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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 | 연재 [유주환의 음악이야기 ②]
고객의 단순변심
유주환(2019-02-25 14:55:59)

"예술도 밥을 먹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니 밥벌이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 (중략) 하지만, 한 문인이 취직을 하지 않는다면 그가 작가로서 성공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 (중략) 대통령이 어디선가 가수 싸이를 창조경제의 모범으로 꼽았다는데 싸이가 4대 보험 직장인인가.
나는 창조경제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없지만 창조를 모른다고 할 수는 없다. 정장을 하고 4대 보험 직장에 출근하는 것만이 취업이 아니란 것을 아는 것이 창조의 시작이다."

황현산 '예술가의 취업' 중에서, 2013년 



1

"왜냐하면, 산이 거기 있으니까요."


에베레스트는 어렵고 고단한 도전입니다. 당연합니다. 가벼운 등성이 하나도 부담스러운 저 같은 사람에게, 에베레스트란 필설이 담을 수 없는 극단일 것입니다. 왜 그렇게 죽자 하고 산에 오르는가, 라는 기자의 질문에 맬러리George L. Mallory는 산이 거기 있어서, 라 대답했습니다. 그때 인류는 에베레스트에 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어디로 올라가야 하는지, 어떻게 챙겨 입어야 하는지, 살아남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 절박한 질문들에 대한 어떤 답이라도, 몸으로 도전하고 나서야 얻게 될, 목숨을 담보한 지혜였습니다. 그 일을 맬러리가 한 겁니다. 지금까지 많은 산악인이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고 그 감격이 사진으로 남아있습니다. 제가 그 사진들에서 주목하는 것이 더 있습니다. 산악인의 옷과 장구 여기저기 붙은 기업 로고입니다. 거개가 낯설지만, 익숙한 회사 이름도 보입니다. 목숨 건 등정에 몸 하나 추스리기도 힘든데, 저 많은 광고까지 둘러 오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너른 명성의 우리 작곡가가 많습니다. 윤이상, 진은숙, 박영희가 그렇습니다. 재독 작곡가 박영희의 강연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강연은 주로 자기 음악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졌습니다. 두 시간 강연에 정신이 몽글몽글해질 무렵 누가 질문합니다. "선생님은 왜 작곡을 합니까?" 순간 모든 시선이 질문자를 향했습니다. 뭐 그딴 빌어먹을 말이 있는가. 거장을 모셔놓고, 왜 작곡을 하냐고? 뜬금없는 그 물음의 찰나에, 가능할 답변 몇이 떠오릅니다. 예술을 위해서, 나를 표현하려고, 음악은 고귀하니까. 


그런데 박영희의 대답에 주저가 없습니다. "나? 먹고살려고."


저는 그때 스물 몇이었고, 작곡가 박영희는 쉰 몇이었고, 그는 쉰 몇 만큼 거리낌이 없었고, 저는 스물 몇 만큼 당황했습니다. 솔직히 불쾌했습니다. 그때 저의 열정과 기준으로는, 생계로 작품을 쓴다는 작곡가의 대답이, ······ 돼지처럼 들렸거든요.  


2

케른트너토어 극장Kärntnertortheater은 18세기와 19세기 빈의 대표적인 공연장입니다. 우리로 치면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전당 쯤 됩니다. 1824년 5월 7일, 베토벤은 이 극장에서 서곡 하나와 장엄미사Missa solemnis 몇 부분, 교향곡 9번 '합창'을 초연했습니다. 객석은 환호했고, 찬사는 넘쳤다, 이렇게 당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날 베토벤의 감격도 특별했을 것입니다. 그 음악회가 참으로 오랜만에 큰 작품만으로 기획된, 왕년의 거장 베토벤의 컴백 무대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날의 베토벤을 '왕년'으로 한정한 이유가 있습니다. 베토벤이 그 연주회 전까지 오랫동안, 거의 두문불출했기 때문입니다.


감각성 망실이란 의학의 말입니다. 감각이 둔해지거나 오감의 인식을 잃게 되는 증세이며 시각이나 청각장애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음악은 결국 소리인 것이며, 소리는 공기로, 귀로 전달되는 것이니, 만일 이 망실이 음악가에게 왔다면, 음악을 생계로 삼는 삶은 딱 거기까지 입니다. 귀가 음악가의 제일 중요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1798년의 베토벤은 자기 귀에 어떤 문제가 생기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의 귀와 소리는 다음 이십 년의 명멸 끝에 절멸합니다. 18세기의 음악가가 음악으로 살기 위해서는 연주를 하거나, 가르치거나, 고정된 수입이 보장될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베토벤은 듣는 것을 잃었으니, 연주도, 가르칠 수도, 고용될 수도 없었습니다.
 
