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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7 | 특집 [환국 동학농민군 지도자 안장사업]
다시 한 번 전주에 울려 퍼진 동학농민군의 함성
125주년 동학농민군 전주입성 기념 학술대회
(2019-07-17 10:42:58)

1894년 음력 4월 27일 농민들의 함성이 전주성을 가득 메웠다. 배곯고, 차별받고, 억눌리고, 빼앗긴 자들의 마지막 발악. 그들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에 용감했고, 물러서지 않았다.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그들은 모였고, 투쟁했으며 당당히 전주성을 점령했다. 전주화약을 맺고, 폐정개혁안을 발표함으로 그들은 승리를 쟁취했다.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국가는 그들을 버렸고, 오히려 다른 나라를 끌어들여 짓밟았다. 농민군은 철저한 일본군의 학살 아래 스러져갔다. 하지만 그 정신은 살아남은 자들을 통해 그들의 자녀들에게로, 자녀의 자녀들에게로 계속 이어져갔다. 바람 불면 꺼질 것 같은 촛불처럼 일렁이는 그 정신은 하얗게 불타올라 재가 되어도 살아나고, 짓밟혀도 다시 타올랐다. 더 나은 삶을 갈망하며 이를 위해 투쟁하는 우리의 속에도 그 불씨는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차별은 여전히 존재하며, 우리는 여전히 투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역사 속 한 줌의 재로 사라진 그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동학농민군 전주입성 기념식과 무명의 동학농민군 유해 안장식은 아래로부터 개혁을 이루려 했던 농민군의 의지를 기억하는 의미 깊은 행사다.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는 동학농민군 전주입성기념식과 학술대회가 5월 31일 열렸다. 동학농민군 전주입성 기념식은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함락을 기념하여 (사)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의 주관으로 매년 치러진 행사다. 올해에는 동학농민혁명이 국가기념일로 재정됐고, 23년 만에 무명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안장장소가 결정된 만큼 이를 기념하는 행사로 진행됐다. 행사는 완산전투가 치러진 완산칠봉 근처에 자리한 전주완산도서관강당에서 열렸다. 식을 마친 후 오후 두시부터 여섯시까지는 '일제국주의 침탈과 인권평화운동'이라는 주제로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다각적으로 살펴보는 학술대회가 진행됐다. 이노우에 가츠오 북해도대학교 명예교수, 방민호 연변대학 교수, 오키나와 평화운동가 타카하시 도시오 사무국장, 신영우 충북대학교 명예교수, 조재곤 서강대학교 연구교수가 발제자로서 참석했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 현황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
이노우에 교수, 신영우 교수, 조재곤 교수는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연구내용을 발표했다.
기조발제는 이노우에 가츠오 북해도대학교 명예교수가 맡았다. 이노우에 교수는 '동학농민혁명사, 그 역사와 현재'라는 주제로 발표했으며, 사료를 통해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과 기록 말살을 드러냈다. '그들(동학농민군)은 이미 우리 군대(일본군)가 청산에 온 것을 알고, 도주를 기획하고 있었다. 추격해서 문서 류 두 개, 말과 소 열 마리를 취하고 그날 밤 또 문암을 야습했다. (에히메현 『우와지마 신문』 1895년 2월 7일)' 일본공사관과 일본군은 조선의 일본군 전군에게 동학농민군 문서를 수색해 수집해 일본공사관에 보내라고 명령했다. 기록을 빼앗는 것은 조직의 괴멸이기도, 동학농민군을 역사로부터 말살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작년 교수가 교토 대학 『인문학보』에 기재한 '동학당 토벌 장병의 종군일지'에 따르면 동학농민군을 수색하여 잡았고, 고문하고, 총살하고, 불사르고, 일렬로 늘어놓아 한 동작을 통해 총검으로 찔러죽이기도 했다고 한다. 가히 제노사이드라고 할 만한 토벌이다. '수만 명의 백의의 동학농민군이 산에 올라오는 모습은 마치 눈이 쌓인 듯 함성이 대지를 진동시켰다…' 종군일지에 나오는 제2차 동학 농민전쟁에서 동학 농민군의 마지막 조직적 싸움이라 할 수 있는 장흥 전투의 모습이다. 이노우에 교수는 "패주하는 동학농민군은 여전히 대군을 모아 나팔을 치고 군기를 들고 함성을 지르며 싸웠다"며 "제2차 동학 농민전쟁 마지막 때의 동학 농민군의 전의와 사기는 제대로 평가돼야 한다"고 말했다.


