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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4 | 칼럼·시평 [문화칼럼]
여러분이 보고 계신 영화는 안녕하십니까?
이상길(2019-04-16 12:36:52)



대중의 관심과 영향력에 비해 영화산업은 규모로 치면 아주 작은 산업이다. 산업 내 노동자들의 숫자도 한 해 종사자가 겨우 2~3만 명에 불과할 정도다. 그래서인지 오랫동안 생소하고 '특수'한 분야로 취급되기 일쑤였고, 법의 기준으론 노동자지만 현실에선 노동부에 있는 감독관조차 프리랜서, 예술하는 사람 등으로 치부할 정도로, 노동의 개념이 지워진 노동자(?)로 여겨져 왔다. 소위 근로기준법상(이하 근기법) '근로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현장에 근로계약이 보급되고, 반드시 써야 하는 것으로 인식된지 이제 겨우 4년밖에 되지 않았다. 이러다 보니 영화노동자는 작년까지만 해도 근기법상 59조의 특례업종이었다. 2018년 7월 1일 근기법 개정으로 영화산업이 특례업종에서 제외되기 전까지 영화노동자들은 근로자 대표와 합의하면 무제한 노동이 가능했다. 이젠 사업장 규모에 따라 시기는 다르지만, 2020년 1월을 기점으로 1주 최대 52시간까지만 일하도록 하는 법 기준이 영화산업에 적용된다. 한국영화산업 100년사에서 지금까지의 제작 관행으로 보면, 최근 몇 년의 변화는 아주 급격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제작 현장과 괴리된 부분이 많다.


일한 만큼 받는다. 지극히 상식적인 이 생각이 이제야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일한 시간을 측정하고, 수당을 계산하고, 정당한 임금 지급 없이는 노동 제공도 없다고 드디어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카메라가 돌고 연기를 하는 촬영 시간 중심으로만 근로 시간을 인정해 실질적인 노동 시간을 전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촬영 시간 이외에도 제작, 연출, 미술, 소품, 의상, 분장 등 많은 부서의 노동자들은 준비를 하거나 정리를 하며 노동을 하고 있다. 이것은 임금 체불이란 문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심각한 건 '장시간 노동', 즉 과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분업 계획과 추가 고용 대책이 절실하며, 변화된 환경에 맞는 제작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노사정의 협력도 필요한 시기다.


근로계약에 따른 또 다른 변화는 바뀐 계약서에 따라 새로운 노동 환경을 경험하고 있는 영화노동자 자신의 변화다. 언제나 현장 책임자가 '오늘 끝'을 말할 때까지 예정 없던 노동을 강행해야 했던 영화노동자들이 스스로 '근로자 대표'를 통해 회사와 합의할 수 있는 분위기로 바뀌어 가고 있다. 이런 경험은 기간 계약직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간의 제작 관행을 변화시키는 근본적인 힘이 되고 있다. 최근 한 제작 현장에서 과반이 훌쩍 넘는 노동자들이 한꺼번에 노동조합에 가입한 모습은 변화된 인식을 드러내는 좋은 예일 것이다.


물론 능동적인 근로자 대표 활동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예정되지 않는 '1일 장시간 근로' 문제는 아직도 개선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1주 노동 시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약속되지 않은 갑작스런 1일 장시간 노동의 가능성은 여전히 영화노동자의 심리 및 신체 건강에 해로운 요소다. 우리 영화노조도 5년 동안 1일 최대 12시간까지만 일하자는 캠페인과 단체협약 등을 통해 1일 노동 시간을 제한하고자 계속 노력하고 있다.


변화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하지만 예산 규모가 작은 영화 제작 현장과 영화 이외의 다양한 영상 제작 현장에서는 아직도 관행처럼 과거의 잘못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리고 대다수 현장 영화노동자들은 여전히 극단적인 '비정규직'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당장의 영화 제작이 끝나면 다시 다른 곳에 가서 '계약'이란 것을 해야 하는데, 계약 시 임금은 언제나 최저에 맞춰져 있다. 영화 제작 현장 종사자들의 평균 나이(2016년 영화 스태프 근로 환경 실태조사)는 31세다. 25세는 22%, 30세는 30.8%로 아주 젊은 노동자들이 대다수다. 2018년 통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에너지 넘치는 현장, 청년 노동자 참여가 많은 산업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20~30대 층이 많은 건 현실적이지 못한 임금 탓에 산업 종사 기간이 짧은 탓이다. 그리고 개선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힘든 근로 환경 때문일 것이다. 중장년이 넘어서까지 종사하기에는 미래가 보장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노동자의 업무 및 경력에 맞는 최저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이유다.


최근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탄력적 근로시간제(이하 탄력시간제)의 기간 연장에 관한 논쟁이 뜨겁다. 영화 제작 현장에서 제작자는 탄력시간제의 현장 적용을 환영하고 있다. 하지만 탄력시간제를 실제 현장에 적용하기 위한 어려운 조건들에 대해서는 차치하더라도, 영화노동자가 고무줄도 아닌데 지금보다 어떻게 더 '탄력'적일 수 있을까. 영화노동자의 근로계약서에는 임금, 시간급, 계약 기간은 있지만 확정된 근로 시간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단 한 자도 적혀 있지 않다. 계약 전과 후의 대략적인 근로계획서는 실제로는 '예정'일 뿐이다. 제작 현장의 근로 시간은 그 시작 시간과 끝나는 시간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상태다. 오늘은 8시 출근, 내일은 6시 출근. 퇴근 시간 또한 마찬가지로, 언제든 변할 수 있는 '탄력' 상태다. 매일이 '탄력'적인 고무줄 상태인 것이다. 여기에 1주 단위로 탄력을 더하려 한다니, 튼튼한 고무줄도 녹아내릴 것이고, 사람이면 당연히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영화노동자는 사람이다. 사람의 안녕함이 없는 영화를 대중 문화의 꽃이라 한다면, 그건 피로 키운 꽃일 뿐이다.


'영화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 다만, 그것이 결과물로서의 영화에 한정되지 않았으면 한다. 근로 환경과 제도의 변화에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영화가 '독립영화', '예술영화', '저예산영화'다. 영화노조에 자주 오는 전화 중 하나가 이런 소규모 영화는 근기법 예외가 아니냐는 질문이다. 심지어 어떻게 하면 적법하게 근로계약을 하지 않을 수 있는지도 물어 온다. 예산에 맞지 않는 기간의 촬영 계획을 잡을 수밖에 없고, 법을 준수하면 영화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많은 한국독립영화가 촬영 기간을 줄이고 더 많은 사전 준비를 통해 법을 준수하고 있다. 법을 충분히 지키면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당연한 일임에도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 함께 노력하는 다수의 독립영화 제작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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