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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 | 연재 [윤지용의 두 도시 이야기]
신에 대한 두 가지 태도
이탈리아의 피렌체와 아시시
윤지용(2019-06-18 11:04:41)

이탈리아 여행을 계획하면서 욕심부터 버려야 했다. 밀라노, 베네치아 같은 북부지방 도시들부터 천 년 전에 화석이 된 도시 폼페이와 남부해안의 나폴리, 소렌토까지 어느 곳 하나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열흘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그 많은 곳들을 훑고 나면 '인증샷'만 남을 것 같았다. '관광'이 아닌 진득한 여행을 하려면 선택과 집중이 불가피했다. 그래서 로마에서의 며칠을 제외한 나머지 기간 동안 피렌체와 아시시 두 도시에만 머물기로 했다.



르네상스의 요람 피렌체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주(州)의 주도인 피렌체는 로마에서 북쪽으로 300km쯤 떨어져 있다. '꽃의 도시'라는 뜻이라는데 영어식 이름은 플로렌스(Florence)다. 우리에게는 일본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아오이와 쥰세이의 애틋한 사랑으로 익숙해진 도시이기도 하다. 특히 영화 후반부에 아오이와 쥰세이가 운명적으로 재회하는 두오모의 큐폴라는 언젠가부터 신혼부부나 연인들이 빼먹지 않고 들르는 핫스팟이 되었다.
가톨릭이 번성한 유럽 나라들에서 주교가 있는 대성당을 '까테드랄'이라고 하는데 이탈리아에서는 이런 대성당들의 천장이 돔 형식인 곳이 많아서 '두오모(Duomo)'라고 한다. 그 꼭대기에 있는 반구형(半球形)의 돔은 '큐폴라'라고 한다. 기둥이 없이 아치의 원리를 응용해 둥근 천장을 지탱하는 구조인 돔은 1436년에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꽃의 성모) 성당에서 최초로 구현해냈다. 이 성당이 바로 피렌체 두오모다. 돔 양식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혁신적인 기법이었지만, 실은 고대 로마의 건축물인 판테온에서 배워온 것이었다. 직역하면 '재생(再生)'이라는 뜻의 '르네상스(Renaissance)'가 고대 그리스·로마의 학문과 지식을 다시 부흥시키고자 했던 인문운동이라는 점에서, 브루넬레스키의 피렌체 두오모야말로 건축 분야에 있어서는 르네상의의 효시라 할 수 있다.
피렌체의 관문은 기차역인 산타마리아 노벨라역이다. 역 바로 앞에 있는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이름을 땄다. 이 성당은 도미니크 수도회의 성당답게 피렌체 두오모나 피렌체의 다른 성당들에 비해서 소박하지만,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회화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스물일곱 나이에 요절했다는 천재 화가 지오반니 마사쵸의 '성삼위일체'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소실점을 이용한 원근법을 최초로 적용해서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적 그림으로 꼽힌다.
인간보다 신을 중시하고 교회가 인간의 자유로운 감정과 사상을 억누르던 시대에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메디치 가문의 영향이 컸다. 일찍이 금융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은 메디치 가문은 교황의 재산을 맡아서 관리할 정도로 세력이 막강했는데, 이러한 부를 바탕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라파엘로, 단테 등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 역시 피렌체의 지배자였던 메디치 가문에 바친 일종의 치세(治世) 교범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도시 곳곳의 유서 깊은 건물들에는 메디치 가문의 문장(紋章)이 새겨져 있다. 피렌체 권력의 중심지였던 시뇨리아 광장에서는 미켈란젤로의 걸작품으로 손꼽히는 다비드상을 비롯해 많은 르네상스 조각상들을 볼 수 있지만 이곳에 있는 다비드상은 모조품이다.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진품은 아카데미아 박물관에 따로 보관되어 있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이 대개 강을 끼고 발달했듯이 피렌체도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이 있다. 아르노강이다. 아르노강 남쪽의 미켈란젤로 언덕은 두오모와 지오또의 종탑을 비롯한 도시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어서 해질녘이면 도시의 석양과 야경을 감상하려는 이들로 붐비는 명소다.