신영우 충북대학교 명예교수는 '1894년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과 민가 방화'라는 주제로 발언했다. 교수는 한국 사람들이 이토 히로부미는 다 알지만 그 외의 인물은 잘 알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총리 혼자서 작전을 수행 할 수 없으며, 책임도 혼자 다 져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적어도 주요한 지휘관을 알아야 한다"며 경복궁 침범 계획 및 실행, 동학농민군 진압 지휘, 을미사변 군사작전 지휘를 맡은 가와카미 소로쿠, 경복궁 침범과 장위영 무장해제를 한 오시마 요시마사를 꼭 기억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대조선, 대청국 전쟁을 계획하고 가장 먼저 경복궁을 점령하자 동학농민군과의 전쟁이 벌어졌다. 이에 병참총감 가와카미 소로쿠 중장은 "동학당에 대한 처치는 엄열을 요한다"는 학살 명령을 내렸다. 이는 동학농민군의 해산차원이 아닌 반일세력 제거를 목적으로 둔 것이다. 일본은 전쟁과 학살에 대해 의도적으로 축소하여 기록했다. 신영우 교수는 당시 피해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으며 앞으로 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또한 당시 자료를 살펴봤을 때 민간 방화가 많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동학농민군에 의한 것이기도, 일본군에 의한 것이기도, 관군 민보군에 의한 것이기도 함을 말했다. 방화의 근거에 대해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각 방화의 주체에 대한 연구 역시 필요함을 말했다. 동학농민군에 대한 자료는 일본군에 의해 왜곡되고 말살됐다. 교수는 자료부족으로 이뤄지지 못한 연구 현황을 공개하며 앞으로 연구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조재곤 서강대학교 연구교수는 '1894년 7월 일본군 왕궁 점령에 대한 반향'에 대한 연구 내용을 발표했다. 일본군이 왕궁점령하기 한 달 전부터 일본군에 의해 서울 사대문은 오후 7시 반에 폐쇄됐으며, 서울의 일본인 상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민심이 크게 놀랐다. 이때부터 이상을 짐작한 사람들이 피난하기 시작했다. 한 서울 주재 청국 외교관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한성은 아래로는 백정(白丁), 마부에 이르기까지 열에 아홉이 도피하여 성은 텅텅 비었다'고 한다. 당시의 피란은 마치 '솔개에 놀란 병아리'처럼 달아나 숨는 것 같았다. 피란은 전국적 현상이 되었고 사태가 잠잠해 진 뒤에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본군의 왕궁점령 과정에서 그들에 의한 500여 년에 걸친 조선왕실 재래의 보물과 관청의 집기와 군영의 무기들에 대한 대대적인 약탈이 자행되었다. 왕궁점령에 대한 대응으로 왕실은 국왕과 대원군이 이중 외교를 취하며 청국에 군사적 도움을 요구했고, 동학농민군은 소식을 듣고 무장하여 북상했다. 전봉준 등 집강소 농민군 지도부는 농민전쟁을 지속시키면서 농민적 지향을 확산하려 했기에 일찌감치 북상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일본군의 왕궁점령 소식을 듣고 대일전면전을 위해 집강소 활동을 마무리하고 농민군을 다시 조직하여 서울을 향해 북상한 것이다. 교수는 동학농민전쟁 진압 후 체포된 전봉준의 심문에서 '곡식이 여무는 11월 초순까지 기다렸다가 기포했다'는 진술을 근거로 "동학농민군의 제2차 봉기는 일본군의 왕궁점령이 발단이 됐다"고 주장했다.


동학농민혁명에서 인권과 평화까지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연구뿐 만아니라 이를 확장하여 인권과 평화라는 본질적인 문제도 함께 다뤘다. 방민호 연변대학 교수는 '청일전쟁 시 일본군의 중국경내 학살과 인권문제'라는 주제로 청일전쟁시기 중국의 여순, 금주 등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일본군의 중국주민에 대한 비인간적인 학살과 약탈 등을 고발했다. 오키나와 평화운동가 타카하시 도시오 사무국장은 '구조적 차별에 저항하는 오키나와 민중의 평화운동, 국제연대'라는 주제로 미군기지를 반대하는 오키나와 한국민중연대에 대해 발표했다.


종합토론에는 앞서 발언한 다섯 명의 발제자에 더해 이이화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이사장과 마에다 겐지 일본 영화감독,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부장, 강효숙 원광대학교 강사가 참여했다. 강효숙 강사는 "이번 학술대회가 동학농민혁명만을 다룬 것이 아닌 동학을 포함하여 주제를 발전시킨 것에 큰 의미가 있다"며 "인권을 다루려면 실증적이고 사실 중심이어야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번 학술대회 발표가 치밀하고 실증적이었다고 느껴 국제 학술대회 수준이 높았다고 생각한다"고 감상을 전했다.


한편, 학술대회 앞서 있던 기념식은 (사)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종민 이사장의 기념사로 시작해 무명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안장에 함께 힘쓴 김승수 전주시장, 이형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박병수 시의원의 축사와 원광대학교 신순철 교수의 폐정개혁안 낭독이 이어졌다.


김승수 전주시장과 이종민 이사장이 무명 동학농민군 유골 봉환에서 안장까지 힘쓴 한승헌 변호사(전 동학농민혁명사업회 이사장), 유골을 발견하고 봉환까지 큰 역할을 한 이노우에 가츠오 교수, 동학농민혁명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여 재조명한 마에다 겐지 감독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감사패는 전주 김종연 목공예 명장이 제작했다.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이이화 이사장은 동학농민혁명이 국가기념일로 제정 된 것에 감회가 새롭다며, "전주입성, 농민 자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전주 점령'과 '농민 통치'가 맞는 표현이다. 무기 들고 싸우는데 자치라 할 수 없다"고 용어에 대해 지적하기도 했다.
식의 마지막으로 "함께 부르는 민족 민주운동"이라는 주제로 지역 문화예술인들로 구성된 녹두앙상블과 민중가수 김용진의 기념공연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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