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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3 | 칼럼·시평 [문화칼럼]
용머리여의주마을이 동네공동체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이경진(2020-03-06 09:38:35)


지난해 12월 17일, 용머리여의주마을주민협의회와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에 비상이 걸렸다. 2019년 마지막 음식 나눔 행사가 다음 날인 18일에 잡혀 있었는데, 음식을 준비하기로 했던 주민협의회 복지분과 위원이 갑자기 가벼운 뇌출혈 증상으로 입원하게 된 것이다. 센터에서는 부랴부랴 단체 카톡방에 상황을 알렸다. 통상 음식 나눔은 주민협의회 복지분과의 여성위원과 현장지원센터 직원이 하루 전에 같이 음식재료를 사고, 당일 오전 중에 위원의 집에 모여 음식을 준비해서 마을 내 어르신들에게 점심을 대접한다. 그런데 하루 전에 그런 사달이 났으니 자칫 행사를 치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다른 여성위원들이 나섰다. 12월 메뉴는 김치찌개였다. 한 위원이 찌개를 맡고 다른 위원은 밑반찬을 준비했다. 행사는 무사히 끝났다. 어느 때보다도 주민협의회 위원들이 많이 모였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자기 할 일을 했다. 바로 1년 전만 해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관계였다.


“같은 동네, 옆집에 살면서도 오며 가며 눈인사조차 잘 하지 않는 관계였다. 그런데 같이 주민협의회 활동을 하면서 이제는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됐다.” “용머리고개로 이사 온 지 이삼 년 됐는데 올해 처음으로 이사 오기 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쓰레기를 같이 치우고 꽃도 같이 심고 하니까 동네가 뭔가 변하는 것 같아서 좋다.” “도시재생한다고 해서 모였지만 오히려 내가 재생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주민협의회 ‘송년의 밤’에서 2019년 사업을 평가하는 시간에 위원들이 하나둘씩 마치 간증을 하듯 꺼낸 말들이다. 주민협의회의 분위기가 처음부터 그리 좋았던 것은 아니다. 행정에서 도시재생뉴딜사업을 준비하면서 구성한 주민협의체에는 대개가 그렇듯이 자신의 이해관계 때문에 참여하는 주민이 다수이다. 그래서 이해관계가 충돌되거나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용머리여의주마을도 마찬가지였다.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초기에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드러내는 위원들이 종종 있었다. 때문에 제일 먼저 한 일이 도시재생사업에서 개개인에게 직접 주는 사업비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각인시키는 일이었다. 반복적으로 기회가 될 때마다 얘기했다. 도시재생은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떠나지 않고 조금 더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물리적 기반을 조성해주는 사업이고, 주민이 스스로 좋은 동네를 만들도록 도와주는 사업이라고 말이다. 또한 주민협의회가 주민 투표를 통해서 뽑힌 것이 아니므로 대표성을 갖기 위해서는 협의회 위원들이 더 봉사하고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행히 주민협의회 위원들은 서서히 변해갔다. 말 때문에 변한 것은 아니다. 공동체사업과 활동을 통해서였다.


센터에서는 2019년 공동체역량강화사업을 주로 주민협의회의 분과활동을 활성화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분과활동이 공동체사업의 핵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시재생뉴딜사업비는 크게 물리적 사업(hardware)과 공동체역량강화사업(software)으로 나눌 수 있는데, 보통 물리적 사업비가 85% 정도를 차지한다. 사업비 비중으로 보면 공동체역량강화사업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도시재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사업이다. 물리적 사업의 결과물로 만드는 공동이용시설이나 주민편의시설을 어떤 형태로든 주민이 운영해야 하는데, 그 운영주체인 주민공동체를 만드는 씨앗사업이 바로 공동체역량강화사업이기 때문이다. 도시재생사업이나 마을만들기사업 같은 국가공모사업에서 모두 주민 주도를 강조하지만 실제로 주민 주도로 추진되는 사업은 매우 드물다. 한국 사회에서 지역공동체 또는 마을공동체는 붕괴된 지 이미 오래이므로 주민 주도가 되려면 거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길어야 5년, 보통은 3년 남짓한 사업 기간 안에 탄탄한 공동체를 새로 만든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공동체성이 상대적으로 강한 농촌지역에서 추진되는 일반농산어촌개발사업조차 성공사례가 많지 않은 것이 그 방증이다. 이장이나 노인회장 같은 몇몇 마을리더에 의지하여 추진되는 사업이 많은데, 그 리더가 지치거나 포기하게 되면 공동체사업 자체가 흔들리거나 무너지기 일쑤다. 그래서 일반농산어촌개발사업으로 만든 시설이나 건물이 흉물로 방치되는 곳이 허다하다. 그러므로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 사실상 도시재생사업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볼 수 있다.


