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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3 | 연재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③
1968년 미국 역사의 한복판에서
임안자(2020-03-06 11:25:25)




일리노이대학의 폐병전문병원
나는 쿡 카운티 병원과의 계약이 끝난 뒤 일리노이주립대학 의대에 속하는 폐병전문병원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얻었다. 입원환자는 거의가 결핵환자들이었는데, 쿡 카운티 병원과 달리 그곳엔 인종차별 없이 흑백인 환자들이 섞여 있었고 병실 구조도 훨씬 나아 보였다. 처음 3개월 동안은 병동에서 일하다가 병원의 규칙에 따라 4개월째부터 수술실로 보내졌다. 폐나 흉곽 수술은 학생 시절 실습 시간에 한두 번 지켜보긴 했지만 거의 새로운 분야여서 아무래도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간호사가 차근히 잘 도와줬고, 다른 젊은 간호사도 소탈하고 너그러워 소통이 잘 됐다.


수술은 60대 호주 출신 의사와 하버드대학 출신인 40대 의대 교수 둘이서 맡아 했고, 파리대학에서 온 젊은 의사가 그들의 유일한 조수였다. 60대 의사는 새로운 수혈법으로 국제적으로 이름난 외과의사였다. 보통 수혈을 할 때는 다른 사람의 피를 쓰기 마련인데 그는 수술 전 환자의 피를 미리 뽑아 냉장고에 보관해 두었다가 수술 때 본인에게 돌려주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시카고의대 교수는 수술할 때 환자의 피를 한 방울도 헛되이 흘리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실력을 자랑하는 흉곽 수술 전문의사였다. 아무튼 실력 있는 두 의사에다 쾌활한 30대 프랑스 인턴 그리고 호흡이 잘 맞는 두 간호사들 곁에서 내가 수술실에서 할 일은 쿡 카운티에 비할 수 없어 흥미로웠고, 분위기도 한 가족처럼 잘 아우러져 일하기에 한결 편했다. 특히 의대 교수가 수술을 맡는 날이면 수간호사의 표정이 눈에 띄게 즐거워 보였는데 알고 보니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랬다.


보통 외국 간호사의 수술실 근무는 3개월로 끝났다. 그러나 내 경우는 수간호사가 간호원장에게 나를 계속 수술실에 두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병원 계약이 끝날 때까지 6개월을 더 수술실에 남을 수가 있었다. 그 때문에 다른 교환 간호사들의 불평도 있었지만, 나에겐 더없이 고마운 선물이었다. 그 밖에도 수간호사는 나를 가끔 집으로 데려가 저녁을 해 주었고, 내가 소설을 즐겨 읽는다는 걸 알고부터는 책들을 빌려주는 등 여러모로 나를 잘 보살펴줬다. 그녀의 저녁식사에는 가끔 외과의사도 함께 자리를 했는데, 그는 수술만 잘하는 게 아니라 문학과 예술에도 놀라울 정도로 해박하여 그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마치 신나는 강의를 듣는 것 같았다. 멋지고 성숙한 연인들 곁에서 나는 사랑이 얼마나 진지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조금씩 터득해 갔다.

그리고 시카고의 아름다운 미시간 호수를 마주하고 있는 수간호사의 큼직하고 잘 갖추어진 아파트는 내가 미국에 와서 처음 발을 디딘 중류사회의 사적 영역이었으며, 답답한 기숙사를 벗어나 따듯한 가정 초대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정이 듬뿍 깃든 귀중한 공간이었다. 사실 그전에 쿡 카운티 병원에서 새로 들어온 교환 간호사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시카고 변두리의 가족 방문‘이 두 번 있긴 했으나 번번이 초청객보다는 가족의 번지르르한 잔치로 끝나서 따분하고 싱겁다는 느낌을 받곤 했었다.


그 밖에도 나는 수술실의 간호사의 초청으로 오하이오주에 갈 기회를 얻었다. 1968년 4월 5일이었는데, 친구는 오후 늦게 병원 앞에서 나를 차에 태우고 남쪽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그런데 반 시간도 안 돼서 갑자기 경찰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면서 차를 뒤로 빼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들 뒤에는 수많은 군중이 마구 소리를 지르며 거리를 꽉 메우고 있었다. 친구는 빨리 자동차를 돌려 다른 길로 빠져나갔지만, 가는 곳마다 분노에 찬 흑인단체가 차에 불을 지르고 있었고, 길가의 상점 문들은 무더기로 깨지고 불타고 있었다. 옆의 경찰에게 이유를 묻자 ’폭동‘이라며 빨리 떠나라고 소리쳤다. 친구는 그런 와중에서도 침착히 짙은 연기 속을 헤치며 시외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한 시간 늦게 우리는 오하이오주에 딸린 조그만 시골에 도착했고, 친구의 동지들과 만나 신나게 먹고 마시면서 즐거운 주말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흑인들의 데모를 깜빡 잊었는데, 나중에 시카고에 돌아온 뒤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경찰이 폭동이라고 불렀던 거리 데모는 사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 소식에 울분을 참지 못한 민중의 자발적인 항의였다. 알다시피 흑인해방운동가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지난 세기 중반에 시카고 흑인층 시민을 위해 최초로 ’자유운동‘을 일으켰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었다. 그런 인물이 우리가 오하이오주에 가기 바로 전날 테네시주의 멤피스에서 대낮에 한 떠돌이 백인 남자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시카고의 데모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극적 죽음 뒤에 미국 곳곳에서 일어났던 대대적인 항의의 출발점이었다.



페병전문병원은 일하기엔 만족스러웠으나 간호사들의 기숙사는 너무 허술하고 불편스러웠다. 원래 병동으로 쓰던 곳을 기숙사로 만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그랬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1967년 간호사 집단살인사건이 일어났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시카고를 들끓게 했던 이 살인사건으로 한 집에서 같이 살던 외국 출신 간호사 열두 명이 한 젊은 남자의 손에 무참히 죽임을 당했다. 그중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한 생존자의 도움으로 살인자는 곧 찾아낼 수 있었지만, 그 뒤 시카고 지방정부는 외국 간호사를 고용하는 병원은 의무적으로 병원 안에 기숙사를 만들도록 지시를 내렸고, 바로 내가 쓰던 기숙사가 그에 속했다. 그런 면에서 쿡 카운티 병원은 형편없었던 곳이지만, 기숙사만은 100여 명의 간호사들이 맘 놓고 살 수 있는 편안하고 안전한 곳이었다.


아무튼 비록 보잘것없는 기숙사였지만 한국 간호사 네다섯 명이 살고 있어 심심하지 않았고, 그중에 나와 방을 나눠썼던 연세대 간호학과 출신은 마음이 곱고 정이 많아서 첫날부터 서로 마음이 통했다. 그리고 방 친구가 취미로 꽃꽂이 학교를 다닌 덕분에 텅 비어있다시피했던 방에 일주일마다 새로운 꽃들이 장식돼 그래도 화사한 분위기 속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때로 우리는 주말이 되면 음악회나 예술 전시에도 가고 기숙사 부엌에서 밥도 직접 해 먹으면서 내가 병원을 떠날 때까지 잘 어울려 살았다. 그러나 1년 뒤 내가 멀리 떨어진 다른 병원으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우리의 우정은 아쉽게도 그것으로 끝나 버렸다.


임안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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