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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 | 연재 [이휘현의 책이야기]
지구별 나그네를 만나다
이옥희 『오늘에 핀 꽃 어제와 내일을 추억하다』
이휘현(2019-02-25 15:01:08)



내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최후의 유혹>을 꼼꼼하게 읽은 것은 1년 전의 일이다. 전라남도 순천 여행 중 들른 어느 헌책방에서 누렇게 바랜 40여 년 전의 번역서를 손에 쥔 것이 나와 이 책의 인연이 되어주었다. 세로판형에 깨알 같은 크기로 박힌 옛날 서적이 제대로 읽히기나 할까라는 나의 우려는, 구입 후 두 세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금세 불식되었다. 나는 그야말로 이 작품 속에 흠뻑 빠져들었던 것이다.
소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신약성서 4대 복음을 이야기의 뼈대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예수를 전능한 신(神)이 아니라 고뇌하는 인간으로 묘사했다. 때문에 발표 후 작가와 작품 모두 말 그대로 수난을 겪었다. 신성을 모독했다는 혐의였다. 1970년대 초반 한국어로 번역된 책의 제목은 원제인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그리스도'를 삭제했다. 아마 빗발칠지도 모를 비난을 역자는 의식했을 것이다. 1988년에는 미국에서 마틴 스콜세지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이 작품 또한 할리우드 안팎에서 소설만큼이나 무수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고, 그 나마 한국에 소개되기까지는 십 여 년의 세월을 버텨야 했다.
지금도 한국교회의 주류에서는 이 소설을 '금서' 취급한다. 아마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작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스 현대문학의 대문호 니코스 카잔치키스에 의해 그려진 예수의 삶과 고뇌, 죽음은 그 자체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는데, 아이로니컬하게도 나는 그러한 인간 예수의 모습 속에서 성스러움과 고귀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성경 속 복음서를 교조적으로 해석해 내는 교회 강단의 목소리들과는 전혀 다르게, 온화하면서도 압도적인 기운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무엇보다도 작품 속 예수의 '말투'가 나에게는 인상적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해라' '하여라'의 하대하는 말투가 아니라, 그 누구에게든 경어를 사용하는 예수의 태도와 마음이 진정으로 신성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성경 속 예수의 말투는 양반이 하층민에게 하대하는 듯한 그런 '주종 관계'의 말투는 아니었을 것이다. 중국어 번역본 성서를 중역한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당대 계급의식과 신앙 관념을 고려해 보면 이해 못할 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번역체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신성불가침의 예수 언어로 화석화 된 것은 납득할 만한 일인가? 한국 주류교회의 보수성과 배타성이 이러한 성경 번역문의 봉건적 잔재에도 어느 정도 원인이 있다고 분석하는 나의 관념은 어쩌면 또 많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될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누구가 되었든 아무런 편견 없이 온화한 경어로 다가섰던 예수라는 역사 속 인물에게서 경외감을 갖는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나는 묻고 싶다. 우리 시대의 진짜 예수는 어디로 갔는가.
사랑하는 자 예수는 어디로 가고 왜 명령하는 자 예수만 떠돌고 있는가. 공감하는 자 예수는 어디로 가고 왜 군림하고 호통 치는 자 예수만 남았는가. 예수의 진정한 마음은 어느 골목에서 길을 잃고 웅크려 있는가.
이 막막한 물음으로 답답한 인생의 길목을 경유하던 어느 날, 책 한 권이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당신이 찾는 예수의 마음은 세상 이곳저곳에 많이 널려 있습니다. 다만 당신이 그런 자리를 눈여겨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찾을 수 없었을 뿐입니다."


책을 읽는 내내 부끄러움이 차올랐다. 나는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만 예수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입으로만 박애의 아름다움을 말할 뿐 정작 그 마음의 자리를 향해 한 발짝 떼어본 적이 있기나 한 것일까. 이 한 권의 책 <오늘에 핀 꽃 어제와 내일을 추억하다>가 오늘의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든다.


이옥희 선생을 만난 것은 지난 해 9월 중국 연변에서였다. 전주YMCA와 어느 교회가 공동으로 기획한 '조중러 접경지역 역사기행'에 11살 큰아들과 함께 참여하였는데, 그 기행에서 이옥희 선생을 알게 된 것이다.
연신 온화한 미소를 머금으며 조중러 접경지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던 선생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노래 <선구자>로만 떠올리던 일송정과 해란강, 윤동주 생가, 봉오동 전투 전적지, 두만강, 백두산, 광개토대왕릉 장수왕릉 등의 고구려 옛 성터를 버스로 경유하는 와중에 나는 이옥희 선생과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처음엔 뭐하는 사람인가 궁금증을 유발하던 그의 정체가 이런저런 대화를 통해서 조금씩 드러났다. 하지만 그 정보라는 게 워낙 파편적이어서, 그가 선교사인지 인권운동가인지 아니면 역사학자인지 헷갈렸고 그의 주 무대가 한국인지 중국인지 인도인지 아니면 그 외 제3세계 분쟁지역인지 도통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그렇게 어수선한 정보를 나에게 흩뿌려주며 이틀을 함께 한 이옥희 선생은 행선지 중간에 우리 일행과 인사한 후 다른 길로 향했다.
그 후 선생에게서 종종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내용은 본인이 발품 팔아 다니고 있는 간도 땅 항일운동 유적지의 흔적과 새롭게 발견해 낸 역사적 사실, 그리고 공동체 붕괴 직전인 조선족 자치구 시골 마을 이야기 등을 담고 있었다. 나보다 한참 인생 선배인 그의 식지 않는 열정은 어디서 그렇게 솟아나는 것일까. 여러모로 그의 정체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물음은 2018년에 출간된 그의 책 <오늘에 핀 꽃 어제와 내일을 추억하다>를 통해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이옥희 선생은 스스로를 일컬어 '지구별 나그네'라 한다.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선교사로 살던 그가 어떤 연유로 전 지구를 떠돌며 상처와 시련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섰는지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이 책에도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총 37개로 구성된 에세이 속에서 느슨하게 드러나는 정보를 통해 독자인 우리는 그의 행로를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나'가 아닌 '우리'를 위한 고민, 나의 배부름이 아니라 그 누구도 배곯지 않아야 한다는 치열한 각성. 누구나 상처를 받으며 살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 상처가 그 누군가들의 삶에 당연한 것처럼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상식. 2천 년 전 예수라는 사람이 온화한 말투로 전하던 '사랑'의 언어를 그는 관념이 아니라 온 몸으로 실천하며 전 지구를 누볐던 것이다. 그리고 그 뜨거운 기록이 이 책에 티끌 하나 없는 밤하늘의 별들처럼 흩뿌려져 있는 것이다!
좋은 책 한 권 읽었다고 내 삶과 생각의 어느 구석엔가 온존하고 있는 이기심이 금세 사라질 리 만무하다. 하지만 이옥희 선생이 이 책 <오늘에 핀 꽃 어제와 내일을 추억하다>에 걸어놓은 주문이, 내 일상의 곳곳에서 가끔 튀어나와 나의 '속됨'을 누그러뜨려주지 않을까? 책을 읽으며 매번 보람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이옥희 선생과의 인연으로 얽혀 시작된 이번 독서의 기억은 그 여느 때보다 뿌듯한 느낌으로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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