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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4 | 연재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⓸
시카고에서 머문 마지막 1년
임안자(2020-04-10 11:37:28)



노르웨지안 아메리칸 병원
나의 교환간호사 계약은 사실 2년으로 끝났다. 그러나 미국의 ‘공인간호사(RN, registered Nurse)’ 자격증을 따던가 아니면 캐나다 몬트리올로 오라는 선배 언니한테로 가서 문학 공부를 할까 해서 1년을 더 시카고에 머물기로 작정했다. 둘 다 경비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체류 연장은 물론 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한때 불법체류자였던 친지로부터 그 방면에 경험이 풍부한 변호사를 소개받음으로써 문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됐다. 수수료가 좀 비싸긴 했으나 “앞으로 1년 동안 이민국에서 조사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변호사의 장담대로 정말로 내가 시카고를 떠날 때까지 경찰 조사는 한 번도 없었다.


시카고에서 세 번째인 새 일터는 백인 지역에 있는 ‘노르웨지안 아메리칸 병원’으로, 백인 환자만을 위한 사립병원이었다. 의사들은 미국인보다 서유럽과 쿠바를 비롯한 남미 출신들이 더 많았고, 고용인들 중에 흑인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외국간호사 중에는 놀랍게도 필리핀 출신이 주류를 이뤘고 한국에서는 나를 포함하여 두 명뿐이었다. 나는 새 병원에서도 위장수술전문의 수술실에서 일하게 됐는데, 위장수술은 다행히 예수병원에서도 많이 봤던 데다가 페병수술실에서 1년간 쌓은 경험으로 충분했고 작업량도 그다지 많지 않아서 일 자체는 전보다 휠씬 더 편하고 순조로웠다.


그러나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병원에서 나에게 준 숙소는 이미 한국 간호사가 살고 있던 방이었다. 서울에서 적십자간호학교를 나온 그녀는 교환간호사가 아닌 이민 온 간호사로 몇 년을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한국 사람과 방을 같이 쓰게 돼서 반가운 마음으로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얼굴을 찡그리며 말도 없이 나가버렸다. 그날의 무례한 행동은 그러나 시작에 불과했다. 그녀는 이틀도 못 가서 여차하면 나에게 마구 소리를 지르던가 아니면 싸움을 걸었다. 그리고 내가 어쩌다 외출하고 좀 늦게 들어오면 문을 잠그고 열어주지를 않아 그럴 때마다 나는 기숙사의 응접실 소파에서 잠을 자야 했다. 문제점은 그곳의 기숙사 역시 1967년 간호사 집단살인사건 이후에 병동의 한쪽을 뜯어고친 것으로서 방은 누가 봐도 둘이 살기에는 터무니없이 비좁았다. 해서 나는 시간이 가면 나아지겠지 하고는 그녀와 가까워지려고 나름 노력을 했으나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 나를 낮잡아보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결국 나는 그녀의 히스테리를 견디다 못해 간호원장을 찾아가 다른 방을 달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돌아온 그녀의 대답은 “빈 방이 하나도 없다”였다. “한국 사람끼리 재밌게 지낼 줄 알았는데 안타깝다”고 말하는 그녀가 되려 너무 미안해해서 내가 오히려 민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개인 집의 방이라도 빌렸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사실 1967년부터 외국간호사는 병원 밖에서 살 수 없다는 병원 규칙 때문에 그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없는데 난들 어쩌랴! 그저 1년만 꾹 참는 거라고 스스로 다짐을 하고는 하는 수 없이 그녀 곁에서 끝까지 참고 견뎠다.
 