2019년 용머리여의주마을주민협의회의 분과는 교육, 환경, 복지, 홍보, 농업, 사업 등 총 6개였다. 15명의 주민협의회 모든 위원들이 분과활동에 의무적으로 참여했고 위원들 자신이 선호하는 분과의 장이나 부분과장을 맡았다. 교육분과는 EM(응용미생물)을 활용하여 친환경 생활용품을 만드는 교육을 했다. 많은 주민이 참여하여 EM샴푸와 EM비누, EM세제 등을 만들고 나눠가져갔다. 현재 교육에 참여했던 주민 십여 명이 모여 EM협동조합을 준비하고 있다. 농업분과에서는 ‘정원가꾸기(gardening)’ 교육을 통해 갖가지 화분을 만들어 분양했다. 환경분과는 동네에서 쓰레기가 쌓여있는 곳을 찾아 청소하고 농업분과와 협력하여 화단으로 가꿨다. 청소할 때마다 불법쓰레기가 1톤 트럭으로 한가득 실려 나갔다. 복지분과는 한 달에 한 번씩 동네 어르신들에게 점심 식사를 대접했다. 평균 사오십 명의 주민이 식사를 했다. 때때로 동네의 착한가게인 중화음식집에서 음식을 후원했지만 대부분은 온전히 복지분과에서 준비했다, 사업분과에서는 바리스타 교육을 했다. 10명의 주민이 2급 바리스타 자격과정을 이수했고 9명이 자격증을 취득했다. 올해는 제과 교육을 할 예정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활동은 홍보분과에서 했다. 다른 도시재생 현장에서는 1년에 몇 번 내기도 힘든 소식지를 14회나 발간했다. 거의 2주에 한 번꼴로 나온 셈이고, 이 소식지에는 100여 회에 이르는 주민협의회의 회의와 활동이 빼곡히 기록됐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소식지 원고의 대부분을 홍보분과 주민기자들이 작성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 활동은 주민협의회 정기회의와 분과회의를 통해 기획하고 준비했다. 주민협의회는 매주 정기회의를 하는데, 현장지원센터가 설치된 2019년 3월부터 12월 말까지 단 한차례도 거르지 않고 총 33회가 진행됐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에서 국민 또는 민족(nation)을 ‘상상된 공동체’라고 정의했던 것은 민족의 실체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민족이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적 공동체”라는 뜻이다.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실체화되는 것이 바로 국가다. 사실 모든 공동체는 어떤 형태로든 상상된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는 환상이지만 또한 실재한다. 가장 단순하게 정의한다면, 필자는 공동체가 사회적 관계의 연결망이라고 생각한다.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어떠한 관계를 상상하고 그 관계를 실현하는 활동이 이어진다면, 그 연결망이 현실 세계에 존재하든 가상세계에 기초하든 상관없이 공동체는 만들어질 수 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재현했던, 이웃의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알고 식사 때가 되면 어느 집에서든 밥 한 끼 얻어먹을 수 있었던 ‘동네공동체’가, 용머리여의주마을에서 실제로 만들어질지는 아직 확실히 모른다. 그러나 2019년부터 최소한 주민협의회를 중심으로 일부 주민들이, 이웃관계를 만들어가는 ‘어떤 공동체’를 상상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발문—
1 원래 nation은 국민국가 또는 국가라고 번역되어야 맞다. 그러나 초기에 nation을 민족으로 잘못 번역하면서 민족으로 통용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렇게 표기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의 민족을 영어로 표기하자면 ethnic group이다.



글 이경진 용머리여의주마을현장지원센터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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