이제 서른을 넘긴 베토벤의 궤적은 난청이 야기한 투쟁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 고단한 삶에 두드러지는 무엇이 있습니다. 베토벤을 긍휼히 여긴 이들의 존재입니다. 후원patronage은 예술의 역사 어디에서라도 등장합니다. 하지만 베토벤의 몇몇이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의 넓은 오지랖 때문입니다. 베토벤에게도 딱 한번 취직의 기회가 온 적 있으니, 1808년 베스트팔렌Westphalia의 왕이었던 제롬Jérôme Bonaparte에게 요청 받은 음악 감독직이 그것입니다. 그 제안이 달콤했을 것입니다. 흔히 그러잖아요. '기회가 왔을 때 잡아라.' 이미 세상에 알려진 그의 결손과, 그 일로 야기될 불투명한 미래로 인해 베토벤은, 왕의 제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때 세 명의 '오지랖퍼'가 등장합니다. 로브코비츠 공작Prince Lobkowitz과 킨스키 공작Prince Kinsky, 그리고 루돌프 대공Archduke Rudolph. 그 셋은 베토벤을 기어이 설득해 빈에 남게 하고 그 대신의 연금을 약속합니다. 베토벤에게 약속된 그 4000 플로린은 화제가 될 만큼 든든한 액수였습니다. 하지만 로브코비츠는 파산으로, 킨스키는 전쟁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지급이 중단됩니다. 루돌프는 끝까지 신뢰를 지켰는데요. 로브코비츠도 재정이 회복되자마자 후원에 동참하여 베토벤의 마지막 순간까지 의리를 지켰습니다.  


3

남겨진 베토벤의 기록이 많습니다. 청력을 잃은 탓에 소통을 글로 한 때문입니다. 기록은 그가 검소한 사람이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넘칠 때도 소박했으며 곤궁할 적에도 안색을 갖춰 자존감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그도 1815년부터는 눈에 띄게 어려워집니다. 프랑스와의 오랜 전쟁과 인플레이션 탓입니다. 앞선 오지랖퍼 3인방 말고도 적지 않은 후원자가 베토벤 인생에 등장하지만, 그 '고객'의 대부분은 별 이유 없이, 말하자면, '고객의 단순한 변심'으로 등을 돌렸습니다. 베토벤의 곁에 루돌프나 로브코비츠가 없었다면, 곤궁의 정도가 더 심했을 것입니다. 고전주의의 핵심은 교향곡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큰 작품을 발표하려면 많은 연주자와 공연장, 그 외의 비용도 필요합니다. 이 경제적인 이유가 베토벤 말년의 교향곡을 드물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1817년 영국 음악협회Philharmonic Society of London의 반가운 후원은 베토벤에 잠들어 있던 음악을 세상으로 끌어냈습니다. 그 긍휼이 밥이 되고, 그 밥이 '합창교향곡'도 가능케 했던 것이니, 결국 그 밥은 베토벤의 세계를 인류의 자산으로 남게 한, 밥인 셈입니다.


예술가라고 구름 위에서 이슬만 먹지 않습니다. 황현산의 말마따나, 예술도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해에도 고객의 단순 변심으로 무너진 단체와 개인들을 보았습니다. 비싼 술과 안주에 불콰해진 얼굴로, 오른 최저임금이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 저주하고, 이놈의 정부가 왜 삼성을 못 살게 구는지 모르겠다는 그 궤변의 끝이, "근데... 요새 회사 사정이 나빠져서 말이야," 후원을 끊는 것이었다는, 어떤 변심한 사장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루아침에 단절된 후원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확신으로 선택했던 예술과 내 인생에 대한 자괴감이다, 그가 말합니다.


북콘서트의 작가가 자신을 소개합니다. "생계형 작가 OOO입니다."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저도 웃습니다. 저도, 이제 쉰몇 이고, 음악으로 밥을 먹기 때문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드는 생각 하나. 맬러리가 최저시급 알바생이었다면, 밀린 카드 값이 고단했던 베토벤이었더라면, '산이 거기 있으니까요'라는 선문답도, '합창교향곡'도 처음부터 없었을, 어쩌면 우리가 그런 세상에 살고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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