그런데 계약이 끝나기 서너 달 전 잠시나마 지옥 같은 방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쯤 해서 수술실에 독일 베를린대학의 의대생이 들어왔는데 바로 그가 구원자였다. 그는 수술실에서 한 달 동안 관찰자로 초청되어 간호사들이 살고 있는 기숙사에 머물렀다. 나는 기숙사의 부엌에서 요리를 하는 동안 한쪽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는 그와 한두 번 마주치다가 하루는 서로 소개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서툰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고는 “저녁에 독일의 디아스포라 단체에서 준비한 음악회가 있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새 병원으로 옮긴 뒤 한 번도 음악회에 가지 못했던 터라 나는 그의 초청이 너무 기뻤다. 그리고 그날 저녁 음악회 모임에서 그의 의대 동창생 친구 둘과 화학 전공의 여자친구 하나를 만나 아페리티프(식전주)를 마시며 오랜만의 외출을 즐겼다. 그뿐 아니라 나를 초청한 친구가 피아노를 치고 그의 친구 중 하나가 바이올린을 같이 연주했는데, 들어본 적이 없는 현대음악이었지만 객석은 긴 박수와 함께 ‘브라보’가 터질 정도로 열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친구들을 통해서 알게 됐는데 그는 어릴 때부터 음악가가 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의학을 택했고 피아노 말고도 첼로도 전문가에 가깝게 연주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음악회가 있은 지 며칠이 지나서 나는 부엌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그를 또 만나 음악회가 정말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그는 칭찬해 줘 고맙다며 베를린에 오면 첼로도 들려주겠다고 장난 섞인 약속을 했다. 그리고는 “그와 친구들 모두 한 달 뒤에 귀국하는데 다음 주에 자동차를 빌려 열흘쯤 서부 쪽으로 여행할 생각이다. 자동차에 빈자리가 하나 있으니 당신도 같이 갈 생각이 있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독일의 젊은이들과 서부 쪽 여행이라?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너무 뜻밖이어서 아찔했지만 그같이 좋은 기회를 놓치긴 너무 아까웠다. 다행히도 나에겐 아직 2주 동안의 휴가가 남아 있었다. 스위스로 빨리 가기 위해서 남겼던 것인데 그들과 여행하는 게 훨씬 낫다 싶어 사무국에 물어 허락을 받았다. 미국에 와서 네 번째의 여행이었는데 쿡 카운티에 있을 때 YMCA 단체 여행을 통하여 일주일씩 두 번 버지니아의 리치몬드와 캐나다 몬트리올로 버스 여행을 갔다. 그리고 2년째에는 오하이오로 주말여행을 했으나 서부 쪽을 간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우리 다섯은 값싼 자동차를 빌려 타고는 서부를 향해 달리면서 라디오에서 줄곧 나오는, 그때 한참 유행이던 비틀스의 노래 ‘헤이 쥬드’를 따라 불렀고 음치인 나까지도 그들을 따라 응얼거리며 오랜만에 찾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넓디넓은 서부 지역을 샅샅이 구경하면서 마음껏 즐겼다. 경비를 아끼기 위해 식사는 주로 햄버거, 샌드위치, 팬케이크 정도로 때우고 호텔은 몸을 씻기 위해 두 번 자고는 나머지는 다섯이 한 차 속에서 새우잠을 잤다. 나를 여행에 초청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의 빠듯한 경비 때문이었다. 열흘 동안 우리의 여행 진로는 시카고에서부터 시작하여 샌프란시스코-요세미티 국립공원-시에라 국유림-샌디에이고-데스 밸리-라스베이거스-그랜드 캐니언 국립공원을 돌았는데 가는 곳마다 뛰어나게 아름답고 신기로웠다. 특히 우리가 시카고로 돌아가기 전날 그랜드 캐니언의 높은 산등성이에서 본 일몰의 찬란한 풍경은 처음 보는 황홀한 장관이었다. 우리의 서부 여행은 그렇게 멋있게, 그러나 너무 빨리 끝나버렸다.


열흘 동안 말다툼 한번 없이 흥겹게 지내던 친구들은 시카고로 돌아온 뒤 바로 독일로 떠났다. 그리고 나는 여자의 온갖 잔소리를 들으며 스위스로 떠날 때까지 네 달 동안을 더 살아야 했다. 그리고 한때 관심거리였던 미국간호사 자격증과 캐나다로의 이주 문제는, 그 때문에 불법체류까지 했으면서도 점점 관심 밖으로 밀려났고 스위스로 오라고 재촉하는 옛 친구의 부름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임안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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