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9.6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장애인, 돌봄 노동을 실천하는 윤리적 노동자로 우뚝 서다
<나의 특별한 형제>
김경태(2019-06-18 11:05:51)



전신마비 장애를 지닌 '세하(신하균)'는 자신을 돌보는데 지친 친척에 의해 '박신부(권해효)'가 운영하는 장애인 시설 '책임의 집'에 버려진다. 그곳에서 그는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상처를 안고 있는 5세 지능의 지적 장애인 '동구(이광수)'를 만난다. 비상한 두뇌의 세하와 뛰어난 운동신경의 동구는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지켜주며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박신부의 죽음으로 책임의 집에 지원금이 끊기자, 세하는 동구를 비롯한 동료 장애인들이 가족처럼 지내는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해 봉사활동 인증서를 팔거나 세상의 이목을 끌기 위해 동구를 수영대회에 내보낸다. 동구의 수영 훈련을 돕던 구청 수영장 알바생 '미현(이솜)'까지 가세해 그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돕지만, 끝내 책임의 집은 폐쇄되고 만다. 세하와 동구는 둘 만의 거주 공간을 찾아 나서려는 순간, 이번에는 동구의 친어머니가 찾아와 동구를 데려가려고 한다.


<나의 특별한 형제>는 돌봄을 노동의 층위에서 사유한다. 동구 어머니는 세하가 동구를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몰아세운다. 그러나 동구의 세하에 대한 보살핌은 동구의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다. 세하는 동구를 착취한 것이 아니라 그를 엄연한 노동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훈련시켜왔다. 반면에 동구는 그만큼 돌봄 행위라는, 자신의 맡은 바 소임에 최선을 다해 왔다. 그것은 엄연한 노동으로서 동구가 사회적 주체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따라서 세하가 동구에게 훈육적 돌봄을 제공했다면, 동구는 세하에게 육체적 돌봄을 제공한 것이다. 그들은 분명 상호호혜적인 관계였다. 그들은 함께 있을 때, 그저 서로의 신체적 결핍을 채워줄 뿐만 아니라, 비로소 노동하는 주체로서 충만해진다.


결국 법정 다툼 끝에 동구는 어머니와 같이 살게 된다. 그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다. 그는 식당일을 돕고자 나서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식당의 속도는 너무 빠르게 흘러가기에 그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해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기다려줄 수 없다. '넌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돼'라고 어머니가 건네는 배려의 말은 의도와 달리 그를 그 가족의 생산적인 시간성으로부터 격리시키며 그에게 소외감을 안겨준다. 그곳에서 동구는 그저 돌봄의 대상일 뿐이며 노동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배려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달래질 수 없는 존재적 결핍을 낳는다. 일은 이윤을 남기기 위한 고단한 행위이기에 앞서 공동체 안에서 자아를 실현하는 행위이다. 그 의미를 가르쳐 준 이가 바로 세하이다.


영화는 장애인을 돌봄 노동의 주체로 소환하는 차원을 넘어 돌봄 자체를 노동의 본질로 재고한다. 돌봄 행위는 그 생산적 가치를 인정받는 다양한 노동의 일종에 그치지 않는다. 모든 노동의 본질이 유무형의 돌봄이어야하기 때문이다. 일을 할 때, 우리는 누군가를 직간접적으로 돌보는 중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노동의 가치 평가는 노동자의 지적/육체적 능력과 생산성에만 기인하지 않는다. 돌봄은 관계/공동체 안에서만 행해질 수 있기에 돌봄을 모든 노동의 본질로 상정한다면, 우리는 일을 할 때 개인의 성장과 출세가 아니라 관계/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다. 그것을 서로를 향한 시간성에 집중한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동구는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에는 지적 능력이 부족한 장애인이 아니며, 또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런 '단순한' 돌봄 행위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세하 역시 사지를 움직일 수 없기에 아무것도 생산해낼 수 없는 돌봄 대상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대신, 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그 누구보다 돌봄이라는 직업의 근간을 투철하게 실천하는 윤리적 노동자로 우뚝 선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