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9.4 | 연재 [이휘현의 책이야기]
'제주'라는 공간을 새롭게 보다
김소윤 그이름. 정난주
이휘현(2019-04-16 13:08:51)



4월의 제주를 떠올리면 슬픔이 밀려든다.
제주 앞 망망대해의 기억이 서글픔의 파도가 되어 내 가슴을 두드린다.
5년 전의 4월 어느 날, 제주 촬영을 마치고 육지로 향하는 여객선 안 그 시끌벅적하던 아이들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기 때문일까. 수학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며 깔깔대던 십대들의 그 풋풋함이 며칠 후 벌어질 비극의 이미지에 중첩되어 내 뇌리에 남은 건 의도치 않게 내겐 큰 상처가 되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안산 고잔동에 살았던 내 부모님은 전철이 다니는 안산중앙역에서 구내매점을 운영하셨다. 일손이 바쁠 때는 나도 거들어 드렸다. 손바닥만한 매점 앞에서 푼돈을 내밀며 디스 플러스와 스포츠서울, 후라보노 껌을 가져가던 사람들. 그 옆에는 종종 고사리 손을 엄마와 아빠에게 의지하고 과자 하나 얻어먹을 수 없을까 궁리하던 네다섯 살 꼬마들이 있었다. 그렇게 무감히 스쳐가던 아이들 중 어쩌면 2014년 팽목항 앞의 비극을 비껴가지 못한 영혼도 있지는 않을는지.


거대신문사 중앙일보를 박차고 나와 15년 간 야인 생활을 버텨온 오동명 선생이 제주에서의 3년을 정리하며 낸 책이, 하필 '그 날' 즈음 세상에 선을 보였다는 것은 또 무슨 얄궂은 운명인가. 선생이 보내준 책 앞면에는 몇 줄의 편지글과 함께 날짜가 박혀 있었다. 2014년 4월 16일. 책 제목은 <제주도, 무작정 오지 마라>. 참으로 기막힌 타이밍이자 기막힌 제목이다.
내 삶의 궤적에서 이리저리 꿰어지는 세월호의 무게가 비극의 당사자들에게 비할 바는 못 될 것이다. 하지만 현기영 김석범의 소설이나 영화감독 오멸의 작품을 통해 간접 체험되는 4·3의 70년 세월을 거슬러 오르기도 전에, 2014년 4월 16일은, 제주로 향하는 내 시선을 슬픔으로 붙들어 맨다, 내 의지가 잘 작동되지 않는 영역이니 그저 제주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분들에게는 이 청승맞은 감정이 송구스러운 뿐이다. 그렇게 제주는, 나에게 슬픔의 공간이다.


소설 <난주>를 처음 집어 들었을 때 나를 사로잡은 예감은 그 도저한 슬픔의 감정에 보태질 어떤 비극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제주를 향한 내 부끄러운 감정은 더 강화될 것이라 확신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염치없이 그 책을 구입해 집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처음 몇 페이지를 읽으며 나는 내 예감이 틀림없음을 확신했다. 도입부는 여지없이 주인공의 몰락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내 예상은 슬슬 그 경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깊은 절망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한 여자의 이름을 내 뇌리에 확실하게 새기며 끝을 맺는다. 그 이름, 정·난·주.

정난주는 조선 땅에서 천주교를 빠르게 받아들인 양반계층 정약종의 조카다. 그 유명한 정약용이 또한 그의 삼촌인 셈이다. 남인의 명망가문이던 그의 집안이 천주교 박해와 맞물려 풍비박산 난다. 남편 황사영은 참형을 면치 못했으나, 정난주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은 생애 동안 견뎌야 하는 것은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치욕이었다. 관비가 되어 제주로 유배를 당하게 된 것이다. 권세가의 여식으로 자라 세상 부러울 것 없던 주인공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노비가 되어 끔찍한 전락을 경험하게 된다.
젖먹이 아들만은 지옥 같은 노비의 삶을 물려주지 않으려 추자도에서 그는 생이별을 감행한다. 가족의 붕괴, 신분의 몰락, 남편의 죽음, 아들과의 이별. 난주라는 이름을 잃고 그저 한 명의 이름없는 노비로 살아야 하는 제주도에서의 비극적인 삶.

<난주>는 재밌는 소설이다. 옛스러운 문장으로 치장한 이야기는 술술 읽힌다.


총 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30여 년 관비 생활을 성공적으로(?) 채우고 이제는 삶의 끝자락에 선 노파 정난주의 현재와, 고달팠던 그의 제주 유배 연대기가 시간 순으로 이어진다. 조선 후기의 극심한 세도 정치와 저 멀리 유럽으로부터 전파되는 새로운 종교의 충돌을 통해 서서히 기반이 흔들리는 한반도의 오랜 관습들. 그 지각 변동의 어느 한 곳에 정난주라는 이름이 오롯이 새겨 있음을 작가는 이야기하고자 한 듯 하다.


이야기는 다소 전형성을 띄고 있다. 각 장마다 크고 작은 위기의 이벤트가 벌어지는 데, 이를 해결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정난주 개인의 능력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4·3평화문학상을 수상한(2018년) 이 작품이 심사위원들에게 지적받았던 대목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이 계륵과도 같은 주인공의 전형성을 걷어내고 보면, 이 소설이 가진 미덕은 풍성하다. 무엇보다도 19세기 초 비참했던 조선 민초의 삶을 그것도 제주라는 변방에서의 삶을 파노라마처럼 잘 보여주고 있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당대 계급 모순의 처절한 세밀화는 21세기로 훌쩍 넘어온 지금에 와도 어딘가 공명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권리 앞에서 돈의 권능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가진 자들의 횡포가 억눌린 자들의 강요된 침묵으로 용인되는 행태!!


그리고 이 비참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소외받은 자들끼리의 단단한, 때로는 어느 정도 느슨한, '연대'의 힘이라는 것을 이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정난주는 이 연대의 풍경에서 항상 맨 앞에 서는 전사 역할을 한다. 계몽의 근거가 미약한 19세기 초 제주가 배경이다 보니 과거의 화려한 이력(?)을 가진 정난주라는 캐릭터를 통해 도장 깨기 하듯 당대 모순 극복의 이야기를 펼치려 한 작가의 고심이, 어쩌면 정난주를 무결점의 전형성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 <난주>는 해피엔딩이다. 신분 몰락의 대물림을 피하기 위해 추자도에 버린 아들 황경헌과 37년 만에 해후하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이 대목에서는 뜨거운 감정이 차오른다. 작가가 초장에 던져놓은 감정의 미끼는 그렇게 후반부에서 독자들을 낚아챈다. 또 맥거핀처럼 쓰인 정난주의 실종사건이 아들과의 해후 대목에서 드라마틱하게 회수된다. 소설을 읽다보면 마치 미니시리즈 사극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에 빠지는데, 아마도 작가의 대중적인 화술 능력이 한 몫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아울러 독자로서의 내 개인적인 느낌을 말해보자면, 이제 그 이름 정난주를 통해 제주라는 공간을 새롭게 볼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 여겨진다. 다소 치기어린 감상을 담아 4·3과 세월호의 쪽문을 통해 제주로 향하던 내 서글픈 시선은, 이제 강한 '생의 의지'와 희망을 품음직한 '연대의 힘'이라는 새로운 프리즘을 통해 어느 정도 중화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