아르노강을 가로지르는 여러 개의 다리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베키오 다리다. 다리 위에 상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선 독특한 모양이다. 이 다리 위에 있는 상점들은 주로 보석상들이다. 본래는 푸줏간들이 많았는데 도시의 지배자인 메디치 가문이 '환경미화'를 위해 푸줏간들을 내몰고 보석상들을 들였다고 한다. 베키오 다리는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사랑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알고 보면 단테와 베아트리체는 '평생의 연인'이 아니었다. 단테 혼자만의 짝사랑이었고, 두 사람이 베키오 다리에서 사랑을 속삭인 것이 아니라 다리 앞에서 지나쳐가는 베아트리체에게 단테가 첫눈에 반했던 것이라고 한다. 어쩌면 이마저도 그냥 '스토리 텔링'인지도 모른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고등학교 시절에 수학문제를 풀거나 영어 단어를 외울 때 나선형 철사로 제본된 연습장을 많이들 썼다. 이런 연습장들의 표지에는 대개 팝송 가수 올리비아 뉴튼 존, 홍콩 영화배우 왕조현 같은 인기 스타들의 사진이 있었는데, 가끔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나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로 시작하는 기도문도 있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라는 사람의 기도문이라고 했다. 성 프란치스코가 가톨릭 신자들에게 널리 추앙받는 유명한 성인이라는 것과 아시시가 그의 고향이자 주된 활동지역의 지명이라는 사실을 오래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유명한 관광지들을 다 제쳐두고 아시시라는 작은 도시를 선택한 것도 어쩌면 그 옛날의 연습장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움브리아 평원의 야트막한 구릉에 있는 작은 마을 아시시는 로마에서 완행열차로 두 시간쯤 걸린다. 기차역에 내려 십 분쯤 버스를 타고 언덕 위의 마을로 올라가야 한다. 돌로 만든 아치형 문을 지나 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아스팔트길과 시멘트 건물은 보이지 않고 돌길과 벽돌집들이다. 골목길의 상점들도 여행자들에게 극성스레 호객행위를 하지 않고 점잖다. 평화를 간구했던 성인의 고장답게 고즈넉하다.
마을 입구에서 백 미터쯤 걸어 올라가면 바로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 나온다. 1228년에 프란치스코 성인이 선종한 직후 교황 그레고리 9세가 그를 시성하고 지은 성당이라고 한다. 그러니 800년이 다 된 성당이다. 건축양식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로마네스크 양식과 초기 고딕 양식이 혼합된 복층구조다. 피렌체 두오모나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만큼 웅장하거나 화려하지 않되 은근한 기품이 느껴지는 건물이다. 지하에는 성인의 유해를 모신 무덤이 있다. 성당 앞 잔디밭에 있는 작은 동상도 눈길을 끈다. 기마상인데 말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 축 늘어진 어깨로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젊은 시절에 전쟁터에 나갔다가 적군에게 붙잡혀 포로생활을 하고 심신이 병들어 돌아왔다더니 그 모습인가보다.
아시시에는 성 프란치스코 성당만 있는 것이 아니다. 크지 않은 마을인데도 성당이 여럿 있었다. 성 프란치스코 성당을 나와 남서쪽으로 걷다보면 마을의 중앙광장격인 꼬뮤네 광장(Plazza del Comune)을 만나게 된다. 꼬뮤네는 아마도 영어의 '커뮤니티'쯤 되는 것 같다. 꼬뮤네 광장 앞쪽에 고대 로마의 신전 모양을 한 독특한 건물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신전이 맞다. 그리스 신화의 아테나에 해당하는 로마의 여신 미네르바를 섬겼던 신전이라고 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신전 입구의 기둥들 뒤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고 신전 뒤에 성당 모양의 건물이 덧대어져 있다. 가톨릭이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에 신전 건물을 헐지 않고 '재활용'해서 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성당이 산타 키아라 성당(Basilica di Santa Chiara)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신앙과 인품을 흠모하여 그를 따르며 평생 동정녀로 살았다는 성녀 클라라의 이탈리아식 이름이 '키아라'인 모양이다. 산타 키아라 성당은 성녀를 기리는 성당답게 단아한 느낌이고 다른 성당들에 비해 화사한 색감이다.
마을 뒤쪽 언덕 꼭대기에 있는 옛 요새 로카 마조레의 성벽 아래에서 움브리아 평원의 석양을 내려다보며 곰곰 생각해보니 피렌체와 아시시는 여러모로 대조적이었다.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로 번영을 구가하며 부강했던 피렌체와 언덕 위의 평화로운 마을 아시시, 엄청난 부를 바탕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메디치 가문과 평생 청빈과 고행의 길을 걸었던 프란치스코 성인. 피렌체가 감히 교회의 권위에 대들며 르네상스의 문을 연 도시였다면, 아시시는 신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했던 경건한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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