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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 | 연재 [전호용의 음식 칼럼 <자급>]
이심전심
여섯 번째
전호용(2019-06-18 11:07:05)



요즘에는 공장에 다닌다. 맥주공장에 다니는데, 지난 1월에 사내하청회사에 비정규직으로 입사해 맥주병을 선별한다. 정직원의 숫자는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하청업체 직원의 수는 100여 명에 이른다. 파트별로 업무가 달라 같은 회사 직원이라도 안면을 익히고 함께 생활하는 사람의 수는 40여 명 안팎. 20대 초반부터 50대 후반까지 연령층이 다양하고 그만큼 사연도 가지가지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의 사연을 묻지 않는다. 그저 함께 살다 보니 고생스러웠던 지난 시간을 회상하는 단말마를 통해 어렴풋이 서로의 삶을 짐작할 뿐이다.


지난달엔 함께 일하는 몇 사람을 집으로 초대했었다. 고기 삶고 김치전 부치고 청국장 끓인 것을 상에 차려놓고 둘러 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놀았다. 공장에 다니려고 공장 앞에 셋방을 얻었는데 집들이 겸 봄맞이 겸해서 모인 것이었다. 회사 동료 중 가까운 이웃에 나와 사정이 비슷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도 공장에 취직하고 공장과 가까운 곳에 셋방을 얻었는데 만날 라면만 먹다 밥다운 밥을 먹어 좋다는 사람도 함께했다. 그는 10여 년간 히키꼬모리로 생활하다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 이 공장이었다. 그는 아마도 평생 먹은 밥보다 히키로 살아가며 먹은 라면의 양이 더 많을 것 같다 면서도 여전히 라면이 맛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요즘엔 김치가 떨어져 김치 없이 라면 먹은 지 한 달이 넘는다는 말에 지난겨울에 담은 묵은지 한 통을 들려 보냈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 그가 넌지시 말했다. 김치가 떨어졌다고. 그래서 나는 그에게 김치 한 통 더 줄 테니 다시 집으로 오라고 말했다.


내가 사는 셋방엔 세 가족이 모여 산다. 1층엔 나와 아이 둘을 키우는 부부가 살고, 2층엔 집주인이 산다. 집주인은 마당에 밭을 일궈 철마다 푸성귀를 심어 먹는데 거기서 나는 것들을 세 들어 사는 사람들에게 언제든 따다 먹으라고 말했다. 20여 평이나 될까 한 마당에는 오이, 상추, 쑥갓, 달래, 부추, 시금치, 머위, 호박, 고추, 파프리카, 쪽파, 대파, 토마토, 깻잎, 더덕, 돌나물, 당귀, 배추, 무 등이 심어져 있고 대추나무, 감나무 등도 자라고 있다. 나는 출근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것들을 허락 없이 따다 끼니나 간식으로 삼는다. 지난 주말에는 집에 있는데 주인집 아주머니가 문을 두들겼다. 열무로 물김치를 담았는데 맛이나 보라며 한 통을 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오늘 퇴근길에 이웃한 라면쟁이에게 김치나 가져가라며 집에 함께 가자했더니 한사코 자기 집에 들렀다 오겠다며 함께 가질 않는다. 무슨 마음인지는 알겠는데,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자전거를 타고 쌩하니 가더니 30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을.... 쯧' 김치를 그냥 받을 수는 없다는 뜻일 테지.... 한참 지나 라면쟁이가 마당에서 나를 불렀다. 손에는 삼겹살과 작은 수박 반통이 들려있었다. 수박 한 통 사서 반으로 나누고 삼겹살 한 근 사서 그것도 반으로 나눴다는 그. 삼겹살이 먹고 싶었는데 잘 되었다며 너랑나랑 반반씩 나눠 먹잖다. 니미.... 나는 라면쟁이에게 묵은지 한 통과 집주인 아주머니가 건네준 열무김치 절반, 토하젓 한 통을 싸 보냈다. 집에 그냥 있는 것과 돈 주고 사온 것은 어쩐지 의미가 달라서 다음부터는 이런 거 사오지 말라고 몇 번을 당부하고는 김치통을 들려 보냈다.


라면쟁이가 돌아가고 마당쇠(개)와 산책을 다녀오는데 마당에서 주인집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아주머니는 손에 딸기를 들고 있었다. "끝물 딸긴디 맛이나 보라"며 내 손에 건넨다. 물김치도 얻어먹고 딸기까지 그냥 받아먹을 수 없어서 잠깐 기다리라 말하고 집에 들어와 라면쟁이가 주고 간 절반짜리 수박에서 또 절반을 잘라 아주머니의 손에 들려줬다. 아주머니는 그 작은 수박을 손에 들고 함박웃음이다. 라면쟁이는 김치통을 들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코를 벌름거리며 삼겹살을 굽는다. 마당쇠도 코를 킁킁거리며 삼겹살 굽는 나의 발 옆에 다소곳이 앉는다.


이심전심은 규정되거나 합의되지 않은 인간윤리다. 따라서 너의 이심전심과 나의 이심전심은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의 마음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는 이유는 다름을 인정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이심전심. 동질감의 발로라기보다는 이질감의 이해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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