀌었을 뿐, 이곳에서도 인간적인 환대를 기대할 수 없다.


반면에, 중국의 진씨는 언어가 다르고, 또 애초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같이 살게 됐지만, 그녀를 진심으로 환대해줬다. 시부모도 그녀의 무국적 신분을 문제 삼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당신들처럼 자신의 아들과 함께 늙어갈 며느리를, 그리고 그 아들과 며느리가 늙으면 보살펴 줄 손주를 원할 뿐이다. 돌봄의 행위에는 국적도, 불법도 없다. 더욱이, 어디에도 소속감을 갖지 못할 때, 그 어디에서도 환대받지 못할 때, 지금 내 곁에 있는 이의 사랑이 더 간절해진다. 사랑 앞에서 조국의 의미와 국가의 경계는 무의미해져 간다. 새삼스레, 사랑은 피보다 진하다.


이산의 연대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담B는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도 선택하지 않으며, 대신 중국으로 돌아가 진씨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한다. 북한과 중국뿐만 아니라 남한에서도 살아 본 그녀에게, 민족과 이데올로기의 차이는 사랑 앞에서 보잘 것 없다. 아들은 그녀가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곳은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의 생활에 신물이 나버린 마담B는 완강하다. '좋은 나라'에 산다고 해서 자신의 모든 치부를 감싸고 이해해준 진씨를 버릴 수 없다고 말하며 그와 함께 살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진씨는 그녀가 돌아와 마을 주민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식을 올릴 날을 고대한다.


마담B는 노래방에서 한국의 구슬픈 유행가를 부르며 그를 향한 그리움을 달랜다. 쉼 없이 그녀의 기나긴 여정을 좇아 온 영화는 그렇게 한편의 순애보처럼 끝을 맺는다. 그녀는 언제쯤 그 가혹한 난민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 사랑하는 사람 곁에 정착해서 살 수 있을까. 바야흐로 달달한 사랑 노래가 사방에 넘쳐흐르지만,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당당하게 함께 살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조차 쉬이 허락되지 않는 아이러니한 시대이다. 그녀의 순애보 앞에서 민족과 이데올로기, 자유와 평등의 가치는 